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14. 14:53

잃어버린 질문

(데살로니가전서 5:1-11)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의 서신 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기록시기가 앞서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진 성경책이라 쉽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게다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보고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탄생부터 다룬 일대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대개 기원전 50여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대략 20년 정도 후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관심사가 당연하다라는 말을 썼다.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경을 봐서 알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에는 아래와 같이 8군데에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1) 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 계시록 1 7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

 

3) 베드로후서 3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4) 야고보서 5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5) 히브리서 9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6) 골로새서 3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7) 사도행전 1 10~11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으니라

 

8) 마태복음 26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이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죽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믿었던 성도들이 한 명씩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던져진 심각한 도전이었다. 첫째, 재림에 대한 믿음에 도전이 왔고, 둘째,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신앙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왔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궁금증을 사도 바울에게 질문했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그리고, ‘재림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지탱해준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재림의 소망 때문에 그들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고, 재림의 소망 때문에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소망 가운데 그들은 재림을 기다리며 세상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자매들이 한 명씩 죽어갔다. 당연히 믿음이 흔들리고, 소망이 수그러들어갔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던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라는 질문은 이제 현대기독교인들에게는 잃어버린 질문이 되었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 때문에 현대기독교가 점점 소망과 긴장을 상실한 채 죽어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재림을 질문하면, 사이비 집단인 것처럼 호도되기도 한다. 하기야, 워낙 사이비 집단들이 재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흐려 놓은 면이 많다.

 

초대교회 전통에 부활절 전야제(Easter Vigil)라는 것이 있다. 개신교는 예전과 의식이 많이 약해서 교회 전통을 지키지 못하는 면이 많다. 이러한 부분은 반성하면서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기독교 전통이 강한 교파에서는 아직도 부활절 전야제를 지킨다.

 

에모리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교에 있는 캐논채플에서 열렸던 천주교의 부활절 전야제에 참석한 일이 있다. 나는 그때의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예배는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특별히 화려한 포퍼먼스는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읽고, 독창 또는 중창의 찬양이 이어졌다. 때로는 함께 부르기도 했다. 3시간 동안 자리를 뜨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진지했다. 자정까지 이어진 3시간 동안의 예배를 마친 뒤, 세례(세례성사)자들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세례반에 모여 세례 받은 이를 축하하고 환영하고 축복했다. 참으로 거룩하고 엄숙한 시간이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재림이 밤에 있을 것이고, 특히 부활절 전야에 주님이 오실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절 전야에 함께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소망했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인들의 전승에서 온 것인데, 기록은 보면 이렇다. “메시아는 애굽에서 유월절을 축하할 때 멸망시키는 자가 그들 위에 지나간 것처럼, 한밤중에 오실 것이라는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 유월절 철야제의 날,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자정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Jerome on Matt. 25:6: 생명의 삶 Plus에서 인용).

 

이러한 전통은 살려야 마땅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절대로 지키기 어려운 전통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는, 세상을 이기는, 세상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교회는 이러한 거룩한 전통을 회복해 가는데 힘 쓰면 좋겠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이렇다. “알 수 없다.” 이 대답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책임한 대답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재림의 시기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 주권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재림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재림이 돌연히 임할 것이라는 경고는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재림이 돌연히 임할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두 개의 은유를 들어 말한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것이다.”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갑자기 이를 것이다이다.

 

구약성경에는 주의 날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구약에서 주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과 보복의 날을 의미한다(1:15, 2:12, 30:7, 13:5, 5:18). ‘주의 날이 임하면 믿는 자(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지만, 믿지 않는 자(불의한 자)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은 춘향전에 많이 비유한다.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난 이몽룡, 그의 사랑하는 여인 춘향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날이지만, 포악을 일삼은 변사또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날인 것과 같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에서 평안과 안전은 로마시대의 정치적 슬로건이었다. Pax Romana! (로마의 평화!)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다시피, 로마의 정치적 슬로건은 얼마 가지 못했다. 5세기경 서고트인들(게르만족)에 의해서 로마는 점령당하여 불타고 만다. 그때, 로마가 이 땅의 천년왕국(하나님의 도성)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꿈꾸고 소망해야 할 하나님의 도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집필한 책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다.

 

재림은 이렇게, ‘도적같이’, 그리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방심할 때에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처럼 갑작스럽게 온다. 이것은 주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의 갑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는 재림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메타포는 빛과 어둠이다.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고, 도둑은 밤에 온다. 6절에 나오는 이라고 하는 단어는 헬라어의 카쓰유데인이다. 이것은 도덕적 해이를 가리킨다. 단순히 도덕적 해이라기보다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세 가지 덕에서 멀어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 세 가지 덕은 믿음의 일’, ‘사랑의 역사’, ‘소망의 인내이다(13).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정신차리고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며 산다. 여기서 정신 차리다라는 말은 군대용어로, ‘밤에 깨어 보초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군대용어를 빌어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경심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8).

 

호심경투구는 로마 군대의 전투 장비를 말한다.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을 여기에 비유한 이유는 그만큼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함이다.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흐물흐물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이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어느덧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벗어 놓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처럼,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치며 살고 있는 듯 하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재림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야 우리는 벗어 놓은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위하여,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세상을 이기는, 세상을 넘어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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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