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0. 16:46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 2:1-11)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큰 봉변을 당했던 것 같다. 편지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봉변을 당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냈던 편지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지, 어떤 일인지 자세히 서술하지 않아도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모두 그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방문 때 당했던 봉변으로 인하여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그 사건은 다른 사건을 불러오는데, 바울이 원래 고린도교회를 또다시 방문하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려고 했던 약속을 어긴 바울의 행동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비난 거리를 제공한다. 바울이 방문하기로 했던 약속을 어기자 고린도교회에 있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을 ‘말 바꾸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바울을 비난한다. 이 소식도 바울의 귀에 들어갔고, 바울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고린도교회에 항변하지 않을 수 없어, 편지를 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고린도후서이다.

 

고운정도 있지만 미운정이라는 것도 있다. 고운정보다 미운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다. (지도 참조) 바울은 소아시아(Asia minor)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아가야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생겨났다. 소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에베소교회이고, 마케도니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빌립보교회이고, 아가야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고린도교회이다. 바울에게는 모두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바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교회는 고린도교회였다. 그만큼 고린도교회와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고린도교회는 고운정, 미운정 모두 깊이깊이 든 교회였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착과 사랑은 1장 14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전 1:14). 이것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너희가 우리의 자랑인 것처럼 우리가 너희의 자랑일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에게 자랑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신실하게 전했는데, 그 복음을 통해 고린도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교회는 순전한 복음에 의해서 탄생한 교회였다. 금으로 따지자면, 순도 99.99%의 순도를 자랑하는 금인 것이다. 그러니 자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를 방문했다가 그 교회의 어느 한 교우로 인해서 큰 상처를 받은 바울은 상심이 컸다. 그 일로 인하여 사도 바울만 상심이 컸던 게 아니라 고린도교회 전체가 술렁였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방문하겠노라’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될지 바울은 몰랐다. 바울의 사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탄하거나 형통치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목회’가 바울에게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적대자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아킬레스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하여 늘 시비를 걸었다.

 

바울 서신의 특징 중 하나는 그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자화자찬)’ 레토릭(수사법)을 자주 구사한다는 것이다. 대적자들에 맞서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러한 정황이 반영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 방문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대적자들을 향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 화법을 사용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육체의 지혜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고 강변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전 1:12절).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라고 자기칭찬(self-commendation)을 하고 있다. 거룩함과 진실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하플로스테’와 ‘에일리크리네이아’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하플로스테(거룩함)’은 ‘생각이나 마음을 두 번 접어 다르게 표현하지 않고 한 겹으로 진솔하고 솔직하게 드러냄’을 뜻한다. 에일리크리네이아(진실함)’은 ‘태양 빛으로 비추어 보아도 가려지거나 숨겨진 부분이 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진실함’을 뜻한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기칭찬’이다.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이것을 적용하면, 바울은 지금 자신이 ‘방문하겠다고 했다가 방문하지 않은 것’은 변덕쟁이처럼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그의 언어로 표현하면, 한 입으로 Yes와 No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의 지혜로 그런 것이 아니라(그곳에 가면 또다른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하는 염려 같은 것),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바울의 믿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wisdom)도 소중하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지혜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인간의 지혜는 참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지혜를 먼저 내세운다면, 거기에서는 선한 열매가 맺어지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일의 출발점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기 위하여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아브라함/이삭/야곱)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행동이 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새롭게 무엇인가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제단을 먼저 쌓고 시작했다. 이것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삶의 여정을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신앙 행위였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은 나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 지금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 앞에서 제단을 쌓는다는 것, 즉 예배 드린다는 것은 이제 내가 경험하게 될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게 될 거룩한 시간, 공간으로 내어드린다는 뜻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하고, 수많은 일을 겪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일들 가운데서 어떠한 열매(결과)가 맺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기면서 무엇이든지 시작한다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거룩한 시간과 공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은 주말(한 주간의 끝)이 아니라 한 주간의 시작이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반복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기억한다. 우리가 일주일 단위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바로 이렇게, 무엇을 시작하기 전, 구체적으로는 일주일의 삶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그 행위 자체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다.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 외에,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황하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주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삶을 보듬어 주기 위해서이다. 어려운 일, 답답한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괴로워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그 문제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라.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으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3-16).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교회의 지체들을 청하여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것’은 나쁜 일 한 것을 이실직고 고하라는 뜻이 아니라(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연약하다. 즉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의도하지 않고 뜻하지 않았던,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함께 기도할 줄 아는 신앙이 우리가 인간의 지혜로 모든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방문계획을 취소한 이유는 1절에 진술되어 있다. 이제 나는 또다시 근심 가운데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우리말성경). 대신 바울은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4절).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약 본인이 약속한 대로 방문했더라면 근심과 아픔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은 바울의 아픔이요, 그들의 기쁨은 곧 바울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묶여 있다는 뜻이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이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했다는 뜻이다. 고운정, 미운정이 듬뿍 들어 깊이 사랑했던 고린도교회를 생각하며, 바울은 눈물로 편지를 썼다. 가만히 감정 이입을 해보자. 우리는 지금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는 중이다. 바울의 그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가. 아마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했던 문제가 우리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직접 경험했던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두 손에 받아들고 읽어내려가면서 울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문제의 발단이 된 ‘어떤 사람’을 치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문제를 다룬다. 그들은 사랑과 온유로, 즉 눈물로 이 문제를 다룬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에 아픔을 가져온 사람에 대한 치리를 언급하는 6절에서 8절을 개역개정으로 읽어보자.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6-8절).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바르게 번역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더 잘 번역한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다. 뜻이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여러분은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가 더 큰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기를 권면합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마음 아프게 ‘그 사람’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은 것 같다. 그 벌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형벌 같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교회 공동체로부터 특별한 제재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가 받은 벌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용서와 위로의 단계로 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과 온유로 내리는 벌은 그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 목적이 있지 그 사람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를 용서하는 이유,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그를 이제 용서하고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이유, 모두가 다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를 읽다보면 그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던 것처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처럼 사랑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아픔은 자신의 아픔이었고, 교회의 기쁨은 자신의 기쁨이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교회에서 발생한 마음 아픈 일도 모두 사랑과 온유로 치리하려고 했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 들고 읽는 우리도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면 좋겠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사랑했던 이유는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신앙고백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교회를 단순히 ‘다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신앙고백에 의하면,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물론 사도신경에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를 구분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의 전치사를 쓰고(credo in Spiritum Sanctrum), 교회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이라는 전치사를 쓰지 않는다(credo ecclesiam).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185쪽). 교회 자체가 곧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한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눈물로 쓴 편지를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그리고 교회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신앙의 충분한 표준이 되는 가르침들을 만나게 된다. ‘이래서 고린도후서가 성경이 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본문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우게 된다. 첫째,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있는가. 둘째,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라고 고백할 만큼 사랑하고 있는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는 우리들, 주일예배는 일주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어려운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힘들어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자.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니 우리 서로 더 사랑하자.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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