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 17:00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 난다

(요일 3:1-12)

 

1. 나는 개신교 목사이지만,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과 분리되면서 본의 아니게 잃어버린 여러 가지 좋은 전통을 아쉬워하는 사람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현재 개신교에서 행하고 있는 두 개의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이외의 다른 다섯가지 전통(견진, 고해, 성직, 혼인, 병자) 그 중에서도 고해성사를 잃어버린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성인들(Saints)을 기리는 일이다. 성례전이 축소됨으로 인하여 거룩(구별됨)의 영역이 좁아진 것 같아 아쉽고, 성인들을 추모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신앙의 유산이 부정되는 것 같고 신앙의 모범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다.

 

2. 종교개혁은 달력의 시간으로 1517년 10월 31일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종교개혁은 교회의 중요한 절기 중 하나였던 만성절 전야(Halloween/할로윈)에 시작된 일이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은 교회력 안에서 발생한 일이지, 그냥 달력 안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다. 교회력으로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이다. 중세 교회는 만성절 전 날, ‘Halloween’을 지켰다. 지금 우리가 크리스마스 전 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키는 것과 같다. 크리스마스 당일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기쁨과 즐거움이 더 크듯이, 만성절 보다 만성절 전야(할로윈)에 기쁨과 즐거움이 더 컸다. 그 기쁨과 즐거움 안에서 종교개혁은 시작된 것이다.

 

3. 개신교 문화가 강한 미국에서 ‘할로윈’을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제 할로윈은 기독교와 아무 상관없는 일반 문화가 된 듯하다. 한국에서도 할로윈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할로윈을 그저 무시무시한(spooky) 분장(costume)을 하고, 사탕 받으러 다니는 날 정로도 알고 소비할 뿐이다. 할로윈은 어느새 대목 장사의 날이 되어, 일 년 중 사람들의 소비가 가장 많은 날 중 하나로 자리 매김했다. 할로윈은 마치 자본주의의 자식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정말 안타까운 것이다. 할로윈은 무시무시한 분장을 하고 사탕 받는 날, 또는 엄청난 소비를 즐기는 날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에서 성인들(Saints)을 기리는 날이다. 그러면서 우리도 성인들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4. 성경의 등장 인물들 외에 기독교 역사에는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정말 많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다 간 신앙의 선배들이 정말 많다. 그들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처럼 살과 피를 가지고 이 땅의 슬픔과 고통, 역사적 질곡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킨 생생한 신앙의 모델이다. 살면서 삶의 롤모델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의 롤모델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삶과 신앙의 롤모델을 만나는 일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5. 개신교인들은 신앙의 롤모델 같은 거 다 필요 없고, 예수만 닮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굉장히 은혜로운(복음적인) 말 같으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처럼 모호한 말도 없다. 과정 없이 그냥 결론만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훌륭하게 되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훌륭한 사람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모, 또는 부모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 없이, 인간이 어떻게 혼자서 크며 인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좋은 선배들(성인들)을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보는 것, 그 선배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롤모델로 삼는 일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정말 유익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교회에서 직분(집사, 권사, 장로 등)을 받는 것도 교회의 일을 많이 하게 된다는 의미보다는 근본적으로 좋은 신앙의 모델로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가 깊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지만, 묵묵히 신앙의 자리를 지키며 후배 신앙인들에게 좋은 신앙의 롤모델로 성장해 가시라.)

 

6.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좋은 날인 ‘할로윈’을 세상에 빼앗겼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할로윈’을 할로윈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자체가 ‘만성절 전야제’라는 뜻인데, ‘할로윈’이 마치 세속화되고, 귀신에 물든 날인 것처럼 생각하여, ‘할로윈’이라 부르지 않고, ‘세인트 나잇(Saints Night)’이나 ‘할렐루야 데이’ 등으로 바꾸어서 부르며 할로윈을 개신교식으로 소비하려고 한다. 이것은 참 웃픈 일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좋은 전통을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사이에 세상이 빼앗아 가서 돈 버는 일에 쓰고 있다. ‘할로윈’이라는 말이 너무 더럽혀져서 이제 그 용어를 쓰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7. 사실 그러한 기독교 용어가 또 있다. ‘신천지’. 요한계시록에는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장엄한 종말론적 비전이 선포되고 있다. ‘새하늘과 새땅’을 한자어로 하면 ‘신천지’이다. 그런데, 이 좋은 용어를 이단에게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신천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는 마치, 새하늘과 새땅을 빼앗긴 기분이 들게 한다. 우리가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소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니, 그것을 누군가가 빼앗아가 더럽혔다. 용어를 빼앗기는 일은 땅을 빼앗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용어를 빼앗기면 우리는 그만큼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잃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동해와 독도 표기 문제/언어를 잃으면 삶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

 

8. 할로윈에 등장하는 온갖 무시무시한(spooky) 캐릭터들은 무엇일까? 만성절에 등장하는 온갖 더러운 귀신들(evil spirit)은 성인들(Saints)과 대조되는 모습을 지닌다. 귀신의 실체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귀신은 우리 인간의 보이지 않는 악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시무시(spooky)하고 어글리(ugly)한 외모를 가진 귀신(spirit)의 모습은 우리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 지를 눈으로 보이게 보여주는 것이다. 만성절의 무시무시하고 어글리한 외모를 가진 귀신은 일종의 시청각 교육인 것이다.

 

9. 요한일서의 할아버지는 이 세상의 존재를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사랑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서 할아버지가 사용하는 용어는 ‘죄(하마르티아)’와 불법(아노미아)’이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선교사들이 했던 일 중 가장 힘든 일은 전도가 아니라 성경번역이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귀가 따갑게 듣는 ‘죄’라는 용어는 기독교 용어가 아니라, 불교용어다. 선교사들이 불교 용어에 더 익숙했던 한국인(조선인)들에게 성경의 ‘하마르티아/영어의 sin’을 좀 더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서 택한 용어가 바로 ‘죄’이다.

 

10. 문제는 이 불교의 ‘죄’라는 용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을 다 담아내지 못할 뿐더러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죄’의 개념은 “도리(道理)에 반하는 행위, 계율을 어기는 행위, 또는 고의 과보(인과응보)를 불러올 악행”을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매우 관계적 개념이다. 한국의 전통 종교인 불교나 유교에서는 ‘신(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개념을 상정하지 않고 죄에 대한 것을 논하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에서의 죄는 법정적 죄의 개념이 크다. 그러한 죄의 개념은 몇 해 전 한국에서 유행했던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잘잘못을 따져 물어 천국과 지옥 행이 결정된다.

 

11. 기독교의 죄, 그리고 구원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의 죄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빌려온 불교의 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무늬만 기독교인이고, 알맹이는 불교인인 것이다. 기독교의 죄 개념은 매우 관계적(relational)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자.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간다. 자식을 잡아죽이는 일을 법정적 개념으로 보면 그것은 명백한 죄이다.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가야지 천국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던 행위를 통해서 오히려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는 온전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12. 요한일서에서 등장하는 죄와 대조되는 용어는 ‘사랑’이다. 죄는 관계가 안 좋은 상태를 말하고, 사랑은 관계가 좋은 상태를 말한다. 죄는 관계 바깥에 있는 것을 말하고, 사랑은 관계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죄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의인이다. 요한일서는 두 가지 종류의 죄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마르티아’라고 불리는 죄로서 관계 안에서 짓는 잘못을 말하는데, 그것은 회개함으로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를 말한다. 죄를 짓더라도 관계 안에서 짓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있다.

 

13. 그런데, 또 다른 죄의 표현인 ‘아노미아(불법)’는 좀 다르다. 이것은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 바깥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아노미아를 저지르는 이들은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 바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한다. 이런 자는 형제와의 관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즉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듯, 형제를 죽인다. 형제에게 악한 일을 행한다.

 

14. 요한일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요한 공동체를 괴롭혔던 두 가지 일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에서 떠난 이들이 생겨난 것(적그리스도)과 공동체의 일부 지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마귀의 자녀)이었다. 이것은 2천 년 전 처음 교회인 요한 공동체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의 교회에서도 발생하는 일이다. 교회를 힘들게 하는 두 가지의 일,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신앙고백 위에 서 있지 못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기독교의 사랑은 감정을 포함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종말론적 신앙의 행위이다.). 즉, 신앙과 사랑은 두 개의 다른 일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일인데, 신앙과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는 늘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15. 요한 할아버지는 굉장히 재밌고 명쾌한 말씀을 하신다. 한 마디로,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 난다’고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8-9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이 나는 법이다.

 

16. 요한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씨’가 거하는 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씨’는 ‘스페르마’라는 헬라어를 옮긴 것이다. 영어로는 보통 ‘seed(씨앗)’라고 번역을 하는데,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sperm(정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씨(스페르마)’이라는 표현 매우 강력하고 현실적인 표현이다. 부모의 생식기를 통해서 태어난 자녀들이 부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부모를 닮은 것처럼, 하나님의 씨를 통해서 태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를 품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랑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가 아니라, 즉 하나님의 씨를 품은 자가 아니라, 마귀의 씨를 품은 자가 되는 것이다.

 

17. 만성절에 등장하는 온갖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나기 전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무시무시하고 어글리한 귀신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으로 난 자들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귀신 같은 사람들(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즉 성인(Saints/거룩한 사람)이다. 성인들이 성인인 이유는 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기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인을 본받아, 귀신 옷을 입지 않는다. 우리는 거룩한 사랑의 옷을 입는다. 우리는 악을 행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행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씨를 우리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씨를 품고 사랑의 삶을 사는 것보다 생명력 넘치는 삶이 어디에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우재

    맞습니다. 저도 성인들의 모범과 전통을 개신교가 살려나가기를 바랍니다. 고백성사의 경우는 현재 개신교가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되네요.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2021.11.08 06:40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