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9. 24. 04:35

야곱의 축복 I

ㅡ도덕성과 영성ㅡ

창세기 64

(창세기 49:1-7)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복음성가로 만들어져 교회의 예배 시간에 널리 불려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이다. 말씀도 유명세를 타는 말씀이 있다. 대개 예배(또는 예전)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씀은 유명세를 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찍이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예전)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그들은 종교개혁의 내용을 예배(예전)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했다.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에 바탕을 둔 찬송가를 많이 지었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는 종교개혁을 더 효과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다. 그 중 대표되는 찬송가가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이다.

 

야곱의 축복은 우리가 노래로 부르는 것만큼 달콤하지만은 않다. 이 말씀은 복 많이 받아라고 외치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예언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여기에는 축복뿐만 아니라, 저주, 심판 그리고 약속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곱이 아들들을 모두 모아놓고 죽기 전에 풀어놓는 넋두리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온 생의 영적 능력을 담은 예언적 유언이다. 아버지 야곱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의 말씀이다.

 

성경에서 예언이란 점치듯이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행위이다. 점치는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 자신의 미래, 즉 자기 자신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심을 둔다. 자기의 미래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가 중요하다. 점치는 사람들은 숙명론에 빠지지만, 예언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린다.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인데,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지리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나아갔던 모세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차원에서 하나님께 접근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접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의 축복이 야곱의 인생 말년에 일어나는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와 그 말씀을 듣는 자는 동일한 수준에 서 있어야 한다. 이들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빚어지지 않았다면, 대언하는 자나 그 말씀을 듣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둘 중 하나만 모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을 통해 아들들에게 대언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분히 빚어졌다는 뜻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들들에게 대언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2). 여기에는 반복법과 대구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어법이 사용되는 이유는 지금 야곱이 전하고자 하는 예언이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들어야한다. 그런데 이 듣는다는 행위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각기관 중 귀만큼 허술한 것도 없다. 인간의 귀는 절대로 혼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귀는 마음과 함께 작동한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문제는 그래서 지리의 차원(거리의 차원)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인 것이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을만한 도덕성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인간의 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야곱의 축복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험난한 세월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시점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도덕성과 영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결코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 전달되는 야곱의 자녀들이 장자 르우벤과 두 형제 시므온과 레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에게 전해지는 예언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야곱의 축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이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장자가 갖는 특권은 대단했다. 장자는 아버지의 권위를 그대로 불려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보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도 두 배를 더 받았다. 장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명예이고 특권이었다. 르우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야곱은 장남 르우벤을 이렇게 평가한다.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3).

 

여기까지만 보면 르우벤은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아버지 야곱의 말은 가슴 아프다. “…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니리…” 탁월해야 마땅한 사람이 탁월하지 못하게 될거라는 예언이다. 왜 이렇게 르우벤은 순식간에 명예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됐을까?

 

야곱은 르우벤이 이렇게 명예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된 까닭을 우선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르우벤이 물의 끓음 같았다고 말한다. 물이 끓는다는 것은 일정한 범위를 넘어선다는 뜻인데, 르우벤의 인생에 있어 그러한 일이 있었다. 야곱은 비유적으로 설명한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르우벤과 빌하(야곱의 부인 중 한 명)의 간통 사건이다.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4).

 

르우벤에게 있어 지우고 싶은 흑역사였지만, 이 사건이 가지고 온 여파는 잔인했다. 우선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리고 빌하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동생들인 단과 납달리와도 관계가 소원해졌다. 무엇보다 장남으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동생들에게 권위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판 사건 때의 일이다. 요셉을 죽이지 말자는 르우벤의 말을 귀담아 듣는 동생들이 없었다. 결국 그 사건에서 르우벤은 소외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실질적 장자의 축복이 동생 요셉에게로 돌아갔다. 장남에게 돌아가야 할 두 배의 축복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도 르우벤 지파는 별 볼 일 없는 지파로 역사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스르르 사라진다. 르우벤 지파는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요단 강 동편에 자리를 잡아 정착한 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나 왕 또는 예언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지파로 그 지도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르우벤은 도덕적이지도 못했고 영적이지도 못했다.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한르우벤은 결국 물의 끓음 같지선을 지키지 못하고 넘어서는 바람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도덕은 인간의 삶을 얽어 매는 족쇄가 아니라 삶을 지켜주는 안전띠이다. 도덕은 삶을 질주하고 있는 인간들이 서로 부딪쳐 치명적인 사고를 내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안전거리이다. 도덕성과 영성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아서 서로를 분리해 낼 수 없다.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부모의 물건(소유)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언 28:24).

 

다음으로 이어지는 야곱의 축복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함께 내려진다. 이 둘이 따로 예언을 받지 않고 함께 받는 이유는 이들이 무엇보다 여동생 디나의 강간 사건에 대한 보복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5). 여기서 이들이 형제라고 언급되는 이유는 엄마가 같은 형제’(실제로 이들은 엄마가 같은 형제이다)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어떠한 일을 위해 한 통속이 되어 동맹또는 연합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평가하는 단어는 매우 과격하다. ‘이라는 말과 폭력이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것은 이들의 행동을 매우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용어이다. 이들은 자신의 여동생 디나가 강간 당한 것에 대하여 복수하기 위해 둘이 한 통속이 되어 무자비한 폭력을 저질렀다. 비도덕적인 일을 당한 것이 비도덕적인 일을 수행하게 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탐욕과 미움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의 수단을 쓰는 것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못박아 말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6절 전반부). 그들의 모의와 그들의 집회는 도덕성과 영성을 벗어나는 모의와 집회였다. 그들의 모의와 집회는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는폭력 그 자체였다. 폭력에 사로 잡힌 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폭력을 저지르는 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땅(나라)에 발 붙일 곳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의 도덕성과 영성을 잃고 폭력을 저지른 시므온과 레위에게 내려진 예언은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것이다. 폭력성이 짙은 자들은 서로 한 통속이 되도록 놓아두면 안 된다. 이들이 서로 모여 모의하고 집회를 갖게 하면 안 된다. 폭력성이 짙은 자들은 서로서로 떼 놓아야 한다.

 

야곱의 예언은 성취된다.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48개 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21), 다른 지파처럼 기업을 물려 받아 그곳에서 모여 살지 못한다. 신명기서에서 관찰할 수 있는 바, 모세가 각 지파를 축복할 때에 시므온 지파가 빠진다. 그리고 결국 시므온 지파는 자기에게 할당된 기업을 지켜내지 못하고 유다 지파에 흡수된다. 이렇게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야곱의 예언대로 다시는 서로 연합하지 못하게 된다.

 

야곱의 축복은 야곱의 사사로운 복 빌어 줌이 아니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며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예언자로 거듭났다. 야곱의 아들들도 험난한 세월을 그냥 허송 세월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아버지의 예언(축복)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다.

 

만약 그들이 예언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도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을 날을 얼마 안 놓아두고, 아들들을 모아놓고 축복한답시고 저주와 심판을 퍼부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그렇게 저주와 심판을 퍼붓고 있는 아버지의 말씀을 곱게 듣고 있을 아들들은 더더군다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예언했고, 아들들은 들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 아버지의 사사로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덕성과 영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폭력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가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묵상하게 하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축복안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향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예언) 안에 거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저주와 심판 같아 보일지라도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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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