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병이어 이야기와 배고픈 목사

 

이 탐욕의 시대에 목사는 참 배고픈 사람이다. 탐욕이 샘솟을 때, 나는 번민하게 된다. 탐욕을 부추기는 '광고'들은 마치 사탄 같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탐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굴복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다행이다. 너무 멀리 떠나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어, 더 이상 나에게 탐욕이 작용하지 않는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무리들을 먹이시는 이야기가 두 개 나온다. 하나는 '오병이어' 이야기, 다른 하나는 '칠병이어' 이야기이다. 나는 이 두 이야기 중 '칠병이어'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서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8:2-3).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무리들은 그저 해가 저물어 배가 고팠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칠병이어의 이야기에서 무리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느라 며칠씩 굶었고, 너무 멀리, 광야까지 따라 나왔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칠병이어 이야기에서 예수를 따라 광야까지 나온 무리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도 어쩌다 보니 (물론 부르심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라는 신앙고백이 있지만) 예수를 광야까지 따라 오게 됐다. 이젠 너무 멀리 떠나와서 되돌아 갈 수도 없다. 이제, 이 나이에, 내가 목사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른 것을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기쁨과 유익을 주겠는가.

 

광야까지 따라 온 무리들에게 오직 희망은 예수 외에는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품은 희망을 꺾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를 통해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다. 일곱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넉넉히 먹이신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어, 이 탐욕의 시대에 탐욕조차도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는 신세에 처해진 나 같은 사람에게 칠병이어의 말씀은 힘이요 능력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니,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기에 이 말씀이 힘이요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돌아갈 수 있는 곳까지만 따라 나선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힘들고 어려워 애굽의 고기가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겠다고 패악을 저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 인생을 살겠는가. 어차피 길 떠난 인생이라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가서 그 무엇도 나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져, 가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그 무엇'에게 던지는 것이 멋진 인생일 터.

 

나는 예수를 따르다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이른 '배고픈 목사'.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