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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설교2024. 6. 5. 06:29

고백적 시와 고백적 설교

 

신학의 언어는 고백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신학은 절대자에 대한 사랑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고백적이다. 한 존재를 향한 언어가 고백적이라면 그 사람은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다. 사랑에 빠진 모든 인간은 고백적인 언어를 쓴다. 고백적인 언어를 쓸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신앙은 절대자를 향한 사랑의 언어를 시도때도 없이 쏟아놓기 때문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고백에는 사랑의 고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시에서 배울 수 있다. ‘고백’(confession)이라는 용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발전시킨 이래 인간의 언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발전시킨 고백의 언어는 신학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문학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 종교적 고백은 신의 공동체로부의 고립, 자기소외, 불안과 불행, 고통스러운 자각과 죄의식, 회개와 죄의 공언, 신의 공동체로의 복귀와 자기동일성의 회복 등을 표현하는 수단의 성격이 강하다.[2] 종교적 고백시는 신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절대자와의 관계는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에 내적인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문학에서의 고백시는 자신의 내밀한 삶을 토로할 때 “시인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위기에 놓인 문명과 역사에 대해 말하기 위함”이다.[3]

 

1979년 『문학과 지성』을 통해 한국문단에 등단한 최승자의 시는 전형적인 고백시의 형태를 띄고 있다. 김승희는 최승자를 비롯한 여성 시인들의 시가 고백시적인 경향을 띄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1) 개인이 억압을 당하자 내면의 위기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고백적 성향이 부상하였다. 2) 1960년대의 순수/참여 논쟁, 1970년대의 민족문학 혹은 민중문학 논쟁에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개인’의 무의식이 고백적 목소리로 분출되었다. 3) 페미니즘 이론의 소개와 고백시의 번역, 소개 등에서 문화적 자극을 받아서 고백시가 나타났다.[4]

 

최승자 시의 고백적 성격이 담긴 몇 편의 시를 보자.

 

쳐라 쳐라 내 목을 쳐라. / 내 모가지가 땅바닥에 덩그렁 / 떨어지는 소리를, 땅바닥에 떨어진 / 내 모가지의 귀로 듣고 싶고 / 그러고서야 땅바닥에 떨어진 / 나의 눈을 감을 것이다

ㅡ 「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 『이 시대의 사랑』, 15.

 

옛날에 옛날에 / 애매와 모호가 살았는데 / 서로 싸웠다. / 너는 왜 그리 애매하냐고, / 그럼 너는 왜 그리 모호하냐고, / 둘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싸우며 죽어갔다. / 정신분열증과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며 죽어갔다.

ㅡ 「나날」, 『기억의 집』, 51.

 

최승자는 무한한 자기소외 경험하며 그 소외의 내적 심연을 시로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최승자의 고백적 언어는 단순히 자신의 내면 상태만을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내면 상태는 위기에 놓인 문명과 역사에 대한 반영이다. 최승자는 고백시를 통해 자기의 내면과 자기 바깥의 세계가 동일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설교할 때, 설교에서는 내면과 바깥의 동일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설교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고백적일 수밖에 없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를 향하여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에서의 내면은 교회이고 바깥은 세계이다. 설교가 고백적이라면 설교는 위기에 놓인 문명과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아픈 것은 단순히 교회 내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문명과 역사의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참아내고 이겨낸다. 그래서 아프다. 설교는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밝힐 필요가 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의 삶이 아픈 이유는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문명과 역사가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이것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교회는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어떤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할지, 무엇을 위해서 간구해야 할지 바르게 알 수 있다.



[1] 김정신, 『고통의 시쓰기, 사랑의 시읽기』 (서울: 아모르문디, 2019), 10.

[2] 송무, 「고백시의 성격과 의의」, 『영미어문학연구』 1집, 1984, 96-97.

[3] 김정신, 11.

[4] 위의 책, 15-16.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