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4. 10. 04:33

두려움, , 평강

(요한복음 20:19-23)

 

4개의 복음서는 모두 빈무덤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전하는 방식이나 시각이 약간씩 다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그 사건을 전하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른 것과 같다. 다만, 복음서 저자들이 전하는 것은 빈무덤이다.

 

빈무덤사건에 대해 전하는 방식은 복음서마다 다르지만, 빈무덤 사건이 불러온 제자들의 반응은 같다. 두려움과 의심이다. 본문은 빈무덤 사건이 발생한 날 저녁 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들도 자기의 스승처럼 잡혀가 죽임을 당할까봐서이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에게 오해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 같은 빈무던 사건을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보면, 빈무덤 사건에 대한 유대인 당국자들의 음모가 등장한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가 생전에 했던 말,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던 말을 전하며 사흘동안 예수의 무덤에 경비병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무덤 앞에 경비병을 세워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빈무덤 사건이 발생하자, 그들은 경비병을 매수하여 이런 증언을 하게 한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대인 당국자들이 꾸민 음모의 주범으로 지목된 제자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처한 두려움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으나 실제적인 고통을 가져온다. 두려움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본문에서도 표현하고 있듯이, ‘문을 닫게 만든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조심하게 만드는 순기능도 있지만, 두려움이 깊어지면 무엇보다 삶은 그 자체로 문을 닫아 버리고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두려움은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들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든다. 두려움은 생명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창살 없는 감옥과 같다.

 

성경은 두려움과 맞서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생명을 꽃피운 이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와는 반대로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아버리고 그 안에 갇혀 허무하게 생명을 허비하고 마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이다. (11:27-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원래 갈대아 우르에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그 중에서 하란은 일찍 결혼하여 룻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데라의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형제인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모님과 형제들보다 먼저 죽는다. 자식을 잃은 아픔을 당한 데라는 남은 자녀들과 손자 룻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자 한다.

 

그런데, 데라는 무슨 일인지, 가나안 땅으로 가던 중, 중간에서 멈추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곳에 정착해 죽을 때까지 그곳에 산다. 그곳의 이름은 하란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하란 땅에 정착하여 인생의 문을 닫고 그곳에서 살다 죽은 일에 대하여 여호수아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24:2).

 

그렇다. 데라는 자식을 잃은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생의 문을 닫고 우상의 쾌락에 빠졌던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생명의 꽃을 피우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인생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든다.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이 닥쳤고, 그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런데, 두려움에 떨고 있던,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두려움은 평강을 잃은 상태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이 잃은 것을 되찾아 주시고자 한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린다. 평강이 없다. 그래서 표정이 어둡고, 행동이 거칠고, 말에 독이 묻어 있다. 우리는 문을 닫고 산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서기 쉽지 않은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처럼, 내면의 발전도, 관계의 발전도, 신앙의 발전도 이루지 못하며 산다. 생명은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하고 답답하게 갇혀 그 자리를 맴돌다 철 지난 꽃처럼 시들고 만다. 인생의 허무함과 공허함만 묻어날 뿔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생명을 가두고 있는 두려움을 깨부수고 문을 열 수 있을까? 본문에 의하면, 문을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들에게 을 불어 넣어 주신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실제적인 일이다. 두려움이 닥치면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일단 숨이 잘 안 쉬어 진다. 두려움에 처한 사람의 숨소리와 평강 가운데 있는 사람의 숨소리는 다르다. 건강한 사람의 숨소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숨소리는 다르다.

 

무엇인가에 놀란 사람을 안정시킬 때 가장 먼저 하는 게 무엇인가? 숨을 고르게 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치면 숨을 정상적으로 쉬지 못하기 때문에 신체는 자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셧다운시킨다. 그것이 기절이다. 기절은 무의식으로 들어가 신체가 원래 지니고 있는 정상적인 숨의 운동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의 보호장치이다.

 

두려움에 갇혀 문을 닫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1, 22).

 

두려움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동안 제자들을 모으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훈련시키신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기위해서였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두려움에 갇혀 문을 닫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두려움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다.

 

성경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 나라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처럼 두려움에 갇혀 하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란(두려움)을 박차고 나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모세도 처음에는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죽을까봐 두려워 광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문을 닫고 살았지만,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여호수아도 모세의 뒤를 이어 영도자가 되었을 때,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두려웠지만,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을 깨고 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게 땅을 분배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두려움은 문을 닫고 아무 일도 못하게 하지만, 두려움을 물리쳤을 때, 우리는 문을 열고 나가 큰 권능으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시며 두려움을 물리치도록 이끄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보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 두려움을 깨뜨리는 숨을 쉰다는 것,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그대로 행할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이겨내는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기도의 자리에서 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몸소 가르쳐 주셨다. 예루살렘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을 걸으셨다. 십자가의 죽음 앞두고 예수님에게 닥쳐 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이 닥쳐왔을 때 예수님이 행한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우리는 기도를 오해한다. 기도는 단순한 경건생활이거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응답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어떠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큰 능력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기도는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기도이고,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경건생활을 위하여, 원하는 것을 아뢰기 위하여, 무엇인가 응답받기 위하여, 또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작두 타는 사람들이 오히려 기도를 통하여 더 큰 능력을 받는다.)

 

기도는 (루아흐, 성령, 생명의 영)’을 받는 자리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재능(gift)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권능을 받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재능이 없거나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아주 조그마한 예를 들자면,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언어에 대한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다. 영어(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망신당할 까봐에 대한 두려움 등 때문이다. 이 외에, 크고 작은 일이든 우리가 선뜻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능력이 없거나, 권능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무엇인가를 하지 못한다.

 

13년 살던 조지아를 떠나야 한다는 내적인 소명이 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괴롭힌 것은 재정 문제가 아니다. 돈은 어차피 없는 인생이라, 그러한 것은 별로 신경 쓰고 살지 않는다(그 문제에 무책임하거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두려움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두려움,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생활해야할 지에 대한 두려움, 모든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런데, 그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때문인데, 그 숨은 기도의 자리에서 받았다. 30대 초반에 이민교회를 개척해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교회를 세워 나가며 한 가지 깊이 깨닫은 진리는 기도에 대한 것인데, 기도는 두려움을 물리치는 을 쉬게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 숨은 다른 숨이 아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숨이고, 그 숨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불어넣어주신 생기, 생명의 숨이고, 그 숨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다. 그 숨은 담대함이다.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고 꼭꼭 숨어 있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사명을 전혀 감당하고 있지 못하던 제자들이 을 쉬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라.

베드로가 열한 사도들과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창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14-21).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 때문에 문을 닫고 있는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을 받으라. 그 숨은 여러분을 멈추어 서게 만든 두려움을 물리쳐 줄 것이고, 묻을 열고 나와 하나님의 주신 재능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능으로 크고 위대한 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어 보자. 그 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평강을 줄 것이다. 그 숨이 우리의 생명인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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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