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1. 13:52

내 신앙의 화요일

마가복음 11:20-25

(고난주간 화요일)

 

예수님의 마지막 화요일은 굉장히 피곤한 날이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간의 기록 중 화요일에 대한 기록이 가장 길다. 화요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3장에 이르고, 절수로는 115절이나 된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부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논의들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화요일의 기록 중에서 3분의 2는 성전관리들,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과 예수님이 충돌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머지 3분의 1은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에 대한 묵시와 임박한 인자의 도래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예수님과 대결한 세력들은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 그룹이었다.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질문을 통해 예수님과 대결을 벌이는데, 그들의 질문은 궁금해서 묻는 것, 가르침을 받으려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 예수님을 군중의 지지로부터 떼어 놓은 후 죽이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성전관리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권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여기서 이런 일은 전날 있었던 성전정화 사건을 말한다. 예수님이 성전의 환전상과 제사제물 공급 상인들을 내쫓은 일은 그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이익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괘씸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그러한 일을 벌인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일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영업을 재개하려고 했다.

 

중세의 종교개혁 당시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신학화 작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면벌부를 팔아 자금을 모았다. 이에 반발한 어거스틴 수도회의 사제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걸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행하고 있는 잘못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교황청에서 마틴 루터에 대한 제재를 가했다. 그의 문제제기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응에 의해 그들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다른 기득권 세력이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 위하여 달려든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이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것은 외통수 같은 질문이다. ‘세금을 바치라고 말하면 유대민중들의 공분을 살테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하면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다음의 말로 대응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구절은 기독교 역사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는 종교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와 정치적 의무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이 말씀을 들이대곤 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는 이 구절을 들이대며 독일국민에게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치열한 논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이 구절은 이 세상의 영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의 주장이 그렇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뜻은 무엇일까?

 

만약 예수님이 이 세상의 영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대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 자들의 치부를 드러내어 그들을 물리침과 동시에 무엇이 진리인가를 밝히 드러내고자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으신다.

 

우선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동전 하나를 보여 줄 것을 요청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동전을 꺼내어 보여준다. 그들의 주머니에서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두 가지의 동전이 시중에 유통되었다. 하나는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나 동물 등 어떤 상도 새겨지지 않은 동전이었다.

 

유대교에서는 어떠한 형상을 새겨 유통시키는 것을 신성모독죄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여호와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면, 당연히 이들은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은 동전을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가지고 다녔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두려워하고 섬겼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그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황제에게 속한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냐?” 이 말의 뜻은 이 세상에는 황제에게 속한 것이 따로 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선언하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선언이다. 특별히 레위서는 이렇게 선포한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23).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것이고, 성실하게 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모든 존재는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아래 그 모든것을 자유롭게 누리되, 훼손하면 안 된다. 탐욕은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필요 이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공격에서도 실패를 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달려든다. 이들이 지닌 비장의 질문은 사후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인의 수혼제도를 통해 사후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에 대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져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시도한다.

 

사두개인은 그 당시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부와 권력을 모두 쥔 기득권층이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을 성경으로 인정한 반면에, 이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예언서는 권력을 가진 부유층에 의해 주도된 사회제도의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성경이다. 한마디로, 예언서는 부와 권력을 쥔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담고 있는 성경이다. 그들은 당연히 예언서의 말씀이 듣기 싫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한 사후 세계를 안 믿었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동시에 부활도 믿지 않았다. 사후 세계에 대해 관심도 없으면서 사후 세계를 질문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이들은 그저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 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을 가하기 때문이었다.

 

부와 권력은 최고의 영적 장애물 중 하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 나라에 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신실한 영성가들은 부와 권력을 등지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후 세계에 대하여 질문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한 대응을 통해 이러한 교훈을 주신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가 중심이라는 것이. 사후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후의 종교가 아니라, 현재의 종교이다. 우리는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불안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 먼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과거의 아픔이나 미래의 불안 때문에 죽은 것처럼 사는 자는 산 자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

 

화요일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어느 율법학자와의 대화이다. 모든 기득권층이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위에서 본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사악한 의도를 가진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듣고 싶어서 던진 진물이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하나님의 도)은 무엇입니까?’

 

어느 대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과목이 있었는데, 그 중에 노자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한 학기 노자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그 수업을 담당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험 문제를 냈다. ‘노자의 사상을 논하시오!’ (나도 대학시절 이스라엘 역사를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기말시험 문제가 이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하여 논하시오!’) 그런데, 노자에 대한 기말시험을 친 학생 중 당당하게 100점을 맞은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의 답안지에는 이러한 답이 써 있었다. “”. 노자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무(nothing)이다.

 

1세기 바리새파 율법사 중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 있었다. 샴마이와 힐렐이다. 어떤 이가 이들에게 찾아와 위의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과 똑 같은 것을 질문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샴마이는 율법을 어떻게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느냐고 타박을 주며 그 사람을 쫓아냈다고 하고, 힐렐은 율법을 다음과 같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고 한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그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에 대한 주석이다. 가서 그것을 배우라.”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해 말씀하셨다. 첫째는 신명기 6 4-5절 말씀인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레위기 19 18절의 말씀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모든 것(우리의 가슴, 영혼, 마음, )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이사(황제, 이세상)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차별을 거부하고, 상대방을 나와 똑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대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힐렐의 해석과도 맥을 같이 한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차별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은 차별 받기 싫어하면서 자신이 가진 다른 사람과의 다른 어떠한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율법학자의 반응이 참으로 놀랍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12:33). (To love him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understanding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to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s more important than all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보다 정의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깊은 설명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화요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하루였다. 하지만 매우 의미 있는 하루였다. 그렇다면, 내 신앙의 화요일은 어떤가? 나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그의 가르침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 속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사는가? 나는 모든 차별을 거부하고, 한 명의 겸손하고 다정한 인간으로 서 있는가? 이것은 내 신앙의 화요일에 진지하게 던져봐야 하는 질문들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