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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29 감리교 개혁의 길을 묻다

감리교 개혁의 길을 묻다

-       예후의 개혁과 여로보암의 죄

 

지금 한국 감리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타락했다고 지적 받고 있는 오므리 왕조(아합 왕조)와 다를 바 없다. 감독 선거는 금권선거의 온상이어서 돈이 없으면 감독이 되지 못하고, 목사들은 자기의 이익을 성취하기 위해 출신 학교에 따라 줄 세우기 바쁘고, 젊은 목회자들에게는 전혀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불합리한 선거법이 지배하고 있는 감리교의 요지경을 보면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나본 감독님들 중에 자격이 미달인 감독님은 없었다. 내가 만나본 각 신학교 출신(감신, 목원, 협성) 목사님들 중에 이상한 목사님은 없었다. 내가 만나본 젊은 목회자 중에 멍청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감리교는 수렁에 빠져 있을까? 개인적으로 만나본 감독님들이나 각 신학교 출신의 목사님들, 그리고 젊은 목사님들은 모두 다 훌륭했다. 그래도 수많은 한국 교회의 기독교 교단 중에 감리교 목사라고 하면 어디에다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 분들 아닌가. 그런데 왜 감리교는 이렇게 수렁에 빠졌을까?

 

개인이 아무리 도덕적이어도 사회가 부도덕하면 도덕적인 인간도 타락의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이는 라인홀드 니버가 가졌던 관심사인데, 그는 개혁주의 신학과 어거스틴의 신학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그만의 독특한 정치신학 사상을 펼쳤다. 정치신학에서 특별히 국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국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그 구성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발붙이고 사는 도덕적인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독일 민족이 2차 대전 당시 그토록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던 것은 그들이 부도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국가’(사회, 시스템)가 그들을 그렇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수많은 신학자들이 정치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지금 신학계에서는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이라는 독자적인 분야가 생길 정도로 요즘 신학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 체계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열왕기하 9장에 등장하는 예후는 선지자 엘리사의 후원에 힘입어 저돌적인개혁에 돌입한다. 예후의 개혁은 아합의 집안에 초점을 맞춘다. 잘 알려졌듯이, 모반을 통해 왕위에 오른 오므리는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조를 형성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방 여인 이세벨을 며느리로 들이면서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페니키아)과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오므리 왕조는 아합 왕 때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그들의 오만 방자함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놓고 무시하며 바알신을 섬기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힘 없는 자들(대표적인 예로, 나봇)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괴롭힌다.

 

오므리 왕조의 횡포에 맞선 엘리야 선지자와 엘리사 선지자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줄기차게 전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심판의 말씀을 아랑곳하지 않고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의 끝자락까지 치닫는다. 결국 오므리 왕조에 대한 심판 예언은 요람 왕의 군대장관이었던 예후를 통해서 실현되는데, 예후의 종교 개혁과 숙청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카락이 솟을 정도로 오싹하다. 예후는 아합 일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한다. 우선 아합의 아들 아람을 제거하고, 그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유다 왕 아하시야를 동시에 제거한다. 그리고 오므리 왕조 타락의 원흉 이세벨을 제거하고, 그의 모든 자녀들을 제거한다. 또한 그들과 연관이 있는 친인척들을 비롯하여, 바알 숭배자들 모두를 제거한다. 그야말로, 조선 시대 연산군 때 있었던 것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 작업이 벌어진다.

 

예후의 개혁은 그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 고백하고 있듯이,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었다(왕하 10:16). 엘리사 선지가가 기름을 붓고 열왕기하 기자가 예후의 피비린내 나는 개혁에 대해서 악한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을 보면, 예후의 열심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 악에 관심이 높았던 호세아 선지자는 예후의 행동을 비판한다(1:4). 또한 예후의 개혁에 대한 열왕기서는 이러한 평가로 마무리 된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 28-29).

 

여기서 지적 받고 있는 예후의 잘못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얘기해서, 예후는 부도덕한 인간(아합 일가)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부도덕한 사회(시스템)를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서 부도덕한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바꾼다 할지라도, 그 도덕적인 인간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사회, 시스템)가 부도덕하면 구조적인 모순과 악은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여로보암의 죄가 큰 것이다.. ‘여로보암의 죄는 구조적인 악을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로보암은 솔로몬 이후에 정권을 잡은 뒤, 북쪽 열 지파의 지지에 힘 입어 북이스라엘을 세운다. 그러나 그는 남유다의 예루살렘에만 있던 솔로몬 성전으로 북쪽 지파의 사람들이 예배 드리러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결국 자신의 통치 영역에 두 개의 산당을 세워 금송아지 형상의 여호와를 모셔 놓고 거기서 예배하게끔 종교 시스템을 바꾼다. 신명기 사관의 입장에서 기록된 열왕기서에서 여로보암의 죄로 지적되는 이 문제는 독특한 성전신앙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 없는 제도였다.

 

그러나, 북쪽의 열 지파 사람들(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만들어 놓은 벧엘과 단의 산당에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해서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저 멀리 남쪽 예루살렘 성전(솔로몬 성전)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도적인 악이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께 순수하고 거룩한 신앙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벧엘과 단의 산당에 설치된 금송아지 신상(여호와의 신상)에게 절하며 예배 드리는 것은 불경한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잘못된 제도()는 그 제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을 생산하도록 인도한다. 내가 만나본 감독님들과 목사님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었지만, 현재 감리교의 법 제도는 감독이 되고자 할 때 또는 어떠한 이익을 대변하고자 할 때 그들은 잘못된 제도 안에서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불가피한 을 생산해낼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오는 10월에 있는 입법총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장정개정위원회는 열심히 의견을 모으고 개정법안을 마련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열심은 예후의 열심에 비견할 만 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공청회를 거쳐 확정 지어가는 장정개정위원회의 개정법안을 바라보자니, 그들에게 예후의 열심은 있는데 결국 여로보암의 죄를 피하지는 못할 것 같아 우려된다. 특별히, 그 동안 감리교회의 혼란의 중심이었던 감독제도와 선거권, 그리고 신학교 통합 문제에 대한 안일한 대처는 예후(장정개정위원회)의 열심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여로보암의 죄로 남을 것 같다.

 

도덕적인 인간이 그 도덕성을 잘 유지하려면 도덕적인 제도는 필수다. 도덕적이지 못한 제도 안에서 도덕적인 인간의 도덕적인 활동을 기대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다. 이번 입법총회는 도덕성에서 다른 교단 목사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감리교의 목회자들이 그 도덕성을 잘 유지하도록, 도덕적인 제도를 기필코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예후의 열심이 여로보암의 죄(제도적인 모순)까지도 바로 잡는 온전한 개혁을 이루게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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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