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7. 10. 15:19

파레시아

(요한 14:11-21)

 

우선 11절의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 ‘이같이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의 내용은 두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 모노게네스(독생자)와 힐라스모스(화목제물)가 그것이다. ‘모노게네스는 요한복음 316절에서도 나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모노게네스)를 주셨으니에서 모노게네스유일한, 하나의뜻을 가진 모노스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되다, 완성되다의 뜻을 가진 기노마이를 합해서 만든 단어이다.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풍부한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성경은 그것을 외아들(독생자)’로 옮기고 있다. 특별히 유교문화권에 속한 한국에서 외아들(독생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경향이 모노게네스의 뜻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축소시키는 면이 있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아들을 낳기 위한 하나님의 배우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생각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모노게네스는 하나님의 가족관계를 따지기 위한 단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가족관계를 따지려 한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이 모노게네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유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유비적 표현은 우리 인간에게 익숙한 것을 비유로 들어서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을 설명하려는 표현방식이다. ‘모노게네스는 유비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모노게네스를 단순히 외아들(독생자)’로만 이해서는 안 되고, 그것이 가지는 풍부한 뜻을 통해 모노게네스를 파악해야 한다. 거기에는 유일하다는 뜻과 시작과 완성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딥쉬코스(두마음)’라는 단어의 반대말이기도 한데, ‘딥쉬코스와 비교하면 모노게네스한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딥쉬코스는 선악과를 따먹고 두 마음을 품게 된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인데, 이것과 대조적으로 모노게네스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살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간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힐라스모스(화목제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마음인 우리가 한 마음이 되도록 그 길을 열어주셨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한마음(모노게네스)’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독생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두마음을 떠나, 한마음을 가지는 것이 구원이다. 두 마음을 떠나서,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호거주(메노)하는 것, 이 상태가 구원이다.

 

그것을 이루게 해주는 두 가지 요소는 믿음과 사랑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독생자-모노게네스 / 주님/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 안에서 사랑이 솟아난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 하나님이 보인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12). 사랑하면, 하나님이 보인다!

 

이뿐 아니다. 사랑하면 비로소 상대방(타자)이 보인다. 자식은 부모가 제일 잘 안다. ? 사랑하니까. 친구는 친구가 가장 잘 안다. ? 사랑하니까. 아내는 남편을 / 남편은 아내를 가장 잘 안다. ? 사랑하니까. (살다보면, 잘 모르는 순간이 온다. ‘저 사람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 사랑의 적신호? / 옛날에는 결혼 안하고 사시는 신부님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사시는 목사님들이 더 대단한 거다. 결혼관계를 행복하게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자식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하지 않으면, 감히 안다고 말하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다.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관계만 더 나빠진다. 반대로, 무슨 말을 하려거든 절대적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하라. 다른 마음이 들어가면 시험에 든다. 부모가 자식에게 100만번 잔소리해도 자식은 부모에게 절대로 시험에 안 든다. ?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는 남들에게 무슨 말 할 때는 사랑의 마음으로 말하기 보다는 의로운 마음으로 한다. 그래서 시험에 드는 거다.

 

왜 믿음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래야 구원 받으니까?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모호하다. 구원이 확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구원이 무엇인지, 즉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호거주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모든 생명이 완성을 이루게 되는 종말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믿는 일과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가? 이게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믿어야해요? 왜 사랑해야해요?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믿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이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믿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더라도 믿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 말씀에 나와 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7).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본성이 있다. 식욕, 성욕 등으로 대표되는 욕망과두려움이 인간 본성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욕망과 두려움의 문제가 은혜롭게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죄인으로 전락한다. 욕망과 두려움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본성을 나쁘다 할 수 있나. 나쁜 것은, 인간의 본성인 욕망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다.

 

후배 중에 SNS IRS 사칭 사기(scam)를 당한 사례를 올린 친구가 있다. ‘IRS 직원인데 세금을 얼마얼마 빚지고 있는데 그거 빨리 안 내면 당장 체포(arrest)하겠다.’는 전화였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이용한 전형적인 사기행각이다. 요즘엔 사기 전화(scam call)이 많이 온다. 얼마 전 나도 사기 전화(scam call)에 당한 적이 있다. 쓰레기 처리 회사(Republic)이라며, 미지급 대금(unpaid balance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처리해야 하니까, 카드번호 알려달라고 했다. 의심 없이 알려줬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Republic 회사에 전화 걸어서 확인해 보니까, 그 전화는 사기(scam)였다. 곧바로 카드 정지시키고, 새 카드로 바꾸었다.

 

세상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고, 우리를 타락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자극하고 선동하고 이용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어떠한 제품을 향한 욕망, 또는 어떠한 것을 가지지 못하면, 구비하지 못하면 뒤처진다는 두려움을 조장해서 우리는 죄짓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못살게 만든다.

 

학교를 예로 들면, 하버드(Havard)를 향한 욕망을 말할 수 있다. 그런 명문대를 안 나오면 사회에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두려움이 우리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런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고,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 아무리 이렇게 얘기해도, 하버드를 향한 욕망과 이 사회에 대한 두려움은 안 없어질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도, 마치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래도 하버드 가야지! 내 자식은 거기 보내야지!’ 그럴 것이다. 그만큼 욕망과 두려움은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욕망과 두려움을 해결하는 이 세상의 방식도 우리 안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는 이유는 욕망두려움때문이다. 그 앞에만 서면, 인간은 작아진다.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작은 성 아이와 싸울 때 이스라엘은 왜 졌는가? 한 사람의 욕망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어야 하는데 (헤렘법), 한 사람의 욕망이 그것을 망쳤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뭔가? 아간이다. 그가 묻힌 아골 골짜기는 욕망의 무덤이다.

 

복음서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에게 왜 꾸지람을 들었는가? 한 달란트를 가지고 이윤을 남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아무 것도 안 해서 그렇다. 한 달란트 받은 종 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5:24-25). 이처럼 두려움은 사람은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정말 생뚱맞은 짓을 하게 만든다. 어떠한 사람이 황당한 일을 하게 되는 이면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어떻게 될까봐…’

 

두려움의 반대말은 담대함이다. 담대함이 바로, 헬라어로 ‘파레시아이다. 내가 성경의 말씀 중 가장 좋아하는 두 단어는 파루시아파레시아이다. 담대함(파레시아)을 가진자는 이 세상을 파루시아(종말)처럼 산다.

 

타락한 종교와 거룩한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타락한 종교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한다. 반면에, 거룩한 종교는 욕망과 두려움을 넘어서도록 도와준다.

 

그렇다면, 타락한 신앙인과 거룩한 신앙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타락한 신앙인은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사람들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한다.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반면에 거룩한 신앙인은 욕망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산다. 이 세상이 조장해 놓은 욕망과 두려움의 덫에 걸려 허덕거리지 않고 자유롭게 산다.

 

믿음과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두려움과 믿음은 공존할 수 없다. 두려움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욕망과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지어, 죄인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믿는 일과 사랑하는 일에 날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만 중요한 일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심판 날이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우리는 이미 그 마음에 담대함(파레시아)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불쌍한 자녀는 부모 앞에서 담대하게 서지 못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자녀들이다. “아빠 100원만!”이라고 말할 때, 아이는 내 앞에서 당당한가, 아니면 두려워하는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느니라”(18).

 

믿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예수 그리스로를 구주(독생자 / 모노게네스)로 시인하는 일, 믿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게 되시는데,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호거주(메노)하면, 거기에서 생겨나는 사랑이 담대함을 만들어 내고, 그 담대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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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