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10. 16:59

성령과 생명력

(사도행전 19:1-7)

우리는 One’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하나님이라는 뜻은 유일신이라는 뜻도 있고, ‘보편적인이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일치된 신앙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고백하되, 그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매우 독특한 기독교의 하나님 고백이다. 아버지도 하나요, 아들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다. 특별히, 한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너와 내가 한 하나님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공동체성을 말하기도 한다.

 

김 집사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박 집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일까? 아니다. 같은 하나님이다. 물론 각자 하나님 경험이 다르고, 하나님을 사유하는 방식이 다를지 몰라도 김 집사와 박 집사는 같은 하나님을 고백한다. 미국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다르고, 한국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다를까? 아니다. 같은 하나님이다. 물론 문화적 배경과 처한 환경에 따라 하나님 경험이 다르고 하나님을 사유하는 방식이 다를지 몰라도 미국교회와 한국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One’ 하나님이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이방지역)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땅 전역으로, 유대땅을 넘어 사마리아로,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이방지역)으로 확장되는 현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9장의 이야기는 흔히 말하는 바울의 제 3차 전도여행을 그리고 있다. 누가는 드라마 기법을 사용하여 그 전도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바울 뿐 아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아볼로, 디모데와 에라스도, 그리고 가이오 및 아리스다고 등의 활동을 다양하게 그리고 있다. 특별히, 아볼로와 다소 경쟁적인 전도여행을 전달해 주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본문의 1절이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바울이 문서를 남겨서 후대에 가장 잘 알려진 전도자로 자리매김 했지만, 당대 최고의 전도자는 아볼로가 아니었나 싶다. 사도행전 18장에는 아볼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18:24-25). 아볼로를 소개할 때 알렉산드리아출신이라는 것을 아무 의미 없이 밝힌 게 아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대 최고의 도시였다. 당대 최고의 지식 공동체가 그곳에 있었다. 이슬람이 그곳을 이슬람화시키기 전까지(7세기),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역사, 기독교 교리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바로 그곳에서 생성되었다.) 아볼로는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아볼로에게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요한복음에서도 묘사되고 있는 바, 초대교회 당시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미묘한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지금 예수에 관한 사건의 일체의 모든 것이 확정된 상황에서 예수를 믿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경험과 신학적 해석이 아직 부족한 상황이었고, 한창 진행되던 상황이었다.

 

예수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던 아볼로에게 더 깊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수한 사람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다. 그 당시에는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만큼 요한의 제자들의 활동도 활발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요즘 같으면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하면 이단이야, 그러면서 그들과 선을 그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요한의 제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나무란다거나 그들을 적대시하는 정황이 전혀 없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의 대한 지식을 토대 삼아 그들에게 더 깊은 예수의 신앙을 전수해 준다.

 

본문은 바울의 제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 지역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어떤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들과 반가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사귐을 가져보니 그들도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이 받은 세례는 요한의 회개하는 세례였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정황이다. 그들도 예수를 믿었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세례는 요한의 세례였다. 그 말을 듣고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신앙을 더 깊게 해주는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그들이 드디어 성령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정황을 본문은 이렇게 전한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6). ‘방언과 예언의 현상,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을 알게 되니, 뭔가 생기가 돌았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뭔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뜻이다. 그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이 이제 보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초반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의 축소판이다. 그 규모는 작았지만, 제자들이 모여 있었고, 성령의 세례를 받으니, 그들이 방언과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사도행전의 누가가 오순절 사건의 축소판인 에베소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곳 이방지역인 에베소까지 퍼졌고, 예루살렘에 역사한 성령님과 에베소에 역사한 성령님은 한 분(One God)’이라는 뜻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알려진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 무엇인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복음이 선포되고, 말씀의 가르침이 발생한다. 바울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에베소 지역에 머물며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친다. 바울은 두란노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아카데미를 빌려서 그 일을 진행한다. ‘두란노(튀란누)’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뜻은 폭군(튀란노스)’이라는 뜻이다. 공룡 중에 티라노 사우러스할 때, ‘티라노두란노가 같은 뜻이다.

 

이 상황이 굉장히 재밌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처음에 도움을 구했던 곳은 유대교 회당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세 달 동안 복음을 전하는 사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긴 몇몇 유대인들에 의하여 바울은 회당에서 쫓겨난다. 쫓겨난 바울을 맞이해 준 곳,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허락해 준 곳이 폭군(두란노)’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였다. 그를 두란노(폭군)’이라 부른 이유는 아마도 그가 굉장히 괴짜 인물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폭군이라 불리는 사람의 도움에 힘입어 바울은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2년 동안 복음을 전한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그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전해진다는 뜻이다(정확히 말해서, 전해진다기 보다 그곳에 있는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뜻). 그곳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One God)’으로 전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자꾸 왜곡하고, 놓치고 사는 게 있다. 우리는 자꾸 기독교를 교리적으로 전하려 한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논리도 자꾸 빠진다. 그러니, 그곳에서 다툼만 일어날 뿐이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그곳에 교리가 전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현상이 전해진다는 뜻이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그가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명사건을 보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11). 이것은 다른 권능이 아니라 생명사건이 발생하는 권능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서 발생한 생명사건은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2).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바울을 통해 발생한 생명사건의 작은 에피소드이다. 어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 장난삼아 악귀를 쫓아보려 했다가 오히려 그 악귀들한테 봉변을 당한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전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누가가 전하고 싶은 것은 생명사건은 인간이 임의적으로 장난처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 사건이라는 뜻이다. 생명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명사건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생명사건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명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follower of Christ)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 그래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교리적으로기독교인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생명사건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시고, 그곳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면밀히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생명사건이 있는가. 우리는 생명이 없는 곳에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곳에 생명이 있게 하고 있는가.

 

우리 잠시 멈추어서, 하나님의 생명사건이 필요한 내 삶의 부분이 무엇인지 떠올려보자. 나를 답답하게 하는 것, 나를 억압하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 나의 생명을 쪼그라들게 하는 것, 한숨 짓게 하는 것 등, 하나님의 생명사건이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 보자. 사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맞닥뜨리고 살면서도 실상은 한숨 짓고 걱정과 근심에 싸일 뿐,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시고, 그곳에는 생명이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곳에 그리스도를 모셔보자.

 

또한 우리 잠시 멈추어서, 하나님의 생명사건이 필요한 사회 곳곳의 어두운 곳을 돌아보자.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전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이유는 생명이 없는 곳에 그리스도를 존재하게 하여 그곳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각자 직업의 자리가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루터는 일, 사역을 ‘beruf(직업, calling, 소명)’라고 번역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생명력(생명현상/생명사건)이 줄어들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은 더 자주 이 고백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시고, 그곳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의 영이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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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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