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6. 29. 09:26

거룩한 낭비

(마태복음 26:1-16)


가끔, 낭비와 소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낭비의 반대말은 절약이고, 소비의 반대말은 저축 정도가 될 것 같다. 낭비는 주관적인 가치이고, 소비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경제적 가치이다. 1997IMF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절약이나 저축이라는 말은 꼬리를 감추었다. 대신에, 소비가 미덕인 사회가 되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카르페 디임 (Seize the day)”이라든지, Yolo족 같은 개념이 생긴 것은 소비가 미덕인 사회가 구축되면서이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저축이 사회의 미덕이었다. 은행의 저축 금리도 높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돈을 보며 행복해 했다. 그러나 요즘 저축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금리가 낮거나, 그리고 은행에 돈을 맡기면 오히려 관리비를 받는다. 그래서 요즘은 소비나 투자가 사회의 미덕이 되었다. 사회 경제체제가 소비자나 투자자를 환영한다.

 

오늘날의 이러한 경제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은 낭비한 것일까, 소비한 것일까, 투자한 것일까?

 

본문에는 예수님을 둘러 싼 세 부류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종교 지도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가룟 유다이고, 또다른 하나는 이름 모를 향유를 부은 여인이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는 이야기와 향유를 붓는 이야기, 그리고 가룟 유다가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은 30 세겔에 넘기는 이야기가 섞여 있다.

 

이야기가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다. 예수를 죽일 궁리를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이야기와 그 궁리에 맞장구를 쳐주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 중간에,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우리는 끔찍한 이야기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끔찍한 이야기 가운데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본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셨을 때에 한 여인이 찾아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부었다. 베다니는 여리고로 가는 길에 있던 마을로 감람산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와 여리고로 가려면 베다니를 거쳐야만 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한 동네였는데, 히브리어로 베트 아니야, ‘가난한 자의 집’, ‘고뇌자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동네였다. , 베다니는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밀려난 가난한 자들이 사는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을 보고 제자들이 분개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무슨 의로도 이것을 허비하느냐?”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9). 맞는 말이다. 가난한 동네에서 이렇게 비싼 향유를 쏟아 붓는 일은 부적절해 보인다.

 

마태복음에는 향유 한 옥합이 얼마의 값어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향유의 값어치는 3백 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1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값을 지니고 있었다. 여인은 1년 치 월급을 한 순간에 쏟아 부은 것이다. 이 얼마나 낭비인가!

 

이와 대비돼서 전개되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에서 그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를 팔아 넘기는데 그 값으로 은 30세겔을 받는다. 이것은 소가 어떤 사람의 종을 들이받았을 때 그 종의 상전에게 지불하는 금액이다(21:32). 값어치로만 보더라도 향유 한 옥합과 은 30세겔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 의미는 더 크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려 그분의 고귀함을 표현했지만, 종교 지도자들과 가룟 유다는 예수를 노예() 취급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나무라는 제자들을 오히려 나무라신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 그 여인의 행동이 왜 좋은 일일까? 제자들이 보기에 그 여인의 일은 헛된 일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 여인의 일이 좋은 일인 이유는 이렇다. “그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2).


그 여인이 예수의 죽음을 미리 알고 향유를 부은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을 드려 그분께 감사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킨다. 이처럼 우리가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거룩한 행동이 된다.

 

요즘 경제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 여인의 향유 사건은 낭비가 맞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낭비이다. 경제적 가치로 따졌을 때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사람들은 자기 계발 또는 휴식을 위해서 일요일을 쓰지만, 우리는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 , 시간의 거룩한 낭비가 예배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투자 가치가 있는 것에, 이윤을 창출하는 곳에 재물을 쓰지만, 우리는 그 재물을 주님께 드린다. , 재물의 거룩한 낭비가 헌금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곳에 생명을 쓰지만, 우리는 사명을 위해 생명을 쓴다. , 생명의 거룩한 낭비가 예수의 죽음이고 우리의 헌신이다.

 

사랑은 낭비를 낳는다. 사랑하면 쓸데없이 마음을 쓰게 된다. 그래서 시간을 쓰게 되고, 재물을 쓰게 되고, 생명을 던지게 된다. 이게 가장 어려운 것이고, 가장 고귀한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요즘엔 그러면 집사람한테 욕 먹지만, 연애할 때는 그렇게 꽃을 많이 사다 바쳤다. 하루 지나면 시들 꽃인데,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꽃 외에는 다른 것으로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현금 가져다 주는 것을 가장 기뻐하지만.)

 

여인은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낭비라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칭찬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 당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장례, ,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귀한 향유를 부어 예배하고 찬양할 만하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죽음은 여느 사람의 죽음과 같은 죽음이 아니라 모든 세상을 구원하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투자 또는 소비를 넘어서 낭비를 하며 산다. 정말 그렇다. 자신은 낭비가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낭비한다.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시간이든 재물이든 생명이든, 남들 눈에 보기에, 낭비할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드리는 헌금, 우리가 드리는 헌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좋아해서,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거룩한 낭비가 아니라, 그저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우리는 오늘도 거룩한 낭비를 한다.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시간과 재물과 우리의 몸을 드려 거룩한 낭비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낭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거룩한 낭비를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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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