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7. 17. 05:49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삼하 6:1-19)

 

여호와의 법궤는 블레셋 족속과의 전투에서 빼앗긴 후 버려져 있었다.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긴 일로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망하고,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에게는 재앙이 닥쳤다. 신앙(여호와의 법궤)을 빼앗긴 자도 망하고, 신앙을 빼앗은 자도 망한다!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는 사무엘상 6장까지 나온다. 그 이후로,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본문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가 다윗의 이야기와 더불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다윗은 신앙에 기대어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앙은 삶을 일으켜 세우고,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교회를 일으켜 세우고,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신앙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버려져 있던 여호와의 법궤를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은 것은 다윗이었다. 다윗과 같은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버려진 신앙을 제자리에 옮겨다 놓는,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신앙을 구석에 처박아 두고 살지 말라.

 

여호와의 법궤를 옮겨 놓는 일은 세 단계에 걸쳐서 진행된다. 첫째, 다윗이 삼만 명을 택한 백성을 거느리고 아비나답의 집을 찾아가 그곳에서 법궤를 가지고 나오는 이야기, 둘째,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 , 웃사의 잘못으로 인해 법궤가 곧바도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는 이야기, 그리고 셋째,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다윗이 다시금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가지고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야기 순으로 진행된다.

 

본문의 이야기를 봐서 알지만, 좋은 마음,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무슨 일을 진행해도 그것이 생각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있다. 대개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든, 인내와 지혜와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첫 단계 이야기에서 다윗은 법궤를 운반해 오기 위해 장정 3만명을 선별한다. 두 사람에서 네 사람만 있으면 들 수 있는 법궤를 옮기기 위해 장정 3만명이나 필요할까? 효율성을 따지는 게 아니라, 중요성을 따져야 한다. 다윗은 그만큼 여호와의 법궤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한 두 사람만이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집안의 모든 사람들, 모든 이들, 모든 민족이 해야 하는 일이다.

 

교회는 한 두 사람의 열심, 헌신으로 세워지면 안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세워 나가야 한다. 그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대표만 보내서 그 일을 처리하는가? 그렇지 않다. 집안의 모든 이들이 그 일에 동참한다. ?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참여하고 동참해야 한다.

 

예배는 여호와의 법궤를 운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예배는 언제든지 모든 성도들이 나와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출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문제, 신앙의 중요성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러한 저러한 일 때문에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예배에 나온 이들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은 지체들까지도 품는 마음으로, 그들이 모두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예배 드리고 있다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도 비록 몸은 지금 다른 곳에 있지만, 성령 안에서 그 영혼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거룩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화롭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는 풍요로운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법궤를 빼앗길 당시 전쟁터에서 죽은 장정이 3만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때와 똑같이 3만명을 이끌고 법궤를 찾으러 갔다는 것은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본문에서 우리의 흥미를 가장 끄는 이야기는 법궤를 옮기는 중에 발생한 웃사의 죽음사건이다. 웃사는 왜 죽었을까? 웃사는 최선을 다 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죽고 말았다. 웃사의 잘못은 무엇일까?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 방문 중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본의 아닌 듯 하나) 무례를 범해서 영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그 이유는 영국 왕실 의장대의 사열을 받을 때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앞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여왕의 앞길을 막는 것는 영국 사회에서는 굉장히 무례한 일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도 공식행사에서 함께 걸을 때 몇 발짝 뒤에서 따른다.

 

웃사의 잘못은 그와 같다. 여호와의 가는 길을 막아섰다. 여호와께 벌어지는 일을 자신이 조종, 또는 조작하려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상태로 이끌려 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법궤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놓아두었어야 하는데, 웃사는 그것이 자신이 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무슨 일을 할 때,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부흥회를 자주 다니시는 어떤 목사님의 일화이다. 그 분은 부흥회를 가면 교회에서 제공해주는 숙소에서 자지 않고, 부흥회 기간 내내 집회가 열리는 본당에서 자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분은 교인들에게 자신과 함께 교회에서 함께 자면서 철야할 사람을 모집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참 열심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어떤 교인 한 명은 나에게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분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부흥강사라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했다. 그러면, 부흥회 하면서 교회에서 자는 강사는 훌륭한 강사이고, 교회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자는 강사는 부족한 강사인가?

 

대개, 열심은, 자기의, 자기만족일 때가 많다. 그 분도, “나는 부흥회 기간 동안 여러분이 제공한 숙소에서 자기 않고, 교회의 맨바닥에서 자면서 기도합니다!”라고 이야기는 것은, ‘나는 이런 부흥사야!’라는 자기의와, 그렇게 해야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자기만족이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지난 13년간의 담임목회를 돌아보며, 반성할 때가 많다. 내가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게 어떠한 열심이었나. 자기의와, 자기 만족을 위한 열심은 아니었다,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담임목회 초년 생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설교를 열심히 준비했다. 그때 설교의 주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열심히 전하면서, 나는 거기에 내 의를 실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랬다. 나는 나 스스로 부모를 잘 공경하고 있다는 자기의를 내세워 (사실 그렇지도 못하면서), 설교를 통해서 부모를 잘 공경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목소리에 너무 힘을 주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전했다.

 

어떤 결과가 왔을까? 부모 공경을 잘 안 하던 사람이 회개하면서 부모 공경을 잘 하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던 집사님 가정이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났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시집 식구랑 잘 지내지 못하는데, 제가 시부모님을 잘 못 모셔 죄송합니다.”

 

담임목회 초년생 때, 개척교회 할 당시, 한 사람이 귀하고 아쉬운 그때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열심히 교회 일을 하시던 집사님 가정을 잃고, 크게 깨달았다. ‘나의 의를 드러내는 일과, 자기만족에서 오는 열심은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 이후, 설교하면서 나의 의, 나의 만족, 나의 열심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늘 노력한다. 그냥 주님이 말씀하시는 통로로만 쓰임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성경에 보면, 엘리야도 같은 경험을 했다.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큰 승리를 거둔 뒤, 이세벨의 살해 위협이 무서워서 브엘세바로 도망을 친 엘리야는, 사환을 남겨두고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정신을 차린 엘리야는 호렙산에 이르러,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엘리야는 열심이 유별났었다. 그런데, 그는 그 열심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열심 때문에 실의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고, 죽을 위기에 처해진다. 엘리야의 열심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열심이었는가!

 

여기서 12절 말씀을 보자.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한지라”.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열심을 보였던 웃사는 허무하게 죽고 말았는데,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오벧에돔이 복을 받은 이유는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는 길을 가로막지 않았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다한 웃사가 복을 받게 될거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오벧에돔이 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참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복 받기 위해서 때로는 너무도 많은 열심을 낸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결국, 자기 만족, 자기의 가 아닌가! 웃사처럼 손을 뻗어 떨어지는 법궤를 잡으며, 주님, 내가 이렇게 몸을 날려서 법궤를 잡았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 건축하면서, 애들 돌반지, 예물로 받은 금, 모두 다 교회 건축 헌금으로 바쳤다. “주님, 제가 이렇게 금 다 바쳤어요!” 자기의, 자기만족?)

 

(이스라엘 광야에서 금송아지 만들 때, 성막 만들 때, (땅 파서 채굴한 것이 아닌)그들이 낸 금으로 만든 것! 급하게 나오면서 금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챙겨 나왔는지! 우리가 금을 바쳤으니, 물 줘!, 고기 줘!, 안전하게 가나안 땅에 데려다줘!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금을 바쳤는가!)

 

요나, 처음에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일 당함 ? 그의 열심 때문에! 그가 생각하기에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느니웨를 망하게 놓아두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의 열심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는 길을 막아 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요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열심을 내지 않는다. 그저 마지못해 니느웨 성에 이끌려 성을 걸으며 열심도 없이 그냥, 몇 마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온 성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열심 내지 말아야지, 라는 말인가? 아니다. 다윗을 보자. 어떻게 했나?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힘을 다했다는 것은 진실한 마음의 표현이고, 춤을 추었다는 것은 사랑과 기쁨의 표현이다.

 

내가 주님을 향해서 하는 일은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 일을 하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는가? 어떤 사람은 그러한 모습을 미갈처럼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다. 진실을 몰라주는 사람은 꼭 있다. 그런 사람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주님이 갚아 주신다.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진실한 마음을몰라주고 비웃었던 미갈은 부끄러움에 처하게 된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심(섬김)에는 반드시 복이 따른다. 그 열심은 자기의와 자기만족을 뺀, 다윗과 같은 힘을 다해 춤을 추는진실한 열심,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열심이다. 그러한 열심에는 반드시 오벧에돔에 내렸던 복처럼, 그리고 다윗에게 내린 복처럼, 나만 복 받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복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모든 백성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 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9).

 

하나님의 가는 길을 막아 서지 않고,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복을 받은 오벧에돔처럼, 진실한 마음에서, 그리고 사랑과 기쁨의 표현으로 힘을 다해 춤을 추었던다윗처럼, 주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주의 자녀들이 되어서, 오벧에돔처럼, 다윗처럼 복을 받는 믿음의 자녀들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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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