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19. 12. 13. 09:09

[시론] 허수경의 시 아사(餓死)’

 

둘은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간다

빛의 섬이 되어간다

파리 떼가 몰려온다

파리의 날개들이 빛의 섬 위에서

은철빛 폭풍으로 좌상을 파먹는다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가 널리 황무지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ㅡ 허수경의 시 아사부부,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성경은 천국을 보여주기 보다 현실을 보여준다. 성경은 현실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 현실을 보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면서 천국을 보려 한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가뭄에 대한 것이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것도 가뭄 때문이고,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한 판 대결을 벌이게 된 것도 가뭄 때문이고, 예레미야는 가뭄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가뭄에서 구원해 달라고 탄원한다. 가뭄은 인간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온다. 굶어 죽는 일, 아사(餓死)이다.


           허수경의 시 아사는 굶어 죽는 것에 대한 비참함을 전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직 비참함 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가뭄 때문에 모든 생명이 죽었고, 이제 남은 것은 생후 4개월 된 소()밖에 없다. 굶어 죽는 게 일상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소는 겨우살아남은 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소를 데리고 밭을 갈아야 하니, 굶주린 아이나, 그 아이의 손에 이끌려 밭으로 나온 소나 기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이와 소, 두 존재는 진력을 다해 밭을 간다. 아사 직전의 두 생명은 사투를 벌이지만 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 일은 지평선처럼 끝없고 그 뒤에 있는 세계처럼 거짓말 같다. “아이는 겨우 소를 몰았다. 소는 자꾸만 주저 앉았다.” 아이와 소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이미 그들은 전쟁터에 놓여 있다. 소를 일으켜 세워야만 살 수 있는 아이와 일으켜 세워지면 죽고 마는 소의 운명 같은 대결.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주저 앉은 소와 그런 소를 부둥켜안고 일으켜 세우려는 아이는 어느새 한 몸이 되어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갔다. 물기가 없어진 지 오래된 하늘은 바싹 마른 햇볕을 떨어뜨렸고 그 빛에 말라버린 뒤엉킨 생명은 섬처럼 굳어갔다.


           그렇게 생명이 소멸되는 듯했으나, 으로 몰려든 것은 파리떼였다. 그리고 그 파리떼들은 저항력을 상실한 생명을 파먹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빌미로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폭풍같이 달려든 파리떼가 남긴 것은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였다. 그 광경은 잔인하기 그지없으나, 그 잔인함 속에는 죽음과 함께 생명이 넘실댄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우리는 생명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대한 존재는 굶어 죽었으나, 하찮은 존재는 살아남았다. 무엇이 살아남는 것일까. 결국, 가장 약한 게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것은 모두 약한 것이다. 그러니 살아남으려는 자, 하찮게 살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