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24. 07:01

가능주의자

(출애굽기 36:1-7)

 

1. 1999년도에 개봉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강렬하게 시작한다. 직업도 가족도 모두 잃은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가 20년 전 첫사랑 순임이랑 소풍 갔던 곳의 철로 길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철규로 시작한다. 우리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에겐 팬데믹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는 모두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신앙생활의 풍경이 너무도 바뀌어 버려서 우리는 아직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2. 사실, 풍경이 바뀐 것은 팬데믹의 영향도 있지만, 과학기술 발달의 영향이 더 크다. (물론 이외에도 정치, 경제적, 문화적 요인도 있지만) 만약 온라인 플랫폼이 발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과 사뭇 다른 신앙생활의 풍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신앙생활(교회의)의 옛 풍경을 되찾자고 온라인 플랫폼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안에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한결같이 스마트 폰(동네 사람 스티브 잡스, 공공의 적)을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스마트폰을 없앴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변화(비가역적 변화/irreversible change)이다. 적응하면서 건전한 문화를 창조해 나갈 수밖에 없다.)

 

3. 팬데믹과 관련된 것 말고, 우리들 인생 가운데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지 않은가? 대개 우리는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재미 있는 추억이 있거나, 아니면 사랑받았던 시절 말이다. 인생이 재미없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으면, 우울해지고 별로 살고 싶은 생각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4. 나는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학창시절을 참 행복하게 보냈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가고 싶다. 왜 나는 학창시절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곰곰이 돌아보니까, 그 시절 나는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과 교회 학생부에서 정말 재미난 추억을 많이 만들었고, 무엇보다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 내가 요즘은 그냥 전형적인 아저씨가 되어서 사람들이 잘 믿지를 않는데, 학창시절에 나는 늘 전교적으로 유명인사였다(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모두 그랬다). 돌아보면, 내 인생 가운데 지금이 가장 유명하지 않은 시절을 보내는 것 같다.

 

5.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이 있다. 발생했던(또는 존재했던) 어떤 일/사건/경험 등을 지금 다시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현재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특정한 시기,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이유는 그 행복을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 속에 재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우리가 결혼을 하는 이유가 뭔가? (사랑해서!) 요즘엔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도 많이 퇴색이 됐다. 최근 뉴스를 보니까, 소개팅 앱이 있는데, ‘고학력자가 아니고, 연봉 3천 이하 남성’은 가입 자체가 안 되는 앱을 어느 결혼정보회사에서 개발해서 뭇매를 맞았다. 여성 가입 제한은 없는데, 남성은 이렇게 가입 제한을 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남자들이 이래저래 참 살기 힘든 사회인 것 같다.

 

6. 결혼은 일차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게 자유연애의 정신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런 가장 기초적인 사랑의 자유조차도 빼앗는 사회가 된 것 같다. (마르크스가 이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자본론을 쓴 것.)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게 아니라, 삶의 안위/신분상승, 이러한 사랑 이외의 가치가 사랑의 가치를 밀어내는 것 같다. 연애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고, 결혼은 돈 많은 사람하고 하고, 뭐 이런 가치가 만연한 것 같다. 사랑의 가치를 좀 잘 보존하고 지키면 좋겠는데, 세상이 잘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가 사랑해서 결혼한다면, 결혼하는 이유는 연애할 때의 그 사랑의 상태가 너무 좋아서 그것을 영원히 재현(representation)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재현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영원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랑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위대한 것이다.

 

7.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구약성경이 중요한가, 신약성경이 중요한가? (엄마가 중요한가 아빠가 중요한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가, 아빠를 더 사랑하는가?) 기독교인들은 왠지 모르게, 신약성경을 구약성경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초대교회사 수업에서 공부했듯이, 그러한 생각은 영지주의적인 생각이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교회에 영지주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증거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그래서 기독교 성경은 신구약(구약 39권/신약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8. 출애굽기는 구약의 복음서다. 신약의 복음서는 출애굽기의 재현이다. 좀 더 큰 틀에서 말한다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재현이다. 구약성경을 모르면, 신약성경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산으로 간다. 가장 심한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한 구약성경의 재현이다.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려면, 로마제국에 대한 이해보다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 광범위하게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공부 할 때, 구약성경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라. 그래야 신약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이 구약성경 공부 많이 한다고 절대로 유대인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9. 당장,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시내산 언약에서 핵심적인 용어는 8절에 나오는 ‘언약의 피(the blood of the covenant)’라고 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마지막 만찬에서 재현된다. 마지막 만찬(성만찬)에서 핵심적인 용어가 무엇인가? 언약의 피’다. 이렇게 신약은 구약을 재현한다. 구약을 모르면 신약에 왜 그러한 용어와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10. 출애굽기는 ‘복음’, ‘십자가 사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구약성경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하면, 홍해 갈라지는 이야기가 너무 웅장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만 기억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크게 세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1)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열 가지 재앙과 홍해 이야기) 2)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이야기(십계명 이야기), 3) 성막 이야기. 그런데 우리는 출애굽기를 생각할 때, 성막 이야기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안타까운 현상이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성막 이야기가 25장부터 40장까지, 장장 15장에 걸쳐서 나온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11. 출애굽기와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출애굽기 24장 1-11절이다(언약의 피). 이곳은 시내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이 체결되는 장면과 언약 체결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연회(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이 재현되는 신약성경은 복음서의 최후의 만찬 장면이다(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도 마찬가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피의 언약을 맺고 그들과 연회(잔치)를 벌인다. 우리는 이것을 ‘성만찬’을 통해 재현한다. 성만찬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예배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12. 출애굽기에서 성막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성막 세미나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성막에 대해서 자세하게 공부할 필요는 없다. 출애굽기 25장 이후를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도 25장 이후에 나오는 성막에 대한 율례가 복잡하고 지루하기 때문에 읽어 내려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슨 암호 같기도 하고 방정식 같기도 하다. 그래서 골치 아프다. 그렇다 보니, 성막 이야기가 마음에 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성막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성막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13. 성막은 무엇일까? 성막은 시내산 언약의 재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0-11). 이스라엘에게 이 경험은 절대 경험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너무 절대적이어서 그것을 영원히 현재화시키고 싶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 사랑을 재현하듯이(로미오와 줄리엣 보면, 그 사랑을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재현할 수 없으니까 좌절하고 절망해서 독약 마시고 막 죽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을 영원히 현재화시키기고 싶었다. 성막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재현이다.

 

14. 출애굽기에서 가장 따뜻한 구절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다.

 

“모세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주님께서 그 마음에 지혜를 더하여 주신 기술 있는 모든 사람, 곧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기꺼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의 제사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데 쓰라고 가져온 모든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았다. 그런 다음에도 사람들은 아침마다 계속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 왔다. 그래서 성소에서 일을 하는 기술 있는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세에게로 와서, 이르기를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데에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것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진중에 명령을 내려서 '남자든 여자든, 성소에서 쓸 물품을 더는 헌납하지 말라'고 알리니, 백성들이 더 이상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물품은 그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을 만큼 있었다. (새번역, 출 36:2-7)

 

15. 브살렐과 오홀리압. 성경을 읽어본 사람, 성경을 좀 아는 사람, 성경공부를 좀 해본 사람과 성경을 안 읽어본 사람,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 성경공부를 안 해본 사람을 구분 짓게 해주는 이름들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아는 사람은 ‘그래도 내가 성경공부를 좀 했구나’라고 생각하면 되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 분발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성경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인격이다. 사귐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공부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사귐을 가져야 아는 것이다. 성경을 아는 만큼 신앙이 깊어진다. 이것은 불편의 진리다. 성경을 모르면서 신앙이 깊어질 수 없다. 그것은 배우 정우성을 만난 적도 없고 사귐을 가진 적도 없으면서 정우성을 잘 안다고, 친하다고, 거짓말하는 것과 같다.

 

16. 성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재현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것이 재현되려면, 성막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율례대로 성막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재현될 수 없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성막을 만든 사람들이다. 오늘 말씀 제목과 연관해서 다른 말로 하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가능주의자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다. 성막을 만든 이유는 시내산 경험의 일상화를 위해서이다. 천상에서의 축제가 일상에서 울려 퍼지게 한 자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가능주의자이다.

 

17. 성막과 성전의 기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기독교의 예배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일상화이다. 2천년 전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있었던 유일회적인 구원 사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복음의 선포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 예배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예배의 관점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말하면, 그들은 예배자들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많은 노동을 해야만 했다.

 

18. 우리가 잘 모르는 예배의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배는 ‘예전(Liturgy)’라고 부른다. Liturgy는 ‘노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막을 만든 사람들은 요즘말로 하면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을 통해서 성막을 만든 것이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 예배를 만든다는 것은 성막을 만드는 것처럼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다. 노동만큼 창조적인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창조해 낸다. 

 

(노동 안하고 돈 버는 것을 불로소득이라 한다. 노동 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불로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이라는 뜻은 노동(노력)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노동과 노력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보잘것없는 노동과 노력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주신다는 의미에서 은혜인 것이다.)

 

19. 세상에 그냥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무엇이든지 노동이 필요하다. 피아노 잘 치는 거, 얼마나 힘든가. 엄청난 시간과 노력, 즉 노동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한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서 엄청 노력을 한다. 아이들도 피아노 치느라 엄청 고생한다. 물론 이상한 현상도 있다. 피아노 배우기 싫다는 아이한테 그렇게 피아노 배우라고 푸쉬해서 아이가 피아노 배우고 난 후, 아이가 대학 들어갈 때 피아노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은 당장 때려 치우라고 한다. 애들이 헷갈려한다. 하기 싫은 거 배우라고 할 때는 언제고, 본격적으로 배워보겠다는데 이제와서 왜 때려치우라고 하는지.)

 

20. 우리가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통해서 단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다. 예배는 노동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만들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가능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성막을 통해서 시내산에서 경험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일상화 할 수 있었다. 특별한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 경험의 일상화는 더 중요하다. 어떤 계기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한 경험이 중요하지만, 그 경험이 그때뿐이면 무엇 하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내가 언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뿐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 아득하죠. 시간이 지나면 감정과 감동이 없다.) 그러나 경험의 일상화는 절대 경험에서 온 풍성한 사랑과 은혜 안에 계속해서 거하게 한다.

 

21. 예배는 신앙의 샘물이다. 에스겔서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완전히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환상을 본다. 예배가 무너져 있으니, 이스라엘이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는지 모른다. (인생이 괴롭거든 자신의 예배를 돌아보라. 무너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배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결국 이겨낸다. 지금 아무리 행복해도 예배가 무너진 사람은 미래가 가장 불안한 사람인 거다.) 그래서 에스겔은 무너진 이스라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기도할 때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은 너무도 자세해서 마치 설계도면을 보는 것 같다. 에스겔의 환상은 47장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에스겔은 성전에서 흐르는 물을 본다.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점점 많아지더니 강을 이루고 헤엄쳐서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크고 깊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지만, 에스겔의 환상, 예배가 회복되는 환상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22.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노동을 통해서 성막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세워지면 좋겠다. 예배는 신앙의 샘물이다. 생수가 예배의 자리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은혜의 강에 몸을 담그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한다. 이것은 잔소리가 아니라 진리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내산의 경험이요, 십자가의 경험이다. 예배는 그 경험의 일상화이다. 예배를 만드는 자, 예배에 나오는 자는 모두 노동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만들고 나와야 한다. 우리의 노동이 하나님 만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가능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

 

23. 팬데믹으로 인하여 신앙의 일상이 형편없이 무너진 이 때에 우리 모두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힘을 다해 예배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이 어려운 시대를 넉넉히 이겨내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당신은 가능주의자입니다!” “당신은 예배 노동자입니다.” “우리 함께 힘을 다해 예배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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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