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8. 07:17

성령, 혹은 성령처럼

(갈라디아서 5:16-26)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 제기한 질문은 이것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3:2).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질문이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자.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인가, 아니면 믿음으로인가?

 

이렇게 바꾸어서 물어보자.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는가?” 받았으면 왜 받았고, 못 받았으면, 왜 못 받았는가?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신앙고백)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을 못 받은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과 율법을 착각한다는 것이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통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이 가시적이고, 매력적이고,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율법적인 신앙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남들보다 한계 수준이 높은 이들은 남들보다 자기가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고, 교만해진다. 일례로,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녀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한 기도에서,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을 하고, 자신의 한계 상황 안에 있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잉여의 재산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그들이 금식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잘 먹어서 그런 것이고, 그들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죄를 범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반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생활이 궁핍했고, 금식 하나 안 하나, 평소에 굶는 것을 밥 먹듯이 하기 때문에 금식의 의미가 없을 뿐더러, 금식하다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죄를 짓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불안정한 환경에 내 던져져 있었다.

 

믿음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자신이 정해 놓은 한계 상황에서 바르게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계 상황을 뛰어 넘는 순종이고 영과의 일치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믿음을 가지면 성령을 받는다. 이 말은 이제 육체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영의 인도대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36~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이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것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영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영은 어디에 매이지 않는다. 영은 자유롭다. 영은 활발하고, 강인하고, 모험적이다. 영은 생명력이고, 영은 그 어느 것도 잡아 둘 수 없으며, 영은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감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활발하고, 강인하고, 모험적이다.

 

아브라함이 딱 그렇다. 그는 믿음을 가졌다. 믿음을 가졌더니, 그에게 성령이 왔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다. 그는 활발했고(100세에 아이를 가질 정도로), 강인했고, 모험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할 줄 알았고, 그는 남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일을 감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바치려 한 사건이다.

 

율법은 자신의 한계 상황 안에서만 움직이지만, 믿음은 자신의 한계 상황을 벗어나는 것도 감행한다. , 모험을 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은 자신의 한계 상황을 벗어난 일이고, 모험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한계 상황에만 갇혀 율법적으로 행했다면, 그는 결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삶을 너무도 잘 알고 잘 행한다. 우리는 율법적인 신앙을 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선물로 받게 된 성령에 따라 사는 법은 잘 모른다. 우리는 대개, 갈리디아 교회 공동체에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데선수다.

 

믿음이란, 욕구의 충족 기대가 아니라(~ 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다. 그러나, 그 좁은 길, 좁은 문에 참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길, 그 문을 통과하려 들 것이다. (이제 곧 폐기되는 사법시험에 그 동안 수많은 젊은 이들이 매달렸다. 사법시험은 그야말로 좁은 길’, ‘좁은 문이었다. 그런데, 왜 젊은 이들이 거기에 젊음을 바치는 것일까? 그 좁은 길, 좁은 문을 통과하면, 영광스러운 삶이 열릴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좁은 길, 좁은 문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율법의 행위라는 노역의 시궁창에 빠지고, 육체의 일이라는 탐닉의 늪빠진다. 노역과 탐닉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상하게 할 뿐이다.

 

14. 오늘 말씀처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육체의 일을 통해 탐닉의 늪에 빠지고 있는지 우리는 조금만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아도 금새 알 수 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

 

탐닉의 늪에 빠진다는 것은 그것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린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육체의 일은 모두 그들을 홀리는 어떠한 영(spirit)과 관련이 있다. , 그들(이방인들)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이 음행을 하는 이유, 원수 맺는 이유, 분쟁과 시기와 분을 내는 이유, 술 취하는 이유 등, 육체의 일을 행하는 것의 뒤에는 그들을 움직이는 어떠한 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탐닉의 늪에 빠지게 하는, 그래서 위와 같은 육체의 일을 하게 하는 영과를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산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처럼, 모든 한계를 뛰어 넘는 생명력과 강인함과 모험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처럼, 즉 성령처럼 사는 인생만큼 멋진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소망을 담아 를 하나 지었다. ‘선재(仙在)’ – 신선 선, 있을 재. 신선처럼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나에게는 호가 세 개 있다. 희락당, 사현, 그리고 선재. 그 중 선재는 성령을 가슴에 품은 종말론적인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나의 신학적, 철학적 사상이 담긴 호이다.

 

성령, 혹은 성령처럼’,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성령과 일치하여, 그게 힘들면 성령을 흉내라도 내는 삶, 그런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이 될 것이다. 믿음으로 받은 성령,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일한다  (2) 2017.09.23
잃어버린 질문  (0) 2017.09.14
도전과 응전  (1) 2017.09.07
자유  (1) 2017.09.01
하나님이 하신 일  (0) 2017.08.24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