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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24. 04:02

하나님이 하신 일

(창세기 45 1~8절)


 

신파극이라고 있다. – (구파극 가부끼): 한일합방 이후 1910년 대에 일본에서 수입돼 유행했던 연극의 일종이다. 신파극의 소재는 가정비극과 사극이 주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일제 강점기에 큰 인기를 모은 한국의 신파극이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부잣집 아들인 광호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만, 결국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남편의 약혼녀까지 살해한 뒤 순사가 된 오빠에게 잡혀가게 된다. 흔히 〈홍도야 울지마라〉로 불린다. 

 

원로가수 故 김영춘 씨가 부른 <홍도야 울지마라>는 한국 가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노래이다. 이서구 작사 / 김준영 작곡의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3.    홍도야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 오리라.


<홍도야 울지마라>를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요셉과 관련하여 노래를 이렇게 개사해 보았다. 제목은 <요셉아 울지마라>이다.

 

1.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신앙의 등불

  요셉아 울지마라 주님이 있다

  신앙인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요셉은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신앙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3. 요셉아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 오리라.

 

홍도와 요셉 간에는 차이가 있다. 홍도의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요셉의 인생은 은혜로 끝난다. 홍도는 노래의 바람대로 살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자기 손으로 끝내 인생의 비극을 만들어 내고 만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노래의 가사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은 3절이다. “홍도야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 오리라.” 이 노래의 가사가 일제시대 때 지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기에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분명 담겨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힘겹게 살던 한민족에게 <홍도야 울지마라>의 노래는 결심과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눈물을 닦고 굳세게 살아야지!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마음 가짐과 몸 가짐을 흐트러뜨리면 안 돼지! 마음을 높게 갖고, 행실을 바르게 하면, 언젠가 즐겁게 웃을 날이 올 거야! 그래 힘을 내자!” 이러면서 힘들고 어려운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아도 인생의 질곡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홍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셉은 정말 이렇게 살았다. 형들(가족)의 버림을 받고 노예로 팔려 갔으면서도 마음과 행실을 지키며 살았다. 울지 않았다. 신앙인의 갈 길을 갔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가는 길에 낀 구름을 바람으로 걷어 주셨다.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더하신다는 뜻이다. 창세기 3024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것은 요셉의 엄마 라헬이 한 말이다.

 

장자권 사건으로 인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몸을 피신한 야곱은 삼촌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라헬을 아내로 맞이 하기 위해 7년을 하루 같이 일한다. 그런데, 삼촌 라반은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하고자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면 7년을 더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곱은 라헬에 대한 사랑 하나로 7년을 더 버틴다. 그리고 결국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런데, 삼촌 라반은 야곱과 라헬의 첫날 밤 술수를 쓴다. 라헬 대신 그의 첫째 딸 레아를 들여보낸 것이다. 그렇게 야곱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레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런 후에, 삼촌 라반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을 야곱의 아내로 준다.  

 

1이제 야곱의 아내가 된 두 자매는 자식을 통해 경쟁하게 된다. 그런데, 레아가 아들을 넷이나 낳는 동안 라헬은 한 명의 자식도 낳지 못한다. 그래서 라헬은 자신의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자식을 둘 낳게 한다. 그것에 시샘을 한 레아도 자신의 몸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자식을 둘 낳게 한다. 그 이후 레아는 아들을 둘 더 낳는다. 이렇게 언니 레아와의 치열한 경쟁의 끝자락에 얻는 자식이 바로 요셉이다.


요셉이 라헬과 라헬을 사랑한 야곱에게 얼마나 귀한 자식이었겠는가! 그리고 라헬이 사랑하는 남편 야곱에게 자식을 더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어렵게 낳은 자식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겠는가! ‘주님, 아이를 더 낳게 해주세요! 더 해주세요!’

 

야곱에게 요셉은 아픈 자식이다. 엄마 라헬의 바람대로 라헬은 그 이후에 자식 한 명을 더 얻는다. 그런데, 그 자식을 낳다가 죽고 만다. 그가 바로 야곱의 막내 아들 베냐민이다. 엄마가 죽는 바람에 요셉은 형들의 틈에서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엄마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랐다.

 

우리는 흔히 요셉을 꿈 꾸는 자라고 부른다. 요셉은 혼자서 공상을 많이 했다. 그래서 꿈도 많이 꿨다. 왜 요셉이 혼자서 공상하고, 꿈을 꾸었겠는가? 형들이 놀아주지 않아서이다. 요즘 말로 하면, 요셉은 왕따였다. 아버지 야곱이 그러한 요셉의 처지를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안쓰러워 요셉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준다. 다른 자식들은 그냥 일반 옷 입힐 때, 요셉에게는 색동옷을 입혔다. 사실, 이러한 모습이 요셉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요셉은 형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꾼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했다. “형님들, 내가 이런 꿈을 꾸었어요!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었는데 내 단은 일어서고 형님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했어요!” “이런 꿈도 꾸었어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을 했어요!” 그런데, 요셉의 꿈 이야기를 좋게 받아들인 형제들이 없었다.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은 요셉에 대한 미움만 키워갔다.

 

모든 범죄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미움은 마침내 사고를 친다.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던 어느 날, 형들은 아버지 심부름을 온 요셉을 음모를 꾸며 죽이려 한다. 그때 아버지 야곱에게 큰 죄를 범한 맏형 르우벤과 마음이 따스했던 넷째 형 유다의 만류가 없었다면 요셉은 음모에 말려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만은 건져 요셉은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다.

 

러셀 크로우가 주연한 <글레디에이터>라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당시 노예로 팔려간 사람들의 삶은 짐승 이하의 삶을 살았다.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셉은 처음에 애굽의 장군 보디발에게 팔려갔고, 거기에서 험한 일을 겪고(보디발 아내의 유혹과 모함), 감옥에 갇힌다. 요셉에게는 아무런 인권이 없었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안개 속에 갇힌 인생이었다.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이 아무것도 없었다.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마음과 행실을 높게 갖는 것외에는 없었다.

 

위의 개사한 노래 <요셉아 울지마라>하늘이 믿으시는 네 신앙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가사처럼,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에 낀 구름을 걷어 주신다. 그리고, 그는 애굽의 총리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토록 갈망하던 형들(가족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오늘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눈물 나는 신파극장면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장면일 것이다. 형들은 가뭄에 목숨을 구걸하러 애굽에 왔고, 요셉을 그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 자신을 밝힌다. “나는 요셉이라!” 오늘 말씀 가운데서도, 자기 자신을 밝힌 요셉을 보면서 형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셉의 고백은 평범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5, 8).

 

요셉의 고백은 한 마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하셨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 죽도록 고생해 놓고, 자신들을 이 궁지에 몰아놓은 장본인들(형들)을 앞에 두고, 그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그들의 죄책을 지워주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요셉의 신앙은 전무후무할 정도이다.

 

우리의 인생은 때로, 아니, 자주,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고백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요즘 한국에서 어떠한 장군의 갑질 논란이 한창인데, 장군 운전병(공관병)을 한 나로서 군대에 대한 나의 기억을 여기에 꺼내 놓고 싶다.

 

나는 김영삼 정권 때 (문민정부) 군생활을 했다. 평소에 군대를 가면 장군 운전병을 하고 싶다고 소망하고 기도했는데, 소망대로 육군본부 작전처장 운전병(공관병)을 했다. 군생활 당시, 국군의 날 행사를 계룡대(육해공군 본부)에서 했다. 국군의 날 행사를 지위하는 장군을 제병지휘관이라고 한다. 제병지휘관은 실세 중 한 명이 맡게 되어 있다. 그때 제병지휘관을 맡은 장군은 육군본부 감찰감 이영대 장군이었다. 그런데, 제병지휘관을 맡아 국군의 날 행사를 준비하던 중, 이영대 장군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췌장암이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급히 췌장암을 치료하러 미국에 갔다.

 

국군의 날이 다가오고 있어, 병가를 낸 이영대 장군을 대신 할 제병지휘관을 급하게 새로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9군단 부군단장을 하던 이남신 장군을 급하게 제병지휘관에 임명했다. 9군단 부군단장은 투 스타로서 옷을 벗는 사람이 가는 자리다. 한가한 장군이라 급하게 제병지휘관 자리를 맡긴 것이다. 아무튼, 이남신 장군은 땜빵으로 제병지휘관 자리를 맡아, 국군의 날 행사를 치른 것이다.

 

그런데, 국군의 날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는 동안 췌장암을 치료하러 미국에 간 이영대 장군은 그만 죽고 만다. 이영대 장군이 죽자 육군본부 감찰감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그때 국군의 날 행사를 잘 치른 이남신 장군이 별세한 이영대 장군의 후임으로 육군본부 감찰감 자리에 온다. 인생 역전이다.

 

그때 운전병이 9군단에서 함께 왔다. 운전병에게 이남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운전병이 정말 괴로워했던 것은, 장군을 모시고 매일 같이 새벽기도에 가는 것이었다. 운전병이 못 일어 나면, 운전병을 깨우지 않고, 장군 본인 혼자 차를 몰고 새벽기도를 다닐 정도로 신앙에 열심인 장군이었다.

 

이남신 장군은 요직인 육본 감찰감 자리에서 진급을 하여, 기무사령관으로 간다. 그러는 사이에 정권이 바뀌었다.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이남신 장군은 호남 출신이다. 그래서 그 이후, 이남신 장군은 3군 사령관을 거쳐, 합참의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야말로 인생역전이다. 투 스타에서 옷 벗는 9군단 부군단장 자리에 있다가, 우연히 땜빵으로 제병지휘관을 역임하고, 어부지리로 육본 감찰감 자리에 오르고, 그 이후, 정권이 바뀌어 합참의장까지 지내게 된 것은 그야말로 미스터리다내가 아는 한,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내가 지금 기도 열심히 하면 인생역전 된다는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부흥회 같은 데 가면,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 가족들이니까 좀 더 이야기 한다. 그러면 이영대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겠는가? 절에 다니던 사람이었겠는가? 교회 안 다니던 사람이었겠는가? 아니다. 이영대 장군도 이남신 장군 못지않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장군이다. 이영대 장군 운전병도 이영대 장군이 매일 같이 새벽기도 가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러면 뭔가?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러니, 요셉처럼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삶을 살자. 마음과 행실을 높게 갖자. 그러면, 우리의 입술에서도, 감사와 찬송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흘러 나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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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15. 14:07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한복음 15:1-8)

 

얼마전 나파 밸리(Napa Valley)에 다녀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지척에 있는 지 몰랐다. 요즘 대중들 사이에서는 포도주 마시는 일이 유행이지만, 개인적으로 포도주든 무엇인든 술 마시는 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지척에 세계적인 포도주 생산지를 놓아두고도 별 관심이 없었다.

 

성경에는 포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오늘 말씀도 포도나무에 비유한 말씀이다. 이러한 비유를 좀 더 잘 이해하려면, 포도원에 한 번 가서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고 열매의 상관관계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참포도나무라고 한다.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참포도나무가 아닌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포도나무라는 말은 예레미야서 221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예레미야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이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딱 붙어 있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할 참포도나무 가지인데, 어느덧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에게 딱 붙어 악한 가지가 되어 악한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우리나라 말로 농부라고 번역했지만, 영어로는 ‘vinedresser’이다. , ‘포도원지기이다. 나는 농부라는 말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더 정겹고, 의미가 더 확실하게 다가온다.


요즘은 농경사회가 아니라, 농부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 “農者之天下之大本(농자지천하지대본, 농부가 천하의 근본이다.)”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래서 IT 산업 또는 AI 산업이 대세를 이루고 있어, 우리 사는 이곳 실리콘밸리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농자지천하지대본은 유요한 말이다.

 

나는 강남에서 자랐다. 그런데, 내 어린 시절의 강남, 특별히 내가 성장한 우면산 일대 말죽거리 주변은 논밭이었다. 지금도 어린 시절 논두렁 밭두렁, 그리고 야산(우면산)을 뛰어다니던 일이 눈에 선하다. 요즘 아이들은 생일 때 피자 먹고 놀이기구 타고 게임을 하지만, 우리는 그때 생일 때 모여서 밥, 미역국, 잡채 같은 거 먹고, 밖에 나가서 자치기 하면서 놀았다

 

농번기가 되면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이 바빠졌는데, 친구들과 논두렁에 가서 올챙이 같은 거 잡고 놀다가, 새참 먹을 때 되면 함께 둘러 앉아 새참을 얻어 먹었다. 그리고 동네 농부 아저씨가 태워주는 경운기(딸딸이)는 최고의 놀이기구였다. 한 여름 땡 볕에 벼가 자라고, 장마가 오면 논두렁이 한강물처럼 넘치고, 장마를 이겨내고 가을이 오면 곱게 머리숙인 벼를 수확했다. 그때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놀이기구는 탈곡기이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논에 수북이 쌓인, 탈곡을 마친 볖집들을 이용해 본부라는 것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먼지가 엄청 났을 텐데, 그때는 그렇게 놀아도 비염에 걸리지 않았다.

 

농부가 해야 할 일은 엄청 많다. 곡식을 자라게 하는 일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하던 일이 잘 안 되면, ‘다 때려 치우고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나 짓겠다고 말한다. 농사를 우습게 보는 발언인데, 그러한 발언을 하며 농사 지으러 내려간 사람이 있다면, 얼마 안 돼서 후회하며 다시 도시로 상경할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농부이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두 가지 나온다. 가지치기와 가지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농부 아버지는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해 깨끗하게 하신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요즘 회사에서 성과를 내는 직원은 더 밀어주고, 성과가 없는 직원은 정리해고 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다.

 

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다!” 예수님께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버린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과장법과 강조법을 써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마음 자세를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우리도 아이들을 훈육할 때 이런 말을 쓴다. ‘너 또 그러면 맴매 맞을 줄 알아!’ 여기서의 강조는 때리는 것에 있지 않고, ‘아이가 말을 잘 듣는 것에 있다. 위의 말씀은 마찬가지 원리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선포를 믿고 감사한다.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졌다! (You are already clean!)” 같이 해 보자. “나는 깨끗하다!”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뚜렷한 사람일수록 인생을 값지게 산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흐릿하면, 그때 인생은 방황하게 된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졌다!”

 

농부이신 아버지의 할 일은 가지치기와 가지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의 할 일은 깨끗함을 유지하는 일이다. 홈리스피플을 가까이서 만나면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가? 냄새이다. 그들의 몸에서는 왜 그렇게 냄새가 날까? 씻지 않아서이다. 몸을 깨끗이 씻는 일도 쉽지 않다. 몸의 청결은 건강과 직결되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의 일과를 돌아보라. 빼먹지 않고 하는 일 중에 씻는 일은 반드시 들어간다.

 

오늘 말씀의 논리를 보면, 깨끗해진 그리스도인이 그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생기는 결과가 있는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 열매는 사랑과 기쁨의 열매이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사색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한병철, <피로사회>, 36).

 

이 말은 철학자 한병철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요즘 철학자들이 현대사회를 바라보며 가장 염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과잉활동이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다 보니,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색의 삶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버나드 쇼가 자신의 묘비명에 쓴 이 문구를 자신의 묘비명에 새겨 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

 

사실, 농부가 과잉활동’, 즉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다. 농부는 해야 할 일만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기다림으로 보낸다. 농부는 파종할 시기를 기다리고, 비를 기다리고, 수확을 기다리고,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농부는 기다리는 동안 땅을 돌아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자기를 돌아본다. 그래서 농부는 겸손하고 간절하다.

 

내가 좋아하는 김경주 시인의 <인형증후군 전말기>라는 시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나는 간지럼을 타지 않는다. 밖에서 나를 웃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밖에서 간지럼을 타서 웃는 웃음은 참 웃음이 아니다. 그 웃음은 간지럼이 그치면 그냥 그쳐 버리고 말 웃음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심각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TV에서 가장 뜨는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그램이다. 가장 인기 있는 연애인도 예능 프로그램을 하는 연애인이다. 요즘 사람들이 예능에 목매는 이유는 예능이 자신들의 삭막한 인생에 간지럼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누가 간지럼을 태워주지 않으면, 웃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능을 보며 간지럼을 타 웃고 싶은 현대인들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떻게 들려오는 지 모르겠다. 나의 마음에는 내 아버지가 농부이시니 나도 농부가 되어야지라고 들려온다. ,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고, ‘과잉활동에서 벗어나, 땅도 돌아보고, 하늘도 쳐다보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농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거한다는 것은 머무른다는 뜻이다.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공간과 어떠한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우리는 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매일같이 거르지 않고, ‘씻는 일에 머무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미 깨끗해진우리가 그 깨끗함을 유지하며, 사랑과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즉 머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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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11. 09:35

에바브라

(골로새서 1:1-8)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박지성의 맨유 절친 에브라를 안다. 그 에브라를 생각하면, ‘에바브라라는 이름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성경에는 에바브라와 비슷한 이름이 나온다. ‘에바브로디도이다. 물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이름이 비슷하고 헷갈리는 이유는 헬라어를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해서 그렇다. 에바브라는 ‘ephabras(에바브라스)’이고, ‘에바브로디도‘ephabrotitus(에바브로티투스)’이다.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어느 곳에나 일꾼이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일꾼이다.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 4:18)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쓴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가져다 준 인물이 에바브로디도이다. 그리고, 빌립보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쓸 물건들을 공급해 주었다. 덕분에 바울은 감옥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도움의 손길 때문이다. 서로의 어려움을 돌보는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벌어진 일 들 가운데 하나가 그런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2:44-45).

 

에바브로디도에바브라디도가 합쳐진 말로 잘못 아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냥 고유한 이름이다. ‘디도라는 사람은 다른 인물이다. ‘디도는 그리스 사람인데, 바울의 또다른 동역자로서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인물이기도하고( 2:1), 무엇보다 그는 고린도와 크레타 섬에서 사역했으며,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에 전달한 사람이기도 하다. 신약성경에서 꼼꼼히 성경을 넘기지 않으면 존재가 있는지도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두 개의 서신서가 있다. 첫째는 빌레몬서이고, 둘째가 디도서이다. 빌레몬서는 1장이고, 디도서는 3장인데, 짧은 3장이다. 그래서 존재가 확인되지 못할 때가 많다. 디도서의 주인공이, 바로 디도이다. 디도는 크레타(그레데) 섬에서도 목회를 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아주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울의 동역자 중 가장 힘든 곳에서 목회한 사람이 디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크레타 섬 사람들의 나쁜 습성 때문이다. 크레타 섬 사람들의 가장 나쁜 습성은 거짓말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디도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1:12-13).

 

그런 크레타 섬에서 목회한 디도 (목사님)에 비하면, 내 목회 환경은 양반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물론, 공사다망하셔서 우리가 한 자리에 다 모이기 힘들기는 하지만). (공사다망이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많아서 바쁘다는 뜻인데, 이렇게 쓰이기도 한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많아서 바쁘면, 다 망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이 일을 왜 하는 지잠시 멈추어 서서 성찰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주일을 지키는 일이 그런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역자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소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의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다.

 

에베소라는 곳이 있다. 이 곳은 바울이 소아시아지역 복음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다. 에바브라는 이곳에서 사도 바울에게 제자훈련을 받고, 고향(골로새)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운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사도 바울은 에바브라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마음이 오늘 말씀에 담겨 있다. “(에바브라)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7, 8).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성령 안에 있는 자”, 이러한 칭찬을 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성령 안에 있는 자로 인정한다.

 

위에서 소개한 에바브로디도, ‘디도, ‘에바브라는 모두 이방인이다. 유대인의 성경인 구약을 아는 자들도 아니고, 유대인의 율법을 아는 자들도 아니고,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을 아는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의 모든 삶을 바친 사람들이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로마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능력이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능력이 나타난다.

어떤 에너지, 알 수 없는 힘이 우리의 인생을 일으키고 새롭게 한다.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와 옥에 갇힌 사도 바울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며 빌립보교회와 사도 바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었겠는가.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디도가 크데타 섬 같이 목회 하기 어려운 곳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에바브라가 자신의 고향 골로새에 교회를 개척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 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우리들이 복음을 듣고, 그 능력에 사로잡힌 이 시대의 에바브로디도, 디도, 에바브라인 줄로 믿는다. 우리가 바로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혀, 성도의 쓸 것을 힘써 공급하고, 어려운 상대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성령 안에서 신실한 일꾼이 되어 전도하고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믿음의 자녀인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에바브로디도, 디도, 에바브라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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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2. 06:57

세화교회로 오세요!

(요한복음 1:43~49)

 

오늘 말씀은 이전 단락의 말씀과 쌍을 이루는 말씀이다. 이전 단락의 말씀은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하고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유대교 전통에서 어린 양심판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희생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양 앞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을 보면, 이 어린 양은 희생양, 속죄양의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레위기에 등장하는 제사법을 보면, 속죄로 쓰이는 어린 양은 아무 것이나 가져다 쓸 수 없다. ‘흠 없고 티가 없어야한다. 우리가 흔히 을 생각하면 순진하고 힘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 양이 힘이 없어서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쁜 사람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힘 없는 사람을 희생양삼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어린 양은 힘 없는 양이 아니라 온전하고 순전한 양, 즉 죄가 없는양을 말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스승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에게 접근한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를 보고 예수님은 묻는다. “무엇을 구하느냐?” 그랬더니, 이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생뚱맞은 대화이다. 제자들이 질문한 어디 계시오니이까?”는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 나누는 대화의 일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디 사세요?” “, ~ 프리몬트 살아요!” “한 번 와 보실래요?” 이것은 우리가 고대 유대인들의 대화방식을 알지 못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케익 사고 초 41개 달라고 했는데, 41개 초를 받은 이야기 문화가 달라서 벌어진 해프닝)

 

여기서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질문은 어디 사세요?’의 뜻이 아니라, ‘어떤 인격체인지를 묻는 말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합니까? 그러면 와서 나와 함께 사귐을 가져보시오!”

 

안드레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인격체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에 대한 고백은 안드레가 자신의 형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드러난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렇다. 예수님의 존재는 구원자이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는 이야기이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동향 사람이다. 그들은 벳새다에 살았다. (여기서 성경을 잘 아시는 분은 의문을 품을 것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베드로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아마도, 베드로는 벳새다에 살다 가버나움으로 이사했던 것 같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그랬더니, 나다나엘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 우리는 이 말을 보고, 나다나엘이 굉장히 시니컬하고 재수없는 사람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런데, 우리의 그런 오해와는 전혀 상관 없이, 나다나엘은 굉장히 신실한 사람이다. 빌립이 애초부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를 운운하며 예수님을 나다나엘에게 소개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도 이유가 있다. 나다나엘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토라를 공부하고 묵상한 사람이었다. 그 증거가 뒤에, 즉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드러난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도서관이 있어서 시원한 데 앉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 토라(율법책, 창출레민신 또는 히브리바이블)도 매우 비싸서 아무나 구해서 볼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토라를 공부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무화과 나무 아래가 소개되고 있다. (옛날에 연애하기 좋은 장소로 어디 있었는가? ‘물래방앗간’,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도 실제로 물레방앗간에서 연애를 하셨단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평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는 토라에 맞추어 메시아인 나사렛 예수를 소개했던 것이고, 나다나엘은 평소에 자신이 공부한 것에 비추어 나사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 즉 메시아와 나사렛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그랬더니,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와서 보라! Come and see!”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빌립의 제안에 나다나엘은 응하여, 그는 나사렛 예수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나다나엘을 본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이렇게 평가한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이렇게 말하는 예수님을 보고, 나다나엘은 묻는다. “나를 아시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예수님이 빌립을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평가한 이유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열심히 토라를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다나엘은 비로소 이렇게 고백한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전도지와 전도용품이 도착했다. 전도지의 첫 문구는 세화교회로 오세요!”이다. 예수님이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세화교회로 오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위에서 요한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것은 이런 뜻이라고 했다. “당신은 어떠한 분입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세화교회로 오세요!”하고 교회를 소개할 때, 그들은 똑같이 물을 것이다. “세화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럴 때 여러분은 세화교회(우리교회)’를 어떻게 소개하실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프리몬트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렇게 말할까? “프리몬트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얼마 전 출간된 한국교회실태조사보고에 의하면, 노방전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100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노방전도에 의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 누가 전도를 할 때 전도가 가장 잘 될까?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친구이다. 오늘 말씀도 그렇지 않은가. 스승이, 친구가 예수님을 전할 때 관심을 가졌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또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사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소개하려면, 그 무엇에 대하여 내가 먼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교회를 소개하려면, 현재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확신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여러 사람이 똑 같은 물건을 팔 때,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파는 물건을 살까? 당연히, 확신을 가지고 물건을 파는 사람의 물건을 살 것이다. 자동차를 사러 갔는데, 자동차 딜러가, 자신이 파는 차의 특징과 기능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다른 자동차 브랜드와의 차별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동차 파는 것에 대해서 확신도 없으면, 그 차를 사고 싶겠는가?

 

세화교회로 오세요!”에 자신감이 넘치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는 교회이름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전하기에 참 좋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두 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와 화해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이름입니다. 세화에는 하나님이 세상과 화해하셨다는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가진 비전들은 물론 여느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우리교회는 하늘에서 뚝떨어진 괴상한 교회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비전을 갖느냐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오직 사랑(예배)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 예배를 드리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선교하는 공동체이다. “복음 전하는 일은 교회의 존재이유이고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사모합니다.”

 

우리는 배우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배우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세대 간에 소통합니다.”

 

우리는 친교하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를 상실한 문화 속에서, 인간성을 왜곡하는 장벽들과 맞서,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헌신합니다.”

 

우리는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받아들여졌고, 이해받았고, 사랑받았다는 것을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받아들여졌고, 이해받았고,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 “그대는 단 한 가지 /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 사랑하십시오. /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을 하십시오. /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 용서 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 하십시오. /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어거스틴의 명언이다. 이 어거스틴의 명언은 성경의 말씀을 자신의 말로 옮긴 것이다. 요한복음 13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것을 늘 마음 속에 품고 산다. 나는 사실, 목회하면서 어떠한 일을 하기보다, ‘사랑하려고한다. 어떤 일 하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런데, 사랑하는 일은 오히려 어렵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일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세화교회로 오세요!”에 자신감이 실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없어야 한다. 교회 와서 어떤 일을 하지 말고, 사랑하는 일에 전념해 보라. 함께 예배 드리는 동료 교우를 사랑하라. 교회를 사랑하라. 그러면, 우리교회는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분명히 될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있는 교회가 틀림없이 될 것이다.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세화교회로 오세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있는 세화교회로 오세요!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요, 이것이 우리의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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