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에서 시작되는 나의 정치신학적 관심과 과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매일 같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이다. 그가 말하고 있듯이, 개인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은 다르다. 집단은 개인이 하는 것만큼 그렇게 이타적이지 못하다. 집단은 매우 이기적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기독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덕적이고 신앙심이 깊다. 그런데, 연일 뉴스를 통해서 들려오는 교회 집단의 소식은 참담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라인홀드 니버는 그러한 괴리에 대하여 답을 주고 있다.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은 다르다는 것이다. 개인은 도덕의 원리를 통해 움직일 수 있지만, 집단은 그 도덕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아무리 집단(교회)에 양심적인 호소를 해도 집단(교회)은 그 도덕적 양심에 따라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집단에는 개인적인 윤리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정치영역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집단들 간의 관계는 항상 윤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특별히 우리는 교회를 대할 때 이러한 것을 간과한다. 일례를 들어, 요즘 교회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목회 세습의 경우에서도 보면, 세습을 감행하는 개인 목사나 그 자녀들은 신실한 신앙인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습을 감행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욕심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것은 그 집단에 흐르는 정치적인 영역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서 아무리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해도 그들은 그들의 도덕적 양심에 흔들려 세습을 포기하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목회 세습을 끊어내고 방지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양심에 호소하면 안 되고, 목회 세습에 얽힌 집단의 정치적 영역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가진 정치적 대항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니버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충동이 이성(또는 양심적 호소)으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연의 충동에 맞설 수 있는 또다른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정치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버의 분석과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거기에는 난점이 존재한다. ‘힘을 소유한 정치적 대항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 가의 문제가 그 중 하나이다. 인간 개인은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 한, 어떠한 일이 아무리 비도덕적이라도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인의 도덕이 집단의 도덕보다 뛰어날 수는 있지만, 개인의 도덕 자체의 질적인 향상은 그 자체로도 해결하기 쉽지 않은 과제이다.

 

그리고, 집단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을 자기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로 양성하기 위한 자기들만의 도덕을 주입한다. 이미 주입된 도덕적 페러다임을 바꾸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항세력이 정치적 힘을 가지고 도덕적인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할 때, 이해 또는 가치가 상충되는 두 집단 간의 갈등은 자칫 폭력으로 번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물론, 니버는 그에 대하여 간디 식의 비폭력 강제력(non-violent coercion)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운동이 사회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능성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지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서 보여준 촛불혁명은 니버가 제시한 간디 식의 비폭력 강제력의 한 예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운동을 통해서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는 했지만, 과연 세상이 바뀌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나의 관심은 니버가 말하고 있는 정치적 대항세력을 형성하는 데 있어 도덕을 지닌 개인들 간의 연대(solidarity)를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는가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향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연대(solidarity)에 자기 자신을 투신(내어줌)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아무튼, 교회는 집단으로서, 단순히 개인에게 적용하는 도덕,윤리의 양심적 호소로만 정의로워질 수 없다. 집단이 정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접근법보다는 정치적 접근법이 훨씬 중요하다. 교회라고 하는 집단은 개인의 도덕과는 상관없이 그 집단 자체의 속성에 따라 집단이기주의적인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달려간다. 그러한 측면에서 교회의 부정의한 정치적 욕망을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이 필요한 것 같다. 하나는 정치적 대항세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자체를 집단의 속성을 담지하지 못하도록 해체하는 것이다. 첫째의 방법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고, 둘째의 방법은 우찌무라 간조와 그의 제자들, 특히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둘 중에서, 21세기 교회와 사회에 어떠한 것이 더 효과적일지는 연구를 해봐야 할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질 들뢰즈의 철학(리좀, 노마디즘, 멀티플러서티)과 요한 밥티스트 메츠(Dangerous memory)의 신학을 바탕으로 교회의 문제를 정치신학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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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