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4. 08:51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

(누가복음 2:20-40)


마지막 주일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주일과 마지막 날이 겹쳤다. 달력은 마지막 날을 가리키지만, 교회력은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다.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라는 뜻은, 우리는 아직도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성탄절은 25일 하루만 지키고 마는 행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우리의 시간에 새겨진 도장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언젠가부터 성탄절이 되면 한국에서는 타종교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거는 현상이 생겼다. 그리스도인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말을 쓴다. 그러면서, “예수님, 생일 축하해요.”라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이것은 성탄절에 대한 명백한 오해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기독교인들이 1225일을 성탄절(Christmas)’로 지키는 이유는 그날 예수님이 탄생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기독교 중에서도 다른 전통에 서 있는 동방정교회 같은 경우는 1225일이 아니라, 16일이 성탄절이다. 우리가 쓰는 달력은 1582년 그레고리오 교황이 만든 그레고리 달력이다.

 

로마제국의 전통을 계승한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쓰는 달력과 비잔틴 전통을 이은 동방정교회가 쓰는 달력은 다르다. 전통에 따라 계산법이 달라, 현재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12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지만, 동방정교회는 16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다. 우리는 성탄절을 이미 보냈지만, 동방정교회 입장에서는 아직 성탄절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날짜를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교회의 전통마다 성탄절의 날짜가 다른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또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성탄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부터 성탄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복음서보다 먼저 쓰여진 (바울) 서신서에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서신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죽음)와 부활, 그리고 재림이다. 이 말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이단은 영지주의자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실제 육신을 가진 분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잠시 이 땅에 왔다 하늘로 다시 올라간 존재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 전통 교리로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육신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이것을 부정하면,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다.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성육신을 부정했다. ‘성탄절 이야기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대응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입장에서, 타종교가 성탄절에 내거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는 복음의 왜곡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여느 인간이 탄생한 것처럼 축하 받을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 없이 예수님의 탄생 축하운운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신성모독이다. (물론 그러한 일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오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구약에 제시된 제사법을 잘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아들을 낳으면 팔일 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행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첫 (남자) 자식과 동물의 첫 수컷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대속이 필요했다 (13:2, 11-15, 8:16-17).

 

그러한 의식의 역사적, 신학적 근거는 출애굽 사건 때 일어난 유월절 사건이다. 출애굽 당시 열 번째 재앙은 애굽의 모든 사람이나 짐승의 장자(첫 새끼)를 죽이는 재앙이었는데, 유월절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와 첫 새끼들은 모두 구원 받는다.

 

그리고, 또 하나 등장하는 의식은 정결예식이다. 정결예식은 레위기 12장에 나오는데, 모든 산모는 아이를 낳은 후 산혈로부터 깨끗해지지 않으면 성전에 접근하거나 성물에 접촉할 수 없다. 산모는 일정 기간이 지나 성막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1년된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 혹은 형편이 어려우면 비둘기 두 마리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에는 할례와 정결예식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지는 것으로 나온다. 특별히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예식을 드리기 위해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했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대로 성전에서 할례와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갔다. 그런데,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27). ‘성경의 감동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선 아기 예수는 그곳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 한 명은 시므온이고, 다른 한 명은 안나이다.

 

시므온과 안나가 마침 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간 아기 예수를 만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경은 시므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1) 그는 의롭고 경건했다. 2)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3) 성령께서 그 위에 계셨다. 한 마디로, 시므온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 성숙한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을 유지한 신앙인이었다. (생명의 삶 플러스, 20171월호, 262)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이렇게 찬송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시는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

(이 말씀은 내가 성찬식 후에 기도드릴 때 사용하는 기도문 문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구원을 눈으로 본다.)

 

그리고, 이어서 아기 예수를 알아본 두 번째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안나다. 안나는 시므온과 다른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안나는 여자 선지자였고, 아셀 지파 출신이고, 나이가 많았다.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었더라. 과부가 된 지 84년이 되었거나, 나이가 84세이다. 어느 것이든, 그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나이다.) 그리고 안나는 성전에 머물면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한 안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한다.” 안나는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 드러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서 아기 예수와 조우한 시므온과 안나의 입술을 통해서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신앙고백을 한다. ‘아기 예수는 모든 이를 속량할 구원자, 즉 메시아이시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다. 그러니,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이다.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는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였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누구로 만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무엇, 또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무슨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들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세계의 수도 The Capital of the World>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거기에 보면, 탕자처럼 집 나간 아들과 그를 애타게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들을 찾을 수 없자, 아버지는 신문에 한 줄 광고를 낸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아버지는 신문광고대로 아들이 몬타나 호텔에 나와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갔다. 그런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호텔 앞에는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800명의 청년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에서 파코는 매우 흔한 이름이다. 그 광고를 보고 800명이나 모여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아버지와 화해하고, 위로받고 평안 가운데 살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용서 받고, 화해하고, 위로 받고, 평안 가운데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파코이다. 시므온과 안나도 그랬다. 그런데, 그들은 일생이 다 가도록, 그 어느 것에서 참된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인내하며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았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약속대로 죽기 전에 하나님의 위로(구원)’를 만났다. 그 위로(구원)는 바로, 아기 예수였다. 참된 위로와 구원을 만난 시므온은 마침내 평안 가운데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 그리고 안나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만난 뒤, 그 위로와 평안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전한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38).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탄절기를 보낸다. 성탄절기, 그리고 성탄절기가 자리잡고 있는 연말에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 두 가지의 감정을 뒤섞어, 먹고 마시며 논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의 삶에 대해서 묵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의롭고 경건하게,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았던 시므온.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던 안나. 그들의 신앙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 신앙인지 돌아보야 한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그리고 안나처럼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이 여느 한 인간의 축하 받아야 할 탄생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선,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위로와 구원의 성취라는 것을 깨달아, 우리도 시므온과 안나처럼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살든지 죽든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시므온과 안나의 신앙으로 함께 고백해 보자.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아멘.

 


기도문

 

주여,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탄절기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시므온과 안나의 경건한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을 본 받아,

우리도 그들처럼 이렇게 신앙고백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위로를 기다리는 자에게

구원을 기다리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안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위로와 구원을

세상에 전하며 사는

신실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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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