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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3.30 눈을 뜬다는 것
  2. 2014.03.30 목마른 세대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30. 23:01

눈을 뜬다는 것

(요 9:1-12, 5:8-14)

 

레슬링 선수와 소방수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소방수가 이깁니다. 왜요? 소방수는 물불 안 가리니까요! 그러면 소방수와 눈 먼 사람(장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눈 먼 사람(장님)이 이깁니다. 왜요? 보이는 게 없으니까요!

 

50, 60, 70대 남자의 대화

50– 아내한테 배고파서 밥 차려 달랬다 죽는 줄 알았어요.

60– 아내한테 어디 가냐고 물어봤다 죽는 줄 알았어.

70오늘 아침에 눈 떴다고 죽는 줄 알았어.

 

도대체, 눈을 뜬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보지 못하는 자들보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고, 보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부류의 대조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나면서부터 눈 먼 자이고, 다른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눈 먼 자는 나면서부터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눈 먼 것까지 힘겨운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눈멂은 이 사람에게 인생 전체에 새겨진 주홍글씨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나 신체장애는 죄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신체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이죠. 참으로 불합리한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불합리하고 죄악된 생각을 예수님께서 뒤집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종교는 이처럼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서 폭력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폭력이 가해지면 사람들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눈먼 이 사람도 저항하지 못하고, 평생 자기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서 죄책감에 싸여 낮고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길 가시던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을 돌아보셨습니다. 함께 가던 제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맹인으로 난 것은 본인이든 부모이든,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저렇게 맹인으로 난 것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을 보아라!” 예수님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그 당시의 통념을 뒤집으셨습니다. 물론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몰아 넣는 것은 불합리한 종교적 폭력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혹시 질병에 걸렸거나 자기 신변에 우환이 생기면 우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싸인인가?’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죄책감에 싸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좀 잘못된 것이 있다 싶으면,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우리의 죽음의 깊이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는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고,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아주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눈먼 자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빛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확인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눈 뜸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그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보십시오. 맹인은 계속해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바리새인들에게 진술합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은 질문합니다. “그 사람(예수)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답답한 맹인은 이렇게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말에 격분해서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다 눈 뜬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면서 말합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랬더니, 눈 뜬 사람이 한탄하면서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면서 눈 뜬 사람은 그 사람,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납니다.

 

이 일을 듣고 예수님은 그 눈 뜬 사람을 만나 위로해주십니다. 그를 당신의 제자 삼으시고,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았고,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눈을 뜨셨습니까? (웃을 때 눈 뜨고 웃으라!) 여러분은 보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까? 이렇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 우리가 말로는 예수님이 보인다 안 보인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장성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람은 맹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몸에 익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몸에 익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이 눈을 뜨면, 마냥 좋기만 할까요? 제가 지금 눈 뜨지 말고 그냥 맹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야죠, 병이 나아야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눈을 뜨고 병이 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눈을 떴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의 자녀로 살지 못할 거면 오히려 눈을 그냥 감고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필연적으로 빛의 자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안 그럽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와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병든 것들을 고쳐주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지긋지긋한 질병도 좀 나았으면 좋겠고, 지긋지긋한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좀 벗어났으면 좋겠고, 예수님의 은혜로 남편, 부인, 자녀 등 가족이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보기 원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맹인처럼 행동합니다. 어둠에 휩싸여서 어두운 일을 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합니다. 왜요? 맹인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삽니다. 마음이 어둡고 행동이 어둡습니다. 남을 헤칠 생각만 하고, 남을 헐뜯을 생각만 하고, 남을 미워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생각만 하고, 사회(공동체)를 분열시킬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이 거룩한 빛을 비추시는데, 어두운 마음이 들고 어두운 행동을 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에베소서 5 9절 말씀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도와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의 허물을 어떻게 덮어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를 어떻게 용서할까를 생각하고,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하면서 자기 자신을 감출 줄 알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빛이신 예수님이 보이는 건지, 안 보이는 건지. 다른 무엇보다 삶의 열매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하고 세상 사람들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세상 사람들이 이깁니다. 그들은 눈 먼 사람들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물불 안 가리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어차피 집니다. 예수님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싸우느라 괜한 에너지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어둠의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어둠의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빛 가운데 거해서,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눈을 뜨셨습니까?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그러면 빛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 하지 마시고,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빛의 열매가 삶 속에서 맺히게 될 것입니다. 눈 뜨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비추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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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30. 22:58

목마른 세대

(출애굽기 17:1-7)

 

<목마른 사슴> 찬양으로 시작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왔던 이스라엘 신광야라는 곳을 지나면서 르비딤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다. 그러나, 이들에게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물이 없었다. 물은 생명에 필수품.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거칠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와 더불어 다퉜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을 치던 그 지팡이로 호렙 산에 있는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을 치니, 거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단순히 물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의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다. 그 뜻은 다투다이다. 이스라엘의 목마름은 단순히 물 없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의 목마름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얼마 전 설교에서, 현대인들이 얼마나 을 안 먹고 사는지, 그래서 몸에 심각한 탈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몸에 탈수현상이 일어나면 건강을 헤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짜증이 자꾸 나기 때문에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기 힘들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 지금 차차 실행하는 것이 있는데, 아이들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는 것이다. 실제로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고, 아이들이 잠을 더 잘 수 있도록 했더니,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훨씬 더 부드러워져서 수업성취도도 좋고, 친구들 간의 다툼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거칠어지게 되어 있다. 힘들고 짜증나니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줄어들고, 오히려 사소한 일에 대해서 다투고 마음 상하게 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식량이나 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영적 빈곤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목마름 중에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심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가장 큰 사회적 문제다. 영적인 목마름. 배고플수록 아무거나 집어 삼키듯이, 영적인 목마름이 심할수록 아무거나 집어삼킨다. 공수부대요원들 산악훈련하면서 아무것도 못 먹고 며칠 굶으면, 지나가는 뱀이 그냥 음식으로 보인단다. 영적인 목마름이 심하니까, 요즘 이단사이비, 미신이 판을 친다. 영적으로 목마르니까, 아무거나 막 삼키는 거다.

 

우리 인생 가운데, 목마름을 채워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영적인 목마름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데 있다.

 

구약의 출애굽기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서신서의 말씀은 로마서인데, 로마서5장에 보면 그것이 잘 나와 있다. 51절과 2절 말씀을 그대로 읽어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픈 배를 채우고 나면, 즐거워진다. 마른 목을 축이고 나면 즐거워 진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채우고 나면, 즐거워지게끔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이다. ,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으면,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픈 배도 채웠고, 마른 목도 축였고, 갖가지 욕망들을 다 채웠는데도 여전히 목마른 자기 자신을 보며 당황해 한다. 온전한 즐거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오늘 다른 말씀과 함께 보기로 되어 있는, 복음서에서 본다.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목마른 여인이 나온다. 이 여인도 자신의 삶에 닥친 여러 가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던 여인이다. 이 여인의 개인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 여인에게는 과거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현재 어떤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여인이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목말랐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삶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인생이 목말랐던 이 여인, 남의 눈을 피해 마른 목을 축이러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길었다. 그리고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목마름을 전혀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다, 한 유대인 남자를 만났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인생에 깊이 베어있는, 그러나 해결할 수 없었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외쳤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삶이 즐거워졌다. 참 신비로운 일이다.

 

지금 이 시대는 목마른 세대다. 물 대신 마실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물로 착각하고 마시다, 심한 탈수증에 시달리는데, 그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자신의 짜증이, 자신의 불만족이, 자신의 어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지금 세대가 겪는 가장 심한 탈수증은, 영적인 탈수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세대다. 광야의 이스라엘 세대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세대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하는 길은 생명의 물인 예수는 마시는 것이다. 그 마시는 행위를 기독교적인 용어로, ‘믿음이라고 한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둘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나고, 우리의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할 수 있다. ,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만족함 가운데, 생명의 온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생명의 물로 내어주어 마시게 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는데도 예수를 생명의 물로 받들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예수를 생명의 물로 마시겠는가?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이 찬양을 부르자.

 

<우물가의 여인처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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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