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19. 12. 18. 08:16

[시론] 허수경의 시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춥겠다 덥겠다 아프겠다 배고프겠다

그들은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 자연의 천사

나뭇잎이 떨어진다

눈썹 없이 의지 없이 기억 없이


(허수경의 시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이 아니라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의 슬픔을 가득 안 고 있는 문장을 만나면, 그 문장은 꽃보다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어느 가을의 코스모스가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심지어 라일락도 아픔을 안고 있는 문장에 비하면 초라해질 뿐이다.

 

"잘 있니?" 시인은 안부를 묻는다. 안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안부를 묻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시에는 그러한 심상이 외부적으로 거의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아픈 역사, 홀로코스트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만 꼽자면, '나치 할아버지'라는 단어만이 어렴풋이 그 심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 사건은 인류의 어느 한 부류만이 경험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라는 모든 부류의 사람이 경험한 사건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환각의 리사이클장에서 폐기되던 전생과 이생의 우리." 그곳에서 '우리'는 이생 뿐 아니라 전생의 삶까지도 모두 짓밟혔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미래의 오염된 희망"이다. 전생과 이생이 모두 폐기됐는데, '우리'에게는 어떠한 미래의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잘 있을 수 없는 존재에게 시인은 계속 묻는다. "잘 있니?" '근본 악'(이것은 아렌트의 용어이다)에 의해 존재가 상실되던 날, '우리'는 아주 신비한 소리를 들었다.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이들을 고요하게 매장했던 바다의 안개 소리도 들었네". 그런데, 그 소리는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명확하지 않다. 시인은 다르게 상상해본다. "아니, 돌고래가 새벽의 태양을 바라보며 출산과 죽음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니?"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그 존재를 인정 받지 못한다는 것은 존재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인식 받지 못하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아무런 죄책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한 행위는 '근본악'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에게 안부를 물어야 한다. 인정 받는 존재만이 아니라 인정 받지 못하는 존재에게도 안부를 물어야 한다. 적어도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인식 받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적극적'으로 안부를 묻는다. "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 춥겠다 덥겠다 아프겠다 배고프겠다." 그들은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 이들"이 아니라, 분명 존재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근본악'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존재를 인식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시인 같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자연의 천사'.

 

이렇게 아픈 낙엽이 있을까. "눈썹 없이 의지 없이 기억 없이" 떨어지는 낙엽 말이다. 그렇게 아프게 떨어지는 낙엽을 손으로 받아내며, 안부를 물어본다. "잘 있니?" 그러면 낙엽은 분명 눈썹에 힘을 주고 의지를 가지고 기억해 낼 것이다. 자기의 존재를!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2. 13. 09:09

[시론] 허수경의 시 아사(餓死)’

 

둘은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간다

빛의 섬이 되어간다

파리 떼가 몰려온다

파리의 날개들이 빛의 섬 위에서

은철빛 폭풍으로 좌상을 파먹는다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가 널리 황무지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ㅡ 허수경의 시 아사부부,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성경은 천국을 보여주기 보다 현실을 보여준다. 성경은 현실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 현실을 보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면서 천국을 보려 한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가뭄에 대한 것이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것도 가뭄 때문이고,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한 판 대결을 벌이게 된 것도 가뭄 때문이고, 예레미야는 가뭄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가뭄에서 구원해 달라고 탄원한다. 가뭄은 인간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온다. 굶어 죽는 일, 아사(餓死)이다.


           허수경의 시 아사는 굶어 죽는 것에 대한 비참함을 전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직 비참함 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가뭄 때문에 모든 생명이 죽었고, 이제 남은 것은 생후 4개월 된 소()밖에 없다. 굶어 죽는 게 일상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소는 겨우살아남은 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소를 데리고 밭을 갈아야 하니, 굶주린 아이나, 그 아이의 손에 이끌려 밭으로 나온 소나 기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이와 소, 두 존재는 진력을 다해 밭을 간다. 아사 직전의 두 생명은 사투를 벌이지만 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 일은 지평선처럼 끝없고 그 뒤에 있는 세계처럼 거짓말 같다. “아이는 겨우 소를 몰았다. 소는 자꾸만 주저 앉았다.” 아이와 소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이미 그들은 전쟁터에 놓여 있다. 소를 일으켜 세워야만 살 수 있는 아이와 일으켜 세워지면 죽고 마는 소의 운명 같은 대결.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주저 앉은 소와 그런 소를 부둥켜안고 일으켜 세우려는 아이는 어느새 한 몸이 되어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갔다. 물기가 없어진 지 오래된 하늘은 바싹 마른 햇볕을 떨어뜨렸고 그 빛에 말라버린 뒤엉킨 생명은 섬처럼 굳어갔다.


           그렇게 생명이 소멸되는 듯했으나, 으로 몰려든 것은 파리떼였다. 그리고 그 파리떼들은 저항력을 상실한 생명을 파먹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빌미로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폭풍같이 달려든 파리떼가 남긴 것은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였다. 그 광경은 잔인하기 그지없으나, 그 잔인함 속에는 죽음과 함께 생명이 넘실댄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우리는 생명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대한 존재는 굶어 죽었으나, 하찮은 존재는 살아남았다. 무엇이 살아남는 것일까. 결국, 가장 약한 게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것은 모두 약한 것이다. 그러니 살아남으려는 자, 하찮게 살라.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1. 12. 15:14

[시론] 허수경의 시 수박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ㅡ 허수경의 시 '수박'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로 시작하는 이 시는 둥글지 못해 겪었던 사랑의 상처에 대하여 말한다. 이제는 둥글어졌기에 이런 아픔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도 그렇다. 둥글지 못할 때,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불행한 일들'에 대하여 날을 세워 존재를 비관하고, 신에게 삿대질을 해대는 날이 있다. 그렇게 살았던 인물이 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의 아버지, 미카엘 키에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가 그랬다. 미카엘은 힘들고 어려운 젊은 날을 보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던 어느 날, 그는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하나님을 저주했다. 그런데 그 이후 그의 삶은 생각과는 달리 풍요로워졌다. 하나님을 저주했으니, 죽거나 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부자가 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떠났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평생 이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죄책감은 아버지의 예언’(그는 자신의 자식들 모두가 저주를 받아 33살을 못 넘길 거라고 생각했다.)보다 오래 살아남은 자식, 쇠렌 키에르케고르에게 유전됐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저주스런 과거를 알게 된다. 하나님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사건 외에도, 아버지가 하녀로 일하던 여성과 혼외정사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고, 그 하녀는 본부인이 죽기 전에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바로 자신(쇠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충격적인 사건들로 인해 쇠렌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이 가진 죄책감과 평생 싸우게 되는데, 그 죄책감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던 연인 레기네 올젠과의 약혼도 파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부여받았다고 믿는 영적이고 실존적 자산을 통해서 제도화되고 굳어져가는 국가 교회 체제(Christendom)에 맞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길고도 험한 철학적, 신학적 여정에 나선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의 존재 자체가 둥그러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러면 위의 싯구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있는 겸손한 존재가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그 치열한 여정의 한 복판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천재가 아니다. 그들은 항상 넘쳐났다.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순교자, 즉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그 자신이 먼저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각성이다. 그러므로 미구에 나의 글뿐만 아니라 나의 전 생애까지도, 기계의 흥미를 자아내는 모든 신비로서 연구되고 또 연구될 것이다. 나는 신이 나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결코 잊지 않으며,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바람은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일기, 18471120).


신의 존재는 언제나 저만치 가 있는 마음같다. 그러나 마음이 둥글어지면 왜 신은 저만치 가 있는 마음일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된다. 둥글지 못했을 때, 신이 이만치 가까이 다가왔다면, 아마 우리의 존재는 멸망했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여정은 이것을 깨닫는 여정이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주님, 저 만치 가 있는 당신의 마음을 사모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1. 8. 03:52

[시론] 허수경의 시 '연필 한 자루'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허수경의 시 '연필 한 자루'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강렬하다. 연필이 무엇인가를 쓰면서 짧아지듯, 우리의 인생도 닳아간다. 짧아진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곧 종말이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짧아지면서 남기는 생의 열매들이 지닌 잠재력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인생은 짧아진다. 매순간 목숨의 한 순간을 어딘가에 내밀기 때문이다. 목숨의 한 순간을 내밀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 심지어 변을 보는 일도 목숨의 한 수간을 내밀어야 가능하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밀기 때문에 짧아진다는 거, 짧아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목숨을 떠밀리듯 내밀어야 한다는 거, 허무하다고 생각하기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해야 맞다. 다만, 내밀 수 밖에 없는 한 순간의 목숨이 무엇을 향해 있는 가가 중요하다.

 

시인의 표현은 대단히 강렬한 영성이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가슴 시리도록 강력하게 다가오는 고백이다.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윤동주의 고백이 오버랩 된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이유는 정치도 박애도 깨달음도 아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민다. 짧아지면서 내민 목숨의 한 순간이 당신을 위한 거라면, 연필 같이 닳아서 없어질 우리의 '모든' 목숨은 모두 '당신'의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1. 6. 03:06

[시론] – 허수경의 시라일락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허수경의 시 '라일락' 부분, 시집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수록)


라일락의 향기는 중독성이 짙다. 봄이 오는 길목을 가득 채우는 라일락의 향기는 웃음기 없는 사람의 마음도 활짝 열리게 한다. 내 어린 시절을 온통 물들인 것은, 봄의 라일락 향기와 가을의 국화 향기다. 봄의 향기와 가을의 향기는 그 결이 다르다. 봄의 향기는 이제 시작되는 인생의 환희가 묻어 있고, 가을의 향기는 이제 저물어 가는 인생의 애환이 묻어 있다.


교회 앞 공터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그 향기를 발하던 라일락, 그래서 봄이 오는 것을 몹시도 그리워하게 만들었던 라일락, 그 나무. 나는 그 라일락 나무가 무참히 뽑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있던 그날을 기억한다. 라일락 나무는 쓰러져 있으면서도 향기를 뿜었다. 마치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온통날 속인 바람의 향연인지 모르겠다. 행복을 찾아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인생의덧없음’, 정말 바람 맞은 기분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마냥 허무로만 채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날 속인 바람을 향해한 방 멋지게 복수하려면, 우리는 그날의 라일락 나무처럼,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것밖에 없다.


푸쉬킨은 말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그의 말은 거짓이다. 그러나 참이다. 삶은 우리를 바람처럼 속인다. 그렇다고 슬퍼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참고 견딜 수만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것밖에 없다.


허수경은 그녀의 다른 시 연필 한 자루에서 이렇게 말한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이 시는 자연스럽게 윤동시의 시 십자가를 연상케 한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예수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내뱉을 때, 하늘은 어두워가고, 몸은 축 늘어져갔지만, 그의 영혼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생동감이 넘쳤을 것이다. 그의 육체는 십자가 위에서 몰락하는 듯 보였으나, 그의 생명은 신나게 웃고 있었을 것이다.


몰락은 피할 수 없다. 원래 이 세상이 몰락을 부추기는 세상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슬픔을 보이며 몰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너무도 소중하고, 너무도 신비롭고,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몰락할 것을 알지만, 몰락해가지만, 몰락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신나게 웃을 수 있다. 아무것도 나의 웃을 수 있는 자유를 빼앗을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우리,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자.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1. 2. 04:07

[시론] – 허수경의 시 포도메기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구워서 먹이면 약효가 있다."

(허수경의 시 '포도메기'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 수록)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읽고 허수경이 쓴 시 '포도메기'의 마지막 구절이다. <자산어보>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허수경의 시를 통해 본 <자산어보>는 참 따뜻한 책인 것 같다. <자산어보> 1801년 신유박해 (천주교 박해사건) 때 정약전이 전라도 흑산도로 귀양을 가 살면서 그곳의 해상 생물을 관찰하여 쓴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귀양살이가 고달팠을 텐데, 그 고달픈 귀양살이를 고달프게 보내지 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정약전 뿐 아니라 그의 동생 다산 정약용도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큰 학문적 업적을 이뤘다. 그들이 귀양살이를 하게 된 원인이 종교탄압이었으니, 어쩌면 그들의 의미 있는 삶은 그들의 신앙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해석이다.


기독교 역사에도 귀양살이 가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한 두 명이 아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타나시우스이다. 그는 아리우스와의 논쟁으로 유명한데, 그 당시에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아리우스의 주장이 아타나시우스의 주장보다 우세했다. 이에 대해 성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까지 탄식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 세상을 아리우스파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상을 뒤엎은 인물이 아타나시우스이다. 그는 아리우스의 삼위일체론에 맞서 투쟁의 삶을 살게 된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아타나시우스는 그로 인해 여섯 번이나 추방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마다 정략적 대응을 하지 않고 추방당한 곳에서 묵묵히 몸과 마음을 수련했다. 그때 탄생한 책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이다. 그는 추방을 오히려 자기 수도의 기회로 삼고 추방의 아픔으로 인해 심성이 피폐해지기는커녕, 묵묵한 영성으로 아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을 뒤엎고 현재 우리가 기독교의 정통으로 여기는 삼위일체론을 정립했다.


글에는 한 사람의 삶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그 경험이 고통스러웠다면 글에는 고통이 담기고, 고독했다면 고독이 담기고, 아름다웠다면 아름다움이 담긴다. 글은 손재주가 아니라 영혼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일상을 살면서도 귀양살이 사는 것처럼 살지만, 어떤 이는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산다. 어떠한 삶을 살든, 그 삶에서 의미를 발견한 사람의 말과 글에는 생명을 보듬어 주는 따스함이 묻어난다.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구워서 먹이면 약효가 있다." 무미건조하고 담담한 문장 같으나, 나는 여기에서 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경외를 느낀다. 평소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면, 그 아이에게 약효가 있는 바다 생물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은 그 생명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해 줄 수 있는 방도를 신비롭게도 찾아낸다. 이런 점에서 '약효'는 물리적 특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듬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믿고 싶다.


나의 말과 글, 그리고 나의 미소는 삶에 지친 이에게 어떤 '약효'가 있을까? 따뜻한 문장 한 줄 덕분에,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삶에 지친 이들의 생명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해줄 방도가 신비롭게 다가올 것 같은 희망도 솟아났다. 마침, 아침 메뉴로 '조기'를 구워 먹어서 인지, 오늘은 '침을 흘리지 않을 것' 같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8. 9. 08:41

포춘쿠키의 시론

ㅡ 심보선의 시 <브라운이 브라운에게>를 읽고

 

10년 간 매일 같이 포춘쿠키를 이용하던 덴 브라운(Then Brown)은 어느 날 포춘쿠키에서 이상한 글귀를 발견한다. 그는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나오는 차 한 잔을 마시며 포춘쿠키를 뜯어 그 안에 있는 글귀를 읽어보는 게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발견한 그날 읽은 포춘쿠키의 문구는 평상시와 달랐다. “희망은 그대 영혼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다. Hope is the most tragic part of your soul.” 그는 너무도 이상하여 이 글귀의 증거사진과 함께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포춘쿠키를 만드는 AFOOO 회사에 편지를 쓴다.

 

우리는 보통 포춘쿠키의 글귀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포춘쿠키의 문구는 낙관적이다. 덴 브라운의 말을 빌리자면, 포춘쿠키의 글귀들은 적확한 상징과 레토릭, 긍정과 자유의 에너지, 원숙한 지혜와 유머로 낙관주의적 세계관을 생생히 구현한다. 그런데, 만약 포춘쿠키를 뜯으며 낙관적인 문구를 기대했는데, 그와는 달리 덴 브라운이 경험한 것처럼 거기에서 비관적인 문구를 읽게 되었다면, 우리도 덴 브라운과 똑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AFOOO 회사의 고객 관리 담당자에게 보냈던 덴 브라운의 편지에 대한 답장은 놀랍게도 그 회사의 CEO 겸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폴 웡(Paul Wong)이 직접 보내왔다. 그는 덴 브라운에게 회사가 어떻게 설립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간략하게 들려준다. 그 역사를 아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기에 직접 옮겨본다. “지금 고인이 되신 저의 아버지 소유 웡 Shao Yu Wong2차 세계대전 당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군수공장을 운영하였습니다. 전쟁 후 아버지의 사업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으니 군수공장은 당연히 주문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지요. 아버지는 회사의 위기를 애국적인 이타심으로 극복하셨습니다. 바로 포춘쿠키를 통해서였죠. 아버지는 국민들이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게끔 돕는 영감을 작은 과자 안에 담고자 했습니다. 아버지는 군수공장은 과자공장으로 전환했습니다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작은 위로의 미풍을 후식으로 선사하고자 했습니다.”

 

포춘쿠키에는 대단한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후식으로 먹는 과자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문구를 읽으면서 우리들은 자신의 행운(fortune)을 헤아려보고자 한다. 그러나, 덴 브라운이 발견한 위의 글귀는 이러한 회사의 철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덴 브라운은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고, 회사의 CEO는 그의 직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CEO는 이렇게 말한다. “제 소견으로 귀하가 발견하신 포춘쿠키, 아니 불행의 과자(misfortune Cookie’는 누군가 악의적으로 유통 과정에 슬쩍 끼워 넣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진상 조사가 시작된다.

 

덴 브라운은 자신의 의혹에 대하여 신속하게 답변을 준 AFOOOCEO에게 감사의 편지를 쓴다. 그 편지에서 덴 브라운은 그 글귀를 작성한 사람이 얼마나 무성의한 사람인지, 포춘쿠키의 철학을 추어올리며 이렇게 표현한다. “그 글을 작성한 사람은 귀사의 비전을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귀사의 비전은 한 집안의 가풍을 넘어 세계 전체로 확장해나간 위대하고도 비밀스러운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덴 브라운은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포춘쿠키의 글귀들은 누가 쓰는 건가요?” 그렇게 해서 덴 브라운은 AFOOO의 회사에서 만들어지는 포춘쿠키의 글귀들은 1960년 이후 지금까지 모두 브라운 지(Brown Gee)라는 사람이 써왔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하여, 덴 브라운과 브라운 지는 역사적인편지 왕래를 시작하게 된다.

 

브라운 지는 덴 브라운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매우 퉁명스럽다. “폴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저에게 뭘 알고 싶으신지요?” 덴 브라운은 브라운 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궁금해 하는 것을 질문한다. “희망은 그대 영혼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다라는 글귀에 대한 귀하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이다. 그리고 덴 브라운은 포춘쿠키의 글귀들을 창작하는 브라운 지와 이렇게 편지 왕래하게 된 것에 대한 영광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맺는다.

 

브라운 지의 답장이 정말 궁금하다. 그런데, 브라운 지의 답장은 예상과는 달리 매우 공격적이다. 그 편지의 첫 문장은 이렇다. “영광? 평온한 일상? 존경을 담아? 당신이 나에게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입에 발린 말들을 지껄이는 거야?” 브라운 지는 왜 이렇게 감정을 폭발 시킨 것일까?

 

브라운 지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진실이 섬뜩하다. “반세기 동안 희망이니 용기니 느끼하기 짝이 없는 미사여구를 매일 세 개씩 매년 천 개씩 공산품처럼 찍어내는 노동의 비애를 당신이 알기나 해?” 그가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평생 알지 못할 그의 마음이 드러난다. 브라운 지는 지난 50년 동안 희망이나 용기를 생산해 내느라 힘들었던 것이다. 사실, 그가 만들어낸 포춘쿠키의 글귀들은 그가 허무에 취해 낄낄거릴 때마다 입에서 풍겨 나오는 지독한 구취 아래서 탄생한 것이었다. 이것은 엄청난 진실의 발설이다.

 

사실, “희망은 그대 영혼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다는 실수로 생산한 글귀가 아니라 브라운 지의 가장 깊은 마음이 담긴 글귀이다. 그는 행운을 혐오한다. 아니, 그는 불행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브라운 지는 왜 불행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불행은 차라리 적막에 가까워. 적막은 침묵이 아니야. 적막은 존재에 필요한 소리만 존재하는 상태야. 모든 존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어. 불행의 필연, 탄생과 죽음 사이를 직선으로 잇는 궤도에서 벗어난 모든 소리는 소음일 뿐이야. 침묵조차 소음일 뿐이야.”

 

삶에 대하여, 브라운 지는 단호하게 말한다. 삶은 불행하다. 그 불행한 삶 속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래서 그는 투쟁한다. 그의 투쟁방식은 이렇다. “5만 개의 소음 속에 5백 개의 적막을 심어 넣기, 5백 개의 불행으로 5만 개의 행운을 교란하기.” 그런데, 반세기 동안의 그의 이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더 슬픈 일은 그의 투쟁을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브라운 지는 덴 브라운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록 단 하나의 글귀에 대해서였지만 지난 50년 동안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독자요, 평자였어.”

 

이 일로, 희망과 행복만을 말해야 했던 브라운 지가 불행한 메시지를 말한 사실이 회사에 알려지자, 브라운 지는 더 이상 포춘쿠키를 만드는 회사에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모르게 회사를 떠났다. 그가 떠난 그의 책상 위에는 이러한 메모가 놓여 있었다. “난 매일매일 행복을 떠벌리느라 불행해졌소. 아니 애초에 불행했기에 매일매일 행복을 떠벌린 것인지도.”

 

결국 죽음으로 치닫는 불행한 삶 속에서 행복을 떠벌리는 게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이는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도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속시원하게 외치지 못하고, 어디 인적 드문 곳에 가서 애꿎은 나무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진실을 대면하지 못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세상을 속이며 사는가. 불행을 불행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애써 에둘러 행복을 말하며 희망을 꿈꾼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진실을 대면하지 못하는 게 습관이 되다 보면, 우리의 인생은 결국 불행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진실을 말하고 싶다. <브라운이 브라운에게>의 시에 소개된 포춘쿠키 만드는 회사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포춘쿠키의 역사를 알게 되어 기뻤을 그 마음에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하다. 때로 진실은 이렇게 가슴 아프고 허무한 법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