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신앙2012. 3. 22. 10:19

이관규천(以管窺天):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다 / 좁은 소견으로 사물을 살펴 보았자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없다


춘추시대 말기에 훗날 의성(
醫聖)으로 일컬어지는 편작(扁鵲)이 괵이라는 나라에 갔을 때였습니다. 마침 병을 앓다가 죽은 태자의 병과 상태를 보고는 편작은 태자를 소생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궁정의사가 어이없어 하며 무책임하다고 하자 편작은 탄식을 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의술은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며(以管窺天)' 좁은 틈새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소." 잠시 뜸을 들였다가 편작은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이 내 말을 정 믿지 못하겠다면 다시 한번 태자를 살펴보시오. 그의 귀가 울고 코가 벌름거리는 소리가 들려올게요. 그리고 양쪽 사타구니를 쓰다듬다가 음부에 손이 닿으면 그곳은 아직 따뜻할 것이오." 다시 진찰해본 결과 편작의 말이 맞았고 괵나라 임금은 편작에게 매달렸습니다. 편작이 침을 놓자 태자는 소생했고 치료를 더하자 20일 후에는 일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편작이 죽은 사람도 소생시킬 수 있다고 말하자 편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 게 아니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고친 것뿐이오" -사기(史記)-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을 넓혀가도 우리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천체 물리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 힘들 듯,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면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인간은 조금 아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부풀려 말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 간의 싸움도 결국 누가 좀 더 많이 알고 있느냐의 싸움이고 그것 때문에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전까지 인간은 이관규천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듭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일도 결국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능력은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수준이기 때문에 열린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고, 내가 아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의 의견과 생각을 존중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진리가 밝히 드러나는 종말의 때까지 우리는 그러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까지, 즉 종말의 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입니다. 특별히 우리 인간의 손과 입과 생각을 거치는 것은 언제든지 왜곡되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참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스스로 진리를 드러내셨지만, 그것이 인간의 손을 거치고 제도화되면서 왜곡되고 타락하는 현상을 겪었습니다. 진리를 그대로 인식하고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최대한 진리를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보존하고 전하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무기 삼아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진리 자체로 드러나고 전해지는 날까지, 즉 종말의 때까지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마음을 활짝 엽시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자불기(君子不器)  (1) 2012.04.10
도남(圖南)  (1) 2012.03.29
창해일속(滄海一粟)  (1) 2012.03.15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 意自見)  (1) 2012.03.06
새옹지마(塞翁之馬)  (1) 2012.02.1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