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노시스적 사유]

 

교부들의 신학을 보면, 삼위일체 교리는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기 보다는 마르키온의 그노시스적 사유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신정론의 문제를 아주 '논리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아직까지도 신정론 문제는 미궁이다. 이 문제를 납득할 만하게 대답한 신학자는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납득할 만하게 신정론 문제에 대답한 신학자는 마르키온 밖에 없다. 그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구분하는 것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지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정론의 문제를 극복하려 했고,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론과 기독론을 발전시키고 성경의 정경화를 꾀했던 마르키온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지만, 그 당시 마르키온은 '악의 문제'에 질문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신학을 제공했다. 그래서 그는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의 교부들은 마르키온의 신학을 정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다른 존재로 표현하는 것에 반대했다. 교부들에게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은 신약의 구원자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신학사상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이 말하고 싶은 일차적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의 일치를 말함으로 마르키온 신학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삼위일체 신학이 신정론의 문제(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를 납득할 만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지는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우리는 '신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신정론의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노시스(영지주의) 사유의 특징은 이 세상은 낮은 단계의 하나님(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 악이 존재하는 세상은 파괴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결국은 '파국'이다. 그 파국에서 구원하는 것이 바로 구원자 하나님에 의해 기획된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는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이 악이 가득한 세상을 끝장낸다.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너무도 간단하게 '이단'이라고 치부해버리지만, 그러한 그노시스적 사유는 삼위일체 신학의 출현으로 인해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역사에서 절대악을 경험할 때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악이 판치는 세상은 메시아에 의해서 끝장나야 하고, 우리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노시스적 사유가 가장 강하게 등장한 시대는 근대(Modernity)의 끝자락에 발생한 세계 1차대전 이후였다. (사실 근대의 끝자락에 1차 대전이 발발한 게 아니라, 1차 대전이 발발함으로 인해서 근대는 끝난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끝없이 긍정하던 근대, 그래서 그 역사의 끝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거라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던 근대인들은 세계 1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그 모든 소망을 접어야만 했다. 바로 그때 다시 고개를 든 것이 그노시스적 사유였다.

 

그 당시 근대의 사상가들(철학자/신학자)은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신학 개념'을 만든 칼 슈미트를 비롯하여, 하르낙과 블로흐, 마틴 부버와 심지어 칼 바르트도 그노시스적 사유를 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과, 시몬 베이유도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가장 강렬한 방법으로 한 이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사유는 그노시스적 사유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사유였다.

 

칼 슈미트의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 안에 숨겨진 '내전'에 대하여 주목하는데,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 안에는 창조주 아버지(성부)와 구원자 아들(성자) 간의 '내전상태(statiastion)'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마르키온이 일찍이 신정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설파했던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 간의 싸움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위와 같은 사유를 하는 까닭은 '정치신학'의 가능성을 논하기 위해서이다. 악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 악과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한다.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정부'라고 말하는 것이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이다.

 

이러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논의를 계속 이어나가려면, 그의 '카테콘(Katechon)' 이론을 비판한 야콥 타우베스와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그것은 너무 지난한 과정임으로 생략한다. 대신,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발생한 근대의 '메시아 신학'을 다시 한 번 들여야 볼 필요가 있다.

 

세계 1, 2차 대전 이후 우리는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진보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그런 희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 나라는 역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유 자체가 그노시스적 사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파국'을 경험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러한 그노시스적 사유 안에서 그들의 사상을 세워나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여담이자만, 지금 사회적으로 한창 논의되고 있는 '젠더문제'도 그 밑바탕에는 그노시스적 사유가 깔려 있다. 무엇이 우리의 ''을 정하는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정한다고 말해왔다. 남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남자이고, 여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여자였다. 그러나 그노시스적 사유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은 '누스(nous/정신)'이다. 나의 누스가 나를 남자로 규정하면 내가 여자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나는 남자인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그노시스적 사유는 우리의 삶 속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보듬으며 우리의 미래를 열어 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유 방식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더 이상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면, 이 세상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기다려야 할 텐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그러한 구원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어둡고, 구원은 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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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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