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꼭 잡는 신앙]

 

히스기야 왕은 요시야 왕과 더불어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히스기야가 좋은 평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을 갖는 일은 늘 어려운 듯합니다. 하루라도 자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인간의 운명인 듯하고요. 그리고 신앙이란 영의 일이라 오롯이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인 듯합니다. 신앙인에게 자기 반성이란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간절한 겸손일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산당들 제거, 주상(돌기둥, 신 임재 표식) 깨뜨림, 아세라 목상 찍어 버림, 모세가 만든 놋뱀 철거 등의 외적인 형태를 갖추었지만, 종교개혁의 핵심은 산당신앙에서 벗어나 성전신앙으로 가는 것입니다. 산당신앙은 오늘날에도 신앙을 괴롭히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보다 신앙심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산당신앙은 개별신앙, 사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신앙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죠. 신앙의 방향이 ‘자기self’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사회분열을 조장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맞지 않는 사람과의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조장됩니다.

 

반면에, 성전신앙은 공동체 신앙, 공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성전신앙의 방향성은 나의 바깥입니다.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전신앙은 화합과 평화를 추구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보다 현재 우리의 삶이 더 산당신앙으로 기울기 쉬운 시대입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적나라하게 폭로했듯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남을 죽여야만 자기가 사는 시대인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징어 게임 하듯,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남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시대에서 성전신앙을 세워 나가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열왕기하 18장에 그 내용이 담겨 있는데, 히스가야를 평가는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6).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왕하 18:12). 이게 바로 산당신앙과 성전신앙의 차이입니다. 산당신앙은 신앙을 사사로이 사리사욕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내가 당장은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사회를 분열시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정말 경계해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은 성전신앙의 모범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타흐’이고, 다른 하나는 ‘다바크’입니다. ‘바타흐’는 의지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신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뢰하니까 안정감을 갖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타흐’(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안정감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안정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불안’하다면 나의 신앙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바크’는 연합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있는 형상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어린 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잡고 그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성전신앙은 산당신앙과 달리 하나님의 손을 꼭 잡는 신앙입니다. 손을 꼭 잡은 모습에서 ‘애정’을 봅니다. 성전신앙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잘 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인 신앙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고 더불어 힘든 일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동행하는 신앙이 성전신앙입니다.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성전신앙을 통해서 공동체(서로의 삶을 보듬어 주는 삶의 형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전신앙, 공동체 신앙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불안을 극복하고 삶에 자신감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은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공동체가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히스기야의 삶은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형통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정감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사회도, 이렇게 형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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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근대의 의미: 보수 사회]

 

근대(modernity)의 의미는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

(자연보다 인간의 힘이 더 강력해진 시대)

2) 국민국가의 탄생

(국가는 개인의 또다른 자아가 되었다. 애국심의 탄생)

3) 사유재산의 허용

(내 재산은 아무도 못 건드려! 이건 하나님도 못 건드려!)

 

이 외에도 근대를 규정하는 여러가지의 현상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세 가지가 근대를 규정하는 가장 큰 현상이 아닌가 싶다. 이런 현상을 볼 때 근대는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보수적'일수 밖에 없다. 인간중심주의, 국가중심주의, 자유(사유재산)중심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의 문제는 결국 보수 사회가 가져온 파국이다. 보수적 사고와 보수 사회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인간의 성공, 국가의 성공, 자기의 성공은 찬란한 것 같으나, 그 성공이 지니고 있는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두 마리 물고기가 어느날 싸워서 한 물 고기가 죽었다. 이제 혼자 남게 된 물고기는 자신이 연못을 모두 차지한 것 같고, 더이상 싸울 일도 없어서 평안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가 썩어들어가고 그 썩은 물고기가 연못을 오염시켜 결국 혼자 남은 물고기마저 죽게 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공, 다른 나라에 대한 우리 나라의 성공, 다른 인간에 대한 나의 성공은 모두 '수탈'과 '외부 전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수탈과 외부 전가는 끝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분명, 근대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짧을수록 좋다.  '지배와 종속'에서 벗어나 '평등'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보수적인 사회로 가야 한다. 가치가 올바르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치가 올바르지 못하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그저 꼴통 소리를 들을 뿐이다. 지금 근대의 가치를 지키려는 존재는 그저 꼴통일 뿐이다.

 

좋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좋은 보수 사회가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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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철학]

 

좋은 문학은 '비극'이다. 좋은 철학은 '아픈 철학'이다. 좋은 문학은 비극을 보듬어 안아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좋은 철학은 아픈 마음을 안아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좋은 문학을 하고 좋은 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대개 개인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비극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파국 또는 비극으로 몰고온 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 보며, 왜 이러한 파국과 비극이 닥쳤는지를 파헤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토대를 제공한다.

 

일례로,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는 아픔이 담긴 철학이다. 나치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노동의 경험이 그를 '놀이하는 인간'으로의 사유로 이끌었다. 나치 포로수용소의 모토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다. 노동하느라 죽다 살아난 하위징아는 노동과 대비되는 '놀이'에 주목하여,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삶의 토대를 제공하여 노동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아픈 철학이다. 그의 철학에는 아픔이 배어있다. 

 

아픔을 일부러 경험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살면서 아픔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는 아픔을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픔이 낳은 창조물이다.

 

아픈 철학이 좋다. 그가 왜 그런 철학을 하는 지, 인생의 뒤안길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아픔이 어떻게 새로운 길을 내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면 좋다. 그렇게 우리는 아픔을 이겨내기도 하고, 아픈 철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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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조찬기도회를 폐지하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인격을 생산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인격을 비인간화한다. " (라쿠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 398쪽>

 

우리 사회를 '자유 민주주의 사회'라 한다. 그 바탕에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깔려 있다. 이 체제의 악마성은 '인격을 생산 수단'으로 전락시킨다는 데 있다. 인격이 생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인격으로서의 대우는 증발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 인격이 외롭고 지치고 탈진하는 이유는 인격이 '생산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한 인격으로 존귀하게 대우를 받지 못하고 '생산 수단'으로 전락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한나 아렌트의 용어를 통해서 표현하면, 우리 사회의 인간 인격은 '정치적 삶'이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 없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서 '정치적 삶'을 박탈한 뒤 저지른 참사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러한 상황을 더 심화시켰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지위는 말도 못하게 약화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현대판 노예'라 부를 만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정치철학적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발언은 예수님을 해방자(liberator)가 아니라 억압자(oppressor)로 둔갑시키는 일이다.

 

아무데나 '기도회'를 갖다 붙인다고 그것이 거룩한 시간이 되거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 되지 않는다. 아무데나 '예수님'을 갖다 붙인다고 그것이 거룩한 개념이 되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 아무데나 '기도회' 그리고 '예수님'을 갖다 붙이는 행위는 자신의 무지와 몽매를 드러낼 뿐이다. (내가 무지몽매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가르쳐 주시라.)

 

국가는 인간 인격의 '정치적 삶'을 보장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는 국가가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정치적 삶'을 빼앗고 있고, 교회가 그것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조력하고 있다면, 국가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 반대를 말하고 있는 국가조찬기도회의 존재 이유는 묘연할 뿐이다. 이럴거면, 국가조찬기도회는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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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늦은 인생은 없다 (No life is late)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유대인들의 영성이 담긴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선한 일을 많이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 재물이 많은 청년은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계명을 잘 지킨 것이 그에게는 선한 일입니다. 어디 흠잡을 데 없이 아주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한 가지를 더 행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 21). 이 말씀을 들은 재물이 많은 청년은 근심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그렇다면, 부자가 된 사람이나, 부자 나라의 국민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요? 모두가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이 시대에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절대로 부자되기를 갈망하면 안 되고, 부자가 된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이 시대에 이 말씀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같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놀랐던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기에는 탄식이 묻어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 맞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인 사람과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 상황이 이럴진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이 말씀은 정말 맞는 말씀 같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꿈꾸는 것은 언감생심인 듯합니다. 말씀을 듣고 당황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이 맥락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비유로 알려주십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1).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쉬운 비유입니다. 포도 수확철에 흔히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오전 6시) 인력시장에 나가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일꾼을 데려다 씁니다. 일꾼이 더 필요했는지, 포도원 주인은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도 나가서 일꾼을 구해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도 인력시장에 나가봅니다. 오후 6시에 하루 일과가 끝나기 때문에 오후 5시에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꾼을 구해오는 일은 매우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인력시장에 나가서 아직까지 일을 구하지 못해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노동자를 발견합니다. 집 주인은 ‘아무도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우두커니 서 있다’는 일꾼을 데려다 포도원에서 일을 시킵니다.

 

이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할 시간입니다. 집 주인은 회계 담당자를 시켜 일당을 지불합니다. 일당 지불은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부터 지급됩니다. 그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들보다 훨씬 일찍 와서 일한 노동자들은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그들보다 더 많은 일당을 받게 될 것 같아 기대감에 부풉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집 주인은 그들에게도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지급합니다. 한 데나리온을 받아든 일꾼들은 불평합니다. “아니 어떻게 1시간 일 한 사람하고 하루 종일 일 한 사람하고 일당이 같을 수 있어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긴 노동자들과 자신을 별로 가치 없다고 여긴 노동자들을 봅니다. 일찍 와서 오랜 시간 동안 일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 일찍 선택되어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오후 5시에 겨우 선택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별로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가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했습니다. 자신들은 가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겨우 1시간 남겨 놓고 일에 투입된 사람들과는 차별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한 데나리온 받은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노동의 대가를 받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 주인에게 이렇게 불평하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은 바로 위에서 본 부자 청년과 같습니다. 자신은 이미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 천국에 들어가기에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이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집어 엎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문자적으로 ‘너의 눈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집 주인은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잣대로 자기를 평가합니다. 집 주인의 평가를 불신합니다. 자기의 잣대로, 자신들을 선하게 평가하고, 자신들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그래서 자신들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집 주인은 이들을 일컬어 악하다고 꾸짖습니다.

 

이 이야기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정말 통쾌한 비유이고, 정말 안심되는 비유이고, 정말 멋진 비유입니다. 천국은 정말 유쾌한 곳입니다. 집 주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이들은 자기보다 가치 없는 인간이 자기와 동일하게 대우 받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행동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이룬 만큼,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집 주인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데 중점을 둡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자신이 가치 없다고 자책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가족을 부양하고 삶을 이어가는데 한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한 겁니다. 남보다 더 가치 있고 남보다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생명의 깊이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아니, 이런 사람은 이미 천국을 사는 것이겠죠. 그래서 이런 이들은 부자되는 것과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인생의 깊이에 관심을 둡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도 너무 힘들어 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신이 조금 일찍 온 자 같거든, 겸손하세요. 늦은 인생은 없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자기의 가치를 평가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선하심에 삶을 맡겨드리세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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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9. 19. 10:16

부르심에 대한 감사 기도

(레 1:1-2, 8-13)

 

주님,

우리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특별하고 존귀합니다.

주님의 부르심 덕분에

삶의 깊이로 내려가

더 행복하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에

무한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사오니,

그 사랑이 우리를 타고 흘러 넘쳐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세상을 만들게 하옵소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9. 19. 10:14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

(레위기 1:1-2, 8:1-13)

 

1.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 있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향 평준화한다. 성경에는 인간을 아주 존귀한 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반대도 있지만).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기독교 신앙은 ‘신화’(Theosis/하나님처럼 되는 것)의 특징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당신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이러한 특징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인간은 품위 있게,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존귀하게 여기며, 존귀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레위기 8장은 제사장의 임직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임직식 거행은 7일간 지속되었다. 왜 7일간 거행되었을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연관 속에서 제사장의 임직식을 생각해 보면, 제사장 되는 일은 창조의 역사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냥 보통의 일이 아니다.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다. 제사장의 직분을 수여받고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창조의 역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6일 동안 창조하고, 7일에 쉰 것을 포함한 과정), 하나님은 7일 동안 제사장을 ‘창조’한다.

 

3. 창조는 만듦이 아니라 부르심이다. 우리 인간의 피조성은 내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또는 지음받았다는 의미를 넘어서 내가 주님께 부름받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조는 내가 단순히 피조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창조는 부르심이다. 7일 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제사장 직분을 부여하시는 것은 제사장을 창조하신 일이고, 제사장을 부르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7일 간 거행되었다는 것은, 7의 숫자가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제사장의 완전함, 즉 거룩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7일 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세우신 제사장은 거룩하다.

 

4. 우리가 사는 사회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표출한다. 랍비 조너선 색스는 행복와 의미를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행복은 주로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에 반하여 의미는 삶의 목적에 대한 인식으로서 특히 다른 사람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짧게 표현하면, 행복은 소유과 관련되고, 의미는 기부하는 것(희생)과 관련된다.

 

5. 요구와 필요가 충족되면 누구든 행복하다. 개도 고양이도 사람처럼 요구와 필요가 충족되면 행복해한다. 그러나 의미는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현상이다. 인간은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긴장하거나, 불안하거나, 염려되거나, 고난과 고통 가운데 처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조너선 색스는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미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한 것이다”(매주 오경읽기 영성 강론, 178쪽).

 

6. 행복만 추구하면 인간은 삶이 천박해지거나, 자기에게만 열중하다 결국 이기적인 삶이 되기 십상이다. 행복만 추구하다 보니, 요즘 우리들은 아주 쉽게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한다. ‘이거 하면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이걸 내가 왜 해야 해?’ 인생을 행복의 차원에서 더 끌어 올리면 의미의 차원으로 간다. 의미의 차원에서 인생을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더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보다 고통을 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행복의 차원에서만 인생을 생각하면 우리는 아주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있다. 자신의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7. 깊은 절망에서 생존한, 아우슈비츠 비극의 생존자 중 한 명인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지 말고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의미의 심리학을 발전시켰다.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가장 깊은 절망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아 그 절망을 이겨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수감자들의 모습 속에서 그는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삶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의미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인생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8. 우리는 왜 신앙을 가지고 사는가? 신앙을 가지고 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과 신앙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여기에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종교적 인간이 분명히 비종교적 인간과 다른 것은 오직 자신의 존재를 단순히 과업이 아니라 사명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삶을 과업으로 경험하는 사람과 삶을 사명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인생의 깊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을 그냥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일을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만큼 일을 하겠지만,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일을 한다.

 

9. 신앙은 인생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여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깊은 것을 경험하게 한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구약성경의 다섯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모세오경’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만나는 모세는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무엇이 모세를 이렇게 특별한 존재(사람)로 만들었는가? 그 해답은 레위기서의 이름에서 발견된다. 레위기는 히브리어 ‘바이크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라는 뜻이다. 모세가 특별한 존재가 된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르심은 깊은 총애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특별해진다.

 

10.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레위기에서 이 부르심을 보지 못하고, 그저 희생제사나 제사장에 대한 법들, 그리고 정결법 등 만을 보고 말면 손해다. 이러한 것들만 보면 레위기는 정말 재미없는 성경일 뿐이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흘러내려가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을 세워 그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사장은 희생제사를 집전하는 일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모세와 제사장을 통해 백성들에게 흘러내리고 있다.

 

1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직분을 받게 된다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앙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굉장히 중요한 성찰이다. 임직을 한다는 것, 직분이 생긴다는 것은 교회 일을 부담스럽게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는 게 아니다. (일반 회사에서 직급이 높아지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직분을 가진다는 것은 ‘부르심’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삶을 행복의 관점이 아니라 의미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 나에게는 사명이 있구나!” 이런 부르심의 경험 가운데서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12. 부르심은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타고 흐르도록 나를 내어주는 것이다. 내가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다시 말해,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1)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이고, 2)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직분을 받을 때, 이러한 신앙의 실존적 기쁨이 있어야 한다.

 

13. 세상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가 하고 싶은 거 해!” 그러면 삶이 행복해질거라고 한다. 물론 이 말도 틀리지 않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 거기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거나 절망할 때도 많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다. 조금 더 인생의 깊이로 들어간다. 행복만을 추구하지 않고 의미의 세계로 더 나아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이렇게 의미를 추구하고, 사명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14. 단순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더 존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를 것을 알고, 그것을 믿고, 그렇게 응답하며 사는 것이 신앙인이다. 이것을 더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흘려보내는 신앙인이 직분자이다. 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직분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내리도록 나를 내어주는 존귀한 자, 존귀한 삶을 사는 자들이다. 직분자들은 그것을 더 큰 기쁨 가운데 누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 ‘부르심’을 통해 삶이 더 깊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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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희생제사와 사랑]

 

이름이 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이름은 원래 각 책의 히브리어 첫 글자를 따자 지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는 히브리어 ‘베미드마’로 시작합니다. 한국말로 ‘광야에서’라는 뜻입니다. 민수기는 ‘광야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레위기는 히브리어 ‘바이크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라는 이름은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인상을 주지만, ‘광야에서’는 뭔가 기대를 갖게 합니다.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실제로 민수기에서 우리는 광야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건을 만납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레위기는 ‘레위지파의 기록’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온갖 지루한 법으로 채워진 것 같지만, 실은,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 호기심이 생깁니다.

 

레위기는 제사를 둘러싼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와 방법,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에 관한 규칙들, 그리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이 레위기를 메우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 나가다가 처음으로 막히는 곳이 레위기입니다. 너무 낯선 풍경을 접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제사의 종류나 방법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사실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제사 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약의 예언서에 보면 선지자들은 모두 제사를 비판적으로 기술합니다. 아모스,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의 제사 비판은 신랄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에게 비춰진 제사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희생제사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해 놓은 것일까요? 희생제사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새크라멘트. 성례전. 이것은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게 끔 하는 거룩한 장치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숨은 사랑이 아니라 ‘보이는’ 사랑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세요!”(요일 3:18). 희생제사는 사랑의 새크라멘트입니다. 희생제사는 사랑이 드러나는 장치입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희생제사에 쓰이는 제물들은 그 당시 농부와 유목민들의 생계였습니다. 가축이나 곡식, 열매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들은 자신이 바치는 제물을 사랑했습니다.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제물로 바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곧,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제물을 빼고 다시 진술하면, 희생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은 주는 것, 헌신, 내어줌, 나눔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희생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희생제사는 히브리어 ‘코르반’과 ‘레하크리브’가 합쳐 생긴 말인데, ‘가까이 다가오다’,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희생은 관계를 굳세게 만드는 가장 좋은 접착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시대는 희생이 희귀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두 자기 것을 챙기느라 남을 희생시키지, 자기를 내어주어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희생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입니다. 희생이 없다 보니, 서로의 관계가 가까워지지 못하고 멀기만 합니다. 이런 시대에 레위기의 희생제사를 묵상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합니다. 희생(헌신, 내어줌, 나눔)을 통해, 사랑받고 사랑하는, 따뜻함에 삶이 스며들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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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23. 9. 15. 04:51

[괴물]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죽어야 하는 괴물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자라야 하는 괴물*

 

괴물이 괴물을 모은다

사람이 되려면 서로 안부조차 묻지 않아야 하는데

괴물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괴물이 모여 하늘로 승천하려고 한다

하늘로 승천하는 괴물을

하느님은 보우하실까

 

하늘이 높고 눈부셔서

만세를 부른다

 

승천하는 괴물들이

서로 흘려대는 침과 피를 먹는다

 

이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괴물들의 똥뿐이다

 

 

* 이 문장들은 이영주 시, '숙련공'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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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9. 14. 05:36

희생제사를 위한 기도

(레 1:1-9)

 

주님,

희생제사의 의미를 밝히 보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희생제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헌신하는 것이고, 내어주는 것이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희생, 헌신, 내어줌, 나눔이 줄었습니다.

곧, 사랑이 메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하다’, 건강하다’, ‘좋다’라는 생각보다는

고통만 늘어갑니다.

주님,

오늘 레위기의 희생제사에 대한 귀한 말씀을 들은 우리부터

마음을 고쳐 돌이키게 하셔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몸을 바쳐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을 바쳐 희생하며 사랑하게 하시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기꺼이 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이 고백이 입술만의 고백이 되지 말게 하소서.

희생과 헌신과 내어줌과 나눔으로

사랑이 꽃피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3. 9. 14. 05:30

[지옥]

 

신성함이 녹아내리고

신비로움이 녹아내리고

마침내, 생명이 녹아내리고

우리에게 남은 건, 그래,

새하얀 거짓말, 같은,

납작한 현실, 거기에 모두 짓눌려 죽어가는

손가락과 손가락은

점점 멀어지고,

잘려나가고,

결국, 우리는,

결코,

손을 맞잡을 수

없는,

지옥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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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지배질서와 사건]

 

수학, 시, 정치, 사랑.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혁명적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지배질서'를 거부하고, 뛰어넘는다.

 

한병철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히고 있듯이,

권력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권력은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지 않고 작동한다. 권력이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게 되면, 그때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게 된다.

 

지배질서는 법을 통해 체제를 만들어 놓고, 그 바깥에 나가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여 죄의식과 죄책감을 심으며 작동한다. 법 바깥의 일들은 모두 '불가', '불허'로 규정한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은 금지되고 배제된다.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사건은 불가능한 것, 불허된 것을 파고든다. 지배질서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바르트는 말씀을 '사건'으로 보았다. 바디우의 사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은 인공세계(지배질서)의 바깥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 그래서 금지되고 배제된 것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이 '말씀이다. 말씀은 사건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지배질서는 소크라테스를 규정하기를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라고 했지만, 이것은 지배질서의 언어에 불과하다. 지배질서에 의문을 품게 하고 도전하게 하고 전복시킬 수 있는 '혼'을 불어넣는 것, 지배질서의 입장에서는 '타락'이지만, 이러한 '타락' 없이 어떻게 세상이 바뀌겠는가.

 

지배질서에 봉사하는 것은 경건하고 온건한 것이고, 지배질서에 맞서는 것은 타락하고 불온한 것이라는 '이념'이 이미 우리 안에는 권력처럼 자리잡고 있다. 지배질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그 질서를 벗어나면 큰 일 날 것 같은 불안감과 죄책감을 심어주면서.

바디우는 철학자이므로, 혁명적인 것의 범주를 수학, 시, 정치, 그리고 사랑으로 제한했다. 신학자는 여기에 혁명적인 것을 하나 덧불일 수 있다. 신앙. 혁명적인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수학, 시, 정치, 사랑, 그리고 신앙.

 

좋은 신앙과 그렇지 못한 신앙의 차이는 혁명적이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다. 다른 말로, 지배질서에 저항하느냐, 아니면 지배질서에 봉사하느냐에 있다. 신앙이 수학보다, 시보다, 정치보다, 사랑보다 못하면 부끄러운 것이다.

 

도덕과 윤리는 지배질서에 봉사하지만, 신앙은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면서 지배질서에 도전한다. 그래서 신앙은 그 시대의 바로미터이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봉사하지 않는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저항한다. 지배질서가 신앙을 우숩게 아는 사회는 질서를 가장한 악이 판을 치고, 지배질서가 신앙을 무섭게 생각하는 사회는 악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들더라도 눈치를 본다.

 

신앙인이여. 지배질서를 견뎌내는 데만 신앙을 쓰지 말고, 지배질서에 '사건'을 일으키는데 신앙을 쓰십시오. 사건이 없으면 지배질서는 태평성대를 누리며 생명을 마구마구 착취할 것입니다. 사건이 많으면 지배질서는 그것에 대응하느라 바빠서 정신을 못차릴 것입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 사건이 바로 메시아가 우리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지배질서의 전복은 그렇게 발생합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신앙을 버리지 말고, 신앙을 더 굳건히 가지십시오. 신앙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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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9. 5. 03:06

감사를 간구하는 기도

(출애굽기 20:1-17)

 

주님,

십계명의 의미를 좀 더 깊게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놓치기 쉬운 열 번째 계명의 참된 의미를 알고 나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명확하게 보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인생을 동료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순간마다 질투에 휩싸입니다. 남보다 못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정의하는 법을 배우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정의해 보니,

삶의 힘은 질투가 아니라 감사인 것이 드러납니다.

온갖 죄악이 질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정의하며 돌아보면,

우리의 인생은 온통 감사 뿐입니다.

주님, 거기에 참된 생명이 있음을,

거기에 참된 평화가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질투를 부추기는 세상에 저항하며,

감사로 이끄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사모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감사는 나의 힘!

주여,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9. 5. 03:04

쉐키나(주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

(출애굽기 24:1-11)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주님,

우리도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주님과 가까이 지내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문득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에게서 멀어졌는지,

부끄럽기만 합니다.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구원인데,

우리의 삶은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구원에서 멀어진 삶을 사는 듯합니다.

주님,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주님 곁으로 더 가까이 이끌어주소서.

그리고,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은혜로

할 수 있으면, 모든 이들과 가까이 지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삶에 구원이 넘쳐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이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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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9. 5. 03:01

나의 이름을 돌아보기를 간구하는 기도

(35:30-36:7)

 

주님,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주님을 내가 어떻게 경험하고 있고,

내가 주님을 어떻게 신앙고백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특별히 인생이 어렵고 힘들 때,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주신, 바로 그 이름이 우리를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들은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일 때

기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이미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지어진 성막을 그저 바깥으로 내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주여,

날마다 우리 마음에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고

주님이 얼마나 우리와 가까이 계신지 증언하는 쉐키나의 영성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두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주의 영광이 드러나며,

기쁨과 은혜가 넘치도록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온몸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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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