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1. 11:27

자유

(갈라디아서 5:1-12)


화룡점정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고대 중국 양나라의 장승요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안락사라는 절의 주지스님의 부탁을 받고 그 절에 용을 그리고 마지막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그 용이 벽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점정'은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는 뜻이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화룡점정이다. 인간은 자유를 얻는 순간, 하나님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자유는 생명의 최고 가치이다. 자유가 없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반대로, 생명의 자유를 빼앗거나 억압하는 것은 최고의 죄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유를 스스로 박차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성경은 생명과 자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셨다. 그런데 불과 두 장 뒤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과 자유를 버리고, 죽음을 선택한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는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죽음을 택하는 인간의 의지가 교차되어 나오는 이야기이다”(유진 피터슨, <자유>, 2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6). 우리는 오늘도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다. 거기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 “네가반드시 죽으리라”( 2:17). 죽음은 어떠한 실체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현실에 대한 충만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이 너무 죄와 죽음에 절어 있다 보니까, 생명과 자유를 얻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며 산다. 이 상황은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오랜 감옥 생활 후에 출소한 모건 프리먼이 한 독백과 같다. “이제 허락 받지 않으면 오줌도 안 나온다.” 또한 이 상황은 오랜 세월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출애굽했지만, 상황이 불편해지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노예 근성을 못 벗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다 보니, 자유를 얻었음에도 자유를 누리며 살 줄 몰라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약속하시고, 복을 주셨다. 이제 그들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복을 누리면서, 믿음으로 살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덧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과 복을 잃어버리고, 애굽이 부과한 일을 통해 그들이 주는 고기와 밥과 국을 받아 먹으며 산다.

 

이제 그들은 일하며 사는 법은 알지만, 믿음으로 사는 법은 잊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살지 않고, 애굽에 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도 일하며 사는 법은 알지만, 믿음으로 사는 법은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과 복을 믿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고기국과 밥을 얻어 먹으려고 그들이 기획하고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며 산다.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서신이라 불린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만 봐도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한다. 구원은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무엇인가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뜻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유를 누린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유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선물은 자유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인간은 자꾸 죽음을 택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구원) 때문이지, 우리의 의지나 마음가짐이나 정치적 행동이나 지성 때문이 아니다”(유진 피터슨, <자유>, 29).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건지다(exaireo)’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표현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어디에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권세로부터 구속받는 것을 의미한다”(유진 피터슨, 33). 건지심근본적인 건지심이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 세계와 예정된 구원으로부터 분리시킨 죄로부터의 구속이다”(유진 피터슨 33).

 

하나님의 이 건지시는 은혜 (구원)’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생명이나 자유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 이전에는 먼저 하나님의 건지시는 은혜가 존재한다. 이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밥을 먹을 때도, 일 할 때도, 차를 타고 어디 갈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잠을 잘 때도그래서 우리는 매순 간 그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굳건하게 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유는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자꾸 보장된 안전과 바꾸려 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도 그랬다. 그들에게 위협이 된 이단사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할례의 요구였다. 쉽게 얘기해서, 구원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단사설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복음을 버리고 할례를 받았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엄중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굳건하게 서라라고 한다. 우리는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는 믿음이지, 할례가 아니다. ‘보상이라는 제도에 절어 있는 인간은 사랑으로써 역사는 믿음’, 즉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겁게 또는 기쁘게 한 결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자유이다. 그렇지 않은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자체가 우리를 얽매이게 한다.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그 순간 우리는 그저 구원에 볼모 잡힌 노예가 되고 만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이단사설에 대하여 강력하게 규탄을 한다. 우리가 순화된 언어와 순화된 감정으로 읽어서 그렇지 사도바울의 원래 표현은 매우 거칠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 이것은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갈라디아는 이교도들의 지역이다. 그곳에는 퀘벨레-아티스라는 종교의식과 거세를 한 사제들이 활동을 왕성한 했다. 위의 구절은 이런 뜻이다.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성기)를 잘라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지키는 일에 이렇게 단호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굳건하게 지키며살고 있는가? 우리가 얻는 자유는 공짜 즉 은혜로 받은 것이지만,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피 값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재는 우리에게 그 자신의 광채를 발산하고,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얻은 사유재산을 굳건하게 지키는 데는 천재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사도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굳건하게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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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