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살리고 싶다

Christianity is Platonism for the masses.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처방약을 보면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 "의사가 이 약을 당신에게 처방해 준 이유는 이 약이 부작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명을 받았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장)


초대교회부터 기독교인들은 이 사명을 열심히 지켰다. 유대땅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세계로 뻗어나갔고, 땅과 사상의 경계를 넘어 서기 위해서 그 땅과 그 땅의 사상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한복음만 봐도, 로고스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로고스는 유대 개념이 아니다.


유대 땅을 넘어 헬라 세계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차용한 것은 헬라인들의 철학인 플라토니즘(플라톤 철학)이다. 그런데, 그 플라톤 철학은 기독교를 설명하기 매우 좋은 사상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원론이다. 플라톤 철학의 특징은 이 세상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세계를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로 이원화하고, 전자를 후자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적, 가치적 우위를 부여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차용하는데, 사실, 거기에는 부작용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기독교를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이 더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이용한다.


현재 기독교에서 유통되는 소위 기독교의 교리는 대개 플라톤 철학을 차용한 교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등장하는 두 왕국 이론도 그렇고, 그의 원죄 개념도 그렇고, 그의 종말론적 시간 개념도 그렇다.


중세에 가면, 플라톤 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더해져, 더 복잡한 기독교 교리가 생성된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만들어낸 성만찬 교리가 대표적이다.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생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섞인 교리이다. 형상(Form)과 질료(Matter)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다.


중세의 보편 논쟁은 모두 플라톤 사유의 반영이다. 보편의 개념(이데아)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 철학이 실재론이고, 그것에 대항하여 보편은 존재하지 않고 개별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철학이 유명론이다. 중세의 가톨릭이 교회를 보편 교회(catholic church)라고 주장한 것은 교회가 보편의 개념으로 교회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야, 보편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한 교회는 영토와 사상을 확장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복음의 훼손을 가져왔다. 복음의 이원론적 해석이 불러온 가장 큰 재앙은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몰이해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더 이상 현실을 정의롭게 정화시키는 원동력을 잃었고, 오히려 사회의 적폐가 되었으며, 여전히 몰역사적인 구원만 외치고 있는 데 머물고 있다.


니체가 외친 구호,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는 옳다. 그리고 그가 말한, “오직 한 명의 기독교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도 옳다. 니체가 도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왜곡한 교회의 파렴치한 역사와 권력이다. 치료를 위해 처방한 약이 그 부작용 때문에 오히려 해를 끼친 격이다. 교회가 지금 부작용으로 죽어가고 있다. 어떻게 그 부작용을 걷어내고, 약효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게 끔 만들 수 있을까? 교회를 살리고 싶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