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10. 19:44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

(출애굽기 20:12)

 

1. 아전인수라는 말이 있다. 자기 논에만 물을 댄다는 뜻이다. 무엇이든이 자기한테이롭게 행동하거나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여서 요즘엔 성경 원어와 외국어 그리고 모국어(한국어)를 비교해 가면서 성경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해 가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이다. 우리는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읽다보니, 아무래도 한국적인 사고가 가미된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다. 히브리어의 ‘카베드’를 번역한 ‘공경’이라는 말은 유교적인 사고가 잔뜩 베어 있는 번역이다. 한자어 공경이라는 단어는 조상에게 제사드리는 형상을 가진 단어이다. 공경이라는 말에는 유교의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막상 공경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베드’는 그러한 유교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2. 제5계명에 해당하는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유일하게 동기가 부여된 계명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부분은 명령이지만,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내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부분은 동기부여 구절(motivational clause)이다. 다른 계명들은 명령으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제5계명은 명령과 동기부여 구절이 함께 들어가 있다. 그런데, 동기부여 구절에서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제5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부른다.

 

3. 한국어/또는 한국 사람의 특성상 동기부여 구절에서 눈에 들어오는 말은 ‘네 생명이 길리라’일 것이다. ‘네 생명이 길리라’, 다른 말로 장수다. 예로부터 장수는 ‘복’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제5계명을 말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의 복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4. 동기부여 구절에서 핵심 단어는 ‘땅(land)’이다. 제5계명에서 약속된 것은 ‘장수’가 아니라 ‘땅’이다. 그리고 이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땅이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할 때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장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을 빼앗기지 않고 계속해서 그 땅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요즘처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부동산이 아니다. 그들에게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징표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땅 매매를 할 수 없었다.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법도 그것을 반영한다. 살면서 어려움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땅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다고 할지라도, 희년이 되면 원래 주인에게로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 땅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에서 그들이 오래오래 살게 된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에게 땅은 기억이다. 그 기억은 무엇에 대한 기억인지, 이미 제4계명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를 말하며 서술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에게는 유일회적으로 발생한 출애굽 사건이 중요했다. 이것은 절대적인 구원 경험 사건이었다. 출애굽 하여 그들이 다다른 곳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렇기에 땅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성례전이 되는 것이다. 그 땅에서 사는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시내산 언약)을 기억해야 한 한다. 이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져야만 하는 가장 중차대한 기억인 것이다.

 

6. 그러므로 십계명에서 “부모 공경”은 효의 문제라든지 또는 휴머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부모 세대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 시내산 언약(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은 자녀 세대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 요즘으로 따지면, 그 기억은 유전자 같은 것이다. 이 유전자를 전달해 주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는가?

 

7. ‘공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베드’이다. 카베드가 가진 뜻은 ‘무겁다’이다. 이를 적용해서 “부모를 공경하라”를 풀어서 설명하면 ‘부모를 무겁게 대하라’는 뜻이 된다.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의 말과 행동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자녀 세대를 치리하는 법이 나온다. 얼마나 엄격한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 부분을 직접 인용해 본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 21:18-23).

 

8. 무시무시하다.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것을 ‘완악, 패역’이라 말하고, 그러한 완악하고 패역한 자녀 세대는 징계를 해야 하고, 징계를 했는데도 여전히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완악하고 패역한 자녀 세대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 그렇게 해도 그것을 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죄악을 제거한 선한 일이 된다. 요즘 시대의 사회적, 또는 법적 잣대로 재어보면 이것은 무지막지한 일이고, 자녀 세대가 처벌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녀 세대에게 해를 가한 부모 세대가 처벌을 받게 될 뿐이다.

 

9.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자녀 세대를 왜 이렇게까지 무시무시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자명하다.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물려주는 기억(언약/구원사건에 대한 기억)을 절대적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땅은 그 언약의 징표이다. 움직이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징표이다. 그 땅에서 길이 산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잘 살고 있다는 뜻이고, 그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10. 그러므로,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해야 한다. 가볍게 대하면, 부모 세대가 전해주는 언약이 매우 가벼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언약은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 1세대는 이미 다 죽었다. 출애굽 경험, 시내산 경험, 그리고 광야를 경험한 세대는 이제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아 든 것은 그 언약 이야기를 전수해 주는 부모 세대의 ‘말’ 뿐이다.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는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의 말(언약)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여(마치 그것이 살아 있는 존재인 것처럼) 소중하게 대하고 간직하고 또한 자기의 자녀 세대에게 동일하게 전달해 주겠지만, 부모 세대의 말을 귓등으로 알아들고 무시하고 경홀히 여기는 자녀 세대는 ‘그까짓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 언약을 하찮게 여기고 그것을 자신의 자녀 세대에게 전달하지 않을 것이다.

 

11. 지금까지 성경의 맥락에서 살펴본 제5계명은 매우 비장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가? 이 계명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고, 그래서 부모 공경을 잘 하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라고, 결국 사람들의 욕심을 자극하고 충족시키는 데 제5계명을 이용하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냥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굳이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를 묻는 이유가 무엇인가?

 

12.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아니다. 가정 중심 사회가 아니다. 탈가부장적 사회이고, 개인 중심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 공경의 의미를 가부장적으로, 가정 중심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부모 공경의 제5계명을 유교의 가부장적 사상인 군사부일체, 삼종지도, 이런 가르침을 서포트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꼴이 되고 만다. 아마도,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은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성경에 대한 배경 지식이 일천할 때가, 제5계명을 완전히 유교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13. 그러면, 부모 공경에 대한 현대적 의미란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 어차피 더 이상 가부장적인 사회도 아니고, 유교사회도 아니고, 개인 중심 사회인데,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부모 공경이라는 제5계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왜 그런가?

 

14. 우리가 사는 시대를 무슨 시대라고 명명하면 좋을까? 17,8세기 유럽사회는 극장사회라고 불렀다. 그들의 옷차림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데, 그들의 일상복은 무대복처럼 화려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관계성도 그랬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인정받는 시대였다. 지금 북한 사회는 17,8세기 유럽의 극장 사회와 비슷한 사회이다. 사회 전체가 마치 연극 무대 같다. TV에서 간혹 공개되는 그들의 열병식이나 사회적 행사를 보면,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고,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래야 연극이 성공적으로 상연되기 때문이다.

 

15. 그러면, 우리 사회, 특별히, 한국사회는 무슨 사회라고 불러야 할까? 얼마 전까지 군사독재가 벌어지고 있었을 때 한국 사회는 군영 사회였다. 사회 전체가 마치 군대 같았다. 남북이 갈라져 있고, 군사적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안보가 가장 중요했기에(지금도 그렇다) 군인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군인이 정권을 잡은 사회이다 보니, 사회 자체가 군영 사회였다. 군대 문화가 모든 일상을 지배했다. 직장도 학교도, 가정도. 그러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가 민주화되고, 이제는 자본주의가 깊이 있게 사회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면서, 한국 사회는 ‘예능 사회’가 되어버렸다.

 

16. 다른 말로, 예능 사회는 모든 것이 예능화된 사회, 모든 것이 가벼워진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존재의 무거움을 찾아보기 힘들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존재가 가벼워야 한다. 이것을 경제적인 용어로는 ‘노동의 유연성’이라고 하는데, 노동의 유연성이란 인간이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어떠한 노동을 위해서라도 갈아 끼기 쉬운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회사는 노동자를 마음껏 해고할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도 회사를 마음대로 이직할 수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 사회에 없던 풍경이다. 최고의 이윤을 내기 위해서 회사는 노동자를 부리기 쉬운 상태(유연한 상태)로 만들려고 한다. 최고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최상의 가벼운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자본이 나를 선택하기 쉽게 존재를 만들어 놓는 것 / 돈 많이 주고 나를 데려다 쓰세요. )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모두 돈을 위해서 가벼운 존재가 된다. 밀란 쿤데라가 말했던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나는 이것을 예능 사회라 명명한다.

 

17. 이렇게 존재가 가벼운 사회, 예능 사회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말할 수 없이 가벼워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적 문제들은 모두 서로가 서로를 무겁게 대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 대해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부모를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패륜이 발생하고, 이웃을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사람을 해치고 악을 저지른다. 자식을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윤리를 가르치지 않고 남을 이기는 법만 가르치고 자식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하여 인간관계는 깨질듯이 깨지고, 두터운 인생, 두터운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니 우리의 인생은 늘 외롭다. 관계가 깨지는 것만큼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형벌이 있을까? 현대인은 그래서 두 가지의 병, 편집증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고 있다. 편집증은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해서 발생하는 병이고, 우울증은 다른 이들과 유의미한, 두터운 관계를 맺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다.

 

18. 우리가 사는 시대는 존재의 가벼움, 관계의 가벼움을 벗어나 존재의 무거움, 관계의 두터움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조금 무겁게 세워나갈 필요가 있다. 자기를 쉽게 팔아버리는 유연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켜 나가는 존재, 인간관계에서 이익만 취하는 가벼운 관계 아니라 인관관계에서 유의미한 의미를 창조해내는 관계, 즉 두터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모두 편집증과 우울증으로 인하여 집단 자살의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충분히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 (미국 정보국에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푸틴은 극심한 편집증과 우울증에 오랫동안 시달려 았다고 한다. 편집증과 우울증이 한계를 넘으면 푸틴이 무슨 짓을 할 것 같은가. 핵 버튼을 누를 것이다. 이것은 집단 자살 행위다.)

 

19. 나의 존재와 상대방의 존재를 무겁게 여기고, 인간관계를 두텁게 만드는 일은 부모의 존재를 무겁게(카베드)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연습 상대가 필요하고, 연습을 할 때, 진지한 상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부모님만큼 관계를 두텁게 만드는데 있어 좋은 연습상대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조금 실패하더라도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주고 용서해 주실 것이고, 우리가 관계를 두텁게 만드는 데 성공하면 부모님은 정말로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기쁘고 행복하신 것만큼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게 어디에 있겠는가.

 

20. 더군다나, 신앙과 복음의 측면에서도 존재의 무거움, 관계의 두터움은 너무도 중요하다. 요즘 시대는 복음이 잘 전달되지 못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요즘 누가 복음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가. 복음도 유일회적인 구원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말씀’으로 전하는 것인데, 두터운 신뢰, 두터운 관계, 무거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즉,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서 무겁게 대하는 마음이 없다면, 복음은 잘 전해질 수 없다. 예전에는 부모님 따라서, 부모님 말씀 듣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나오는 자녀 세대들이 많았으나, 요즘 자녀 세대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21.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는 연습을 시작하면 좋겠다. 또한 부모 세대도 자녀 세대에게 좋은 것(가치, 복음 등)을 물려주기 위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모 세대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실천하며, 자녀 세대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words)’을 통해서 말씀하신다(saying).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두터운 관계의 시작은 부모님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나가는 데서 온다. 주님께서 도우실 것이다. 두터운 관계를 잘 형성해야 편집증과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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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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