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1. 21:21

선물이며 과제인

에베소서 4:17-32

 

이방인. 심경이 복잡해지는 단어이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방인처럼 살지 말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의 이방인은 유대인과 대조되던 이방인(Gentile)이 아니다.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었다는 것을 할 때의 이방인이 이제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교회’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방인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변한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지칭하는 에베소서의 용어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시대정신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유하면, 역사 속에서 경험했듯이, 우리는 차별과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무자비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outsider’ 또는 ‘stranger’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방인은 어느 시대에서나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사실, 초기 기독교 시대, 즉 로마시대에 이방인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이방인으로서 엄청난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이방인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차별과 폭력을 가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그래서 ‘이방인’이라는 딱지가 무서운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처지에 놓이지 않기 위하여, 즉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법적 지위를 부여받아 ‘시민’으로서 보호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면서 기독교인이 로마 사회에서 이방인이 아니고 주류인이 되었을 때 오히려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면서 그들에게 차별과 폭력을 휘둘렀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에베소서에서 ‘이방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에 대하여 복잡한 심경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에 도덕적 심상(image/이미지)을 담는다. 가령 흰색은 좋은 심상(이미지)을 가지고 있고, 검정색은 나쁜 심상(이미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천사는 흰색으로 표시되고(흰옷 입은 천사), 악마는 검정색으로 표현된다. 낮(흰색)은 좋은 것으로 인식되고, 어둠(흑색)은 나쁜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심상은 우리의 실제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심상에 사로잡혀 인종차별에 가담하게 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심상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경의 용어를 정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에베소서에 등장하는 ‘이방인’이라는 용어를 우리는 신학적으로만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방인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현실 사회에서 소비하게 되면 기독교인은 아주 쉽게 차별과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 그렇게 차별과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자가 되었노라고 말하는 무뢰한들이 되기 십상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방인은 신학적인 용어이다.

 

본문에서 이방인과 짝을 이루는 용어는 ‘옛 사람’이다. 이방인’이나 ‘옛 사람’이 가리키는 신학적 상황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이라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드라마틱 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이야기’이다. 또한 룻기서도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탕자의 이야기도 룻기서의 이야기도 아주 눈에 잘 보이게, 드라마틱하게 묘사한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테마인 ‘좀비 이야기’도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삶’(인간성의 상실)이 어떤 삶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스윗 홈(Sweat Home)’이라는 드라마는 우리 인간의 내면의 욕망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주 잘 묘사한 웰 메이드 드라마(well made drama)였다. 그 드라마에서 인간이 좀비(또는 괴물)로 변하는데, 그 설정이 매우 독특했다. 드라마 스윗 홈에서의 좀비는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내면의 욕망에 따라 그것이 극대화되는 형상을 가진 좀비로 변한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욕망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을 눈으로 보이게 형상화시킨다면 그처럼 ‘괴물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소위 이방인의 삶, 또는 ‘옛 사람’의 삶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8-19절) 이것을 정리하면, ‘영적 무지, 영적 죽음, 도덕적 타락과 방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어떠한 모습인지, 실제로 알기 쉽지 않다. 이것을 드라마도 눈에 보이게 표현하라고 하면, 작가나 PD마다 다 다를 것이다. 요즘 좀비를 표현하는 것이 드라마마다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소위 이방인의 삶, 또는 ‘옛 사람’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러한 삶이 무엇인지, 에베소라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시대에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은 무엇일까? 그것을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사람마다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이 무엇인지 다르게 말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이 무엇인지 25절 이하에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윤리적 지침을 통해서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제시되고 있는 새 사람을 입은, 더 이상의 이방인이 아닌, 더 이상의 옛 사람이 아닌,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되어 새인류가 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돌아와 행해야 할 윤리적 행동들은 대략 6개 정도이다. 1)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 2) Anger 화를 내는 것의 문제 3) 자기 손으로 일하라 그리고 그것으로 남을 도우라 (도둑질 하지 말고 / 남의 것 가로채지 말고) 4) 선한 말을 통해 은혜를 끼치라 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6) 서로 용서하라

 

여기서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위의 윤리적 행동들이 새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된 이들의 필연적인 삶의 형태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말씀의 제목과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새 사람은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새 사람은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선물이며 과제’인 새 사람을 입고 이 세상에서 씨름한다.

 

정현종 시인의 <갈증이며 샘물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여기서 ‘너’를 ‘새 사람’으로 바꾸어서 다시 읽어 보자.

 

‘새 사람’은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새 사람’은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새 사람’은 내 속에서 샘솟는다

 

2천년 전, 에베소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스스로 많이 물었을 것이다. 에베소라고 하는 도시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것도 지금 시대와 판이하게 다르게, 완전 마이너리티(소수자)로서 에베소 지역에 횡행하던 종교관습과 도덕적 타락에 저항하며 온갖 불이익과 핍박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물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복음을 붙들고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도 있을 것이고, 평생 고민 속에서 어정쩡하게 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처음에는 복음을 붙들고 살다가 나중에는 에베소 지역의 관습과 문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 시대, 21세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새 사람’을 이미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선물’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법이다. 선물은 감사인 동시에 과제이기도 하다.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새 사람’을 입은 윤리적 삶에 대한 이야기로 좁혀서 이야기 해보자. 바울은 여섯 가지의 윤리적 삶을 말하고 있다. 1)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 2) Anger 화를 내는 것의 문제 3) 자기 손으로 일하라 그리고 그것으로 남을 도우라 (도둑질 하지 말고 / 남의 것 가로채지 말고) 4) 선한 말을 통해 은혜를 끼치라 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6) 서로 용서하라

 

이 목록을 현재 내 삶의 정황, 그리고 우리 시대로 가져와서 보면, 현재 내가 잘 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윤리적 지침에서만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에 주어진 윤리적 지침들은 그들 시대에 필요한 윤리적 지침들이었고, 우리 시대에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윤리적 지침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윤리적 지침들은 보편성을 갖는다. 아직도 우리의 삶에 유효한 윤리적 지침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윤리적 지침들은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다. 삶의 자리와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생명에 머무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변하지 않는 선물이다. 선물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과제가 주어진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삶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박노해 시인이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다시

ㅡ 박노해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새 사람’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박노해의 시를 이렇게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리스도인 속에 들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시작된다

 

다시

그리스도인만이 희망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많은 어려운 문제들과 마주 서 있다. 경제적 불평등의 위기, 너무 심각하다. 최근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앞다투어 우주여행 비즈니스를 론칭(launching)했다. 그들을 향한 미국 시민들의 여론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로 간 베이조스(아마존 창업자)를 다시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구호까지 내걸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억만장사가 된 것은 모두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는 악한 경제구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우주여행에 돈을 쓰기보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아마존 노동자들에게, 또는 지구 상에서 현재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에 돈을 쓰면 좋을 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은 꿈도 못 꿀 값비싼 우주여행 비즈니스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그런 것이다.

 

지금 시대는 ‘기후위기’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기후위기 다큐멘터리 <Breaking Boundaries>에 보면, 그 다큐의 주인공 스웨덴 과학자 Johan Rockström이 이런 말을 한다. “30년 전부터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다.” 여기서 ‘아무도’는 일반 사람들이라기 보다 정부들/관료들이다. 기후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는 이제 재앙을 돌이킬 수 없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지났다고 말한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예레미야가 떠올랐다. 기후과학자 Johan Rockström은 예레미야와 동일한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도 바벨론과의 국제정치적 위기 앞에서 남유다 왕국의 왕과 고관들에게 위기를 설파하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를 예언했다. 그러나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예레미야의 입을 막으려고 그들 구덩이에 던지고 협박했다. 그러나, 어떤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남유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기후위기가 무서운 것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듯이 기후변화 때문에 홍수가 발생하고, 산불이 일어나고, 가뭄이 발생하는 등 자연재해를 유발시키기 때문만이 아니다. 기후위기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급격하게 식량위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다 수온이 높아져 바다 생물이 줄어들고, 가뭄 때문에 농작물을 생산해 낼 수 없게 된다. 결국 인간이 맞닥뜨리게 될 가장 무서운 위기는 홍수, 산불,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아니라 식량의 부족사태를 경험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이렇게 저렇게 극복할 수 있지만, 식량이 부족해지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잃게 된다.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성 포위 이야기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일(오늘은 네 자식 잡아먹고, 내일은 내 자식 잡아먹고)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될지 모른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식량폭동이 발생하면, 개인의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끔찍한 총기 참사들이 걷잡을 수 없게 번질 것이다. (총 사야겠다!)

 

에베소 지역에 세워진 교회,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한 몸이 되어 세워진 에베소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해 ‘새 사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들은 그 과제를 안고 열심히 살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들과 동일하게 복음을 통해 ‘새 사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과제가 주어졌다. 그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구체적으로 다르지만, 그 본질에서는 같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을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삶으로 바꿀 것인가? 이런 저런 말을 하기 보다, 마지막으로 박노해 시인의 <나 하나의 혁명>이라는 시를 보면서, 우리의 과제를 갈무리 해보려 한다.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서는 것

이 지구 위 60억 인류 모두가 나처럼 먹고 쓰고 생활한다면

이 세상이 당장 좋아질 거라고

떳떳이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

 

내가 먼저 적게 벌고 나눠 쓰면서

덜 해치고 덜 죄짓는 맑아진 얼굴로

모두 나처럼만 살면 좋은 세상이 되고

푸른 지구 푸른 미래가 살아난다고

내가 먼저 변화된 삶을 살아 내는 것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그것이 희망의 모든 것이다

그것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천지간 나 하나 바로 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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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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