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5. 05:06

이 잔을 마시라

마가복음 14:12-16

(고난주간 목요일)


예수님의 마지막 목요일은 극적인 사건으로 가득 찬 날이었다. 목요일에는 세 개의 사건이 크게 놓여 있다. 유월절 만찬, 겟세마네 기도, 그리고 당국에 의한 체포이다. 이 세 개의 사건에 놓인 아픔은 네 가지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고,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부인을 당하고, 나머지 제자들에 의해 버림을 당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 사형 선고를 당한다. 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겹쳐 있다.

 

우리는 흔히 고난주간 중에서 목요일과 금요일 앞에 자를 붙여, 성목요일(Maundy Thursday)과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 부른다. 성목요일은 세족 목요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마가복음에는 세족식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요한복음 전승에서 온 이야기이다.

 

목요일에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몇 가지 다른 관점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 첫째, 두 복음서는 날짜 계산이 다르다. 마가는 만찬을 벌인 날이 유월절이라고 말하는 반면, 요한에게 목요일(만찬 한 날)은 유월절 전날이다. 요한은 특별한 신학적 이유를 가지고 날짜를 다르게 계산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가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 보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둘째, 두 복음서는 모인 일(만찬)에 대하여 분량의 차이를 보인다. 마가복음은 14 17~25절까지, 9절에 걸쳐 전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13장에서 17절까지, 5장에 걸쳐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만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긴 설교(고별설교)가 실려 있다.

 

셋째, 두 복음서는 그 날 일어난 일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마가는 만찬을 통해 요즘 우리가 성만찬으로 부르는 의식이 행해진 것을 말한다. 그 만찬의 핵심은 이 말로 집약된다. “이것은 내 몸이고, 이것은 내 피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이야기를 전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목요일을 세족 목요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목요일을 영어로 ‘Maundy’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Maundy’명령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새로운 계명을 가리킨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34).

 

유월절 만찬은 두 명의 제자에 의해 은밀하게 준비된다. 비밀리에 준비된 이유는 가룟 유다 때문이다. 그가 만찬 장소를 미리 알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유월절 식사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식사가 마칠 때까지 유대의 방해가 있으면 안 된다. 유월절 만찬은 세 가지의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1) 그들은 유월절 음식을 함께 먹었다. 2) 예수님은 임박한 배신에 대해 말한다. 3)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에 그의 임박한 죽음과 관계된 의미를 부여한다.

 

그 당시 공동식사는 하나의 문화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동식사는 그 당시 보편적인 공동식사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과 버림 받은 자들과 함께 식사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평등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함께 식사 함으로써 상대방을 나의 형제로, 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다가 빵과 포도주는 실제 빵과 포도주로서 한끼의 식사를 의미한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이었다. 먹을 게 없어서 고통 받고, 빚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이 그 당시 서민들의 애환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요점도 이것이다. 떡과 물고기가 기적적으로 많아진 것이 요점이 아니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눔을 통해서 배고픈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우리도 그러한가? 우리도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고동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가?

 

유월절 만찬이 끝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자리를 옮긴다. 예수님은 어두 컴컴한 그곳에서 체포된다. 그만큼 가룟 유다와 유대와 로마의 당국자들이 하는 짓이 어두운 짓인 것을 알 수 있다. 죄악은 모두 어두운 데서 일어나는 법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를 통하여 그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셨을 그 때,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군사들은 들이닥치고, 제자들은 도망친다.

 

목요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제자)과 거짓 그리스도인(제자)에 대한 분별의 눈을 가지게 된다. 만찬은 일종의 예배의식이다. 거기에는 말씀(요한복음-고별설교)과 성례전(이는 내 살이요, 내 피다)이 있다. 그 자리에 제자들은 함께 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겟세마네까지 갔다. 그곳은 기도의 자리였다. 제자들은 예배의 자리에 이어, 기도의 자리까지 함께 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마시기로 한 잔을 함께 마시지 못하고, 도망친다. , 그들은 십자가까지는 함께 못 갔다. 이 지점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제자)과 거짓 그리스도인(제자)가 갈리는 지점이다.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자. 우리도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에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마신 그 잔을 함께 마시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했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에 앉혀 앉혀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느냐?”

 

우리는 이것 때문에, 부활절까지 밀고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잔을 마실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온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을 꼭 거쳐야 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예배와 기도의 자리까지 밖에 못 갔던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이 잔을 마시고, 십자가의 길을 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제자동의 완성은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넘어, 예수님과 함께 이 잔을 마시는 데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된다.

 

마가복음 자체는 AD 66-74년 경 유대땅에 있었던 대환란 기간 동안 가혹한 박해를 당했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진 성경책이다. 박해를 당하면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처럼 이 잔을 마시고 끝까지 예수님을 붙든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잔을 마시지 못하고 베드로처럼, 그리고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배교) 친 사람들도 있었다.

 

복음서는 예수를 닮은 사람들에게는 찬사이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닮은 사람들에게는 회개와 용서의 희망을 안겨주는 위안이 되었다. 가장 큰 죄는 예수를 부인하거나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면 언제든지 용서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의 상실이다.

 

지금 당장은 예수님처럼이 잔을 마시는 것에 실패했을 지라도, 절망에 빠질 필요 없다. 우리는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의 능력을 입어 예수님처럼 이 잔을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할 때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이 임함을 잊지 말고, ‘이 잔을 마시라는 주님의 요청에 아멘으로 믿음으로 화답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