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8. 29. 12:34

아덴에서의 사역

 

데살로니가에서 아덴으로 가는 여정은 바울에게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아덴으로 떠나야 했고,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기를 기다리며 아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고대 도시에서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광경을 목격하고, 마음 속에서 깊은 격분을 느꼈다. 성경 사도행전 17장 16절에서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다"라는 구절은 바울의 내적 갈등을 잘 보여준다.

 

아덴, 즉 아테네는 고대의 지식 중심지로서, 알렉산드리아와 다소와 더불어 세 개의 주요 대학 도시 중 하나였다. 바울 자신도 학문의 도시인 다소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시각이 변해 있었다. 그가 아덴을 보며 느낀 격분은 단순한 학문적 경멸이 아닌, 영적인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전에는 같은 학문적 기반을 공유했던 그가 이제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고, 아덴의 지성적 자랑이 우상 숭배로 변질된 모습에 실망했던 것이다. 이렇게 신앙은 뒤틀린 것을 보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그곳에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 보이게 마련이다.

 

우리도 현대 사회에서 아덴과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다. 실리콘밸리처럼 지성의 중심에 있는 도시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높은 기술력과 지식이 넘쳐나는 도시일수록, 그 속에 숨겨진 위험성도 함께 존재한다. 바울처럼 지식의 겉모습 뒤에 있는 영적 문제를 간파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도 각종 사회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헤치는 문제들을 간파하여 거기에 도전하는 신앙의 안목이 필요하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사역은 그가 다양한 장소에서 토론을 통해 복음을 전했던 방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한마디로, 바울의 아덴 사역은 ‘토론 사역’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유대 회당에서, 그 후에는 아덴의 시장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공식 토론장인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했다. 아덴은 지성인들로 가득 찬 도시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같은 철학자들이 그의 논의 상대가 되었다. 이 철학자들에게 바울의 복음은 매우 새로운 가르침이었으며, 그들은 예수와 부활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신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31절까지 기록된 아레오바고에서의 연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섬기던 다신교적 신 개념을 넘어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로서의 인간(우리는 그의 소생이라),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을 전했다. 이 연설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지만, 기록상 집약되어 있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바울은 아마도 더 길고 자세한 토론을 통해 이 개념들을 설명했을 것다. 핵심은 아덴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새로운 신 개념을 제시하고, 그들의 신앙을 재고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아덴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조롱했다. 그들에게 예수와 부활의 개념은 너무나도 생소했고, 그들의 철학적 사고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회심했다. 그 중에서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니시오스, 다마리라 하는 여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바울과 깊은 영적 교제, 즉 코이노니아를 나누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인간적 친밀함을 넘어서는 영적인 교제를 의미한다. 이 교제는 하나님 안에서의 예배, 그리스도의 성찬을 나누는 공동체적 연대, 물질적 나눔과 상호 섬김, 그리고 정서적 지지를 포함하는 관계이다. 바울의 아덴 사역을 통해 이러한 교제가 발생했으며, 이를 통해 아덴에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바울이 아덴에 도착한 것은 피난처럼 급하게 이루어진 여정이었으나, 그가 경험한 이 도시는 그의 사역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지적인 도시였지만, 그곳에서 바울은 철저하게 영적인 갈등을 느꼈고, 복음을 통해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철학자들과 토론하며 복음을 전했으며, 그 결과 몇몇이 회심하여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아마도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니시오스와 다마리라는 여자가 아덴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아덴에서 시작된 작은 코이노니아는 복음을 중심으로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바울의 끊임없는 전도와 사역이 결국 영적인 결실을 맺었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오늘날 우리도 바울이 아덴에서 한 것처럼, 우리의 지역에서 코이노니아의 깊이로 들어가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한다. 실리콘밸리라는 첨단 기술의 중심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영적인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이 아덴에서 했던 것처럼, 복음을 중심으로 한 깊은 영적 교제와 사랑을 통해, 이곳에서도 강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바울이 아덴에서 겪었던 경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우리 주변의 문화와 세속적 가치들을 꿰뚫어보며, 하나님의 진리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코이노니아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공동체를 세워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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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4. 8. 29. 12:22

차별에 맞서 싸우기를 간구하는 기도

(막 7:24-30)

 

주님,

대단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그 담대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자신의 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그녀가 한 행동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차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차별에 맞서 끝까지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낸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차별에 맞서 싸우고 싶습니다.

또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결국 차별의 벽을 허물기 위하여

수치와 모욕을 허용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의 일상에서 교묘하게 수행하는 차별의 행동을 거두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차별의 벽을 허물기 원합니다.

차별을 부추겨 자기의 이익만을 강구하는 이 시대에

이러한 따뜻한 말씀을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큰 은혜입니다.

우리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그리도 예수님처럼 차별의 벽을 허물고

당당한 인생,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차별을 온몸으로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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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8. 21. 10:08

고귀한 자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 바울 일행은 적어도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와 누가이다. 사도행전 17장은 데살로니가에 복음이 전해지고, 그곳에 교회가 탄생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복음이 전해지면 교회가 탄생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위대한 일이 복음이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지역에 대략 3주 동안 머물렀다. 3주 밖에 머물지 못했는데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기적이다. 이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사역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한 지역에 가면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먼저 전하고,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면 그 지역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는 갈등 상황 또한 일정한 패턴을 가진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과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기 질투하여 바울 일행을 죽이려 드는 유대인들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은 왜 시기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또는 구원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생각했다. 그런데 복음은 자신들의 전유물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상황에 적용해 보면, 열심히 일해서 모은 전재산을 빼앗기는 정도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하여 데살로니가 지역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겨우 3주만 머물렀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탄생에는 야손(Jason)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빌립보 교회’ 하면 루디아(Lydia)가 떠올라야 하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하면 야손(Jason)이 떠올라야 한다. 야손은 바울 일행을 환대(hospitality)했다. 야손은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내어놓았다. 이 때문에 야손은 곤란을 겪는다. 바울을 끌어내 관리들에게 데리고 가려했던 그 지역의 유대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들은 바울 대신 야손을 끌고 관리들에게 가서 그를 고발한다. 그 일 때문에 야손은 보석금을 물어야 했고, 다시는 바울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강압적인 약속을 해야했다. 이런 어려움 당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야손은 바울 일행을 환대했다. 환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 실천이다. 환대를 하면 그 환대를 통해 성령이 역사하신다. 창세기의 아브라함도 환대를 실천했을 때 이삭을 얻는 역사를 경험한다. 환대는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통로이다.

 

데살로니가 지역을 급히 떠나 바울이 당도한 곳은 베뢰아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 일행은 매우 특별한 용어를 사용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행 17:11). 한국어로 ‘더 너그러워서’라고 옮긴 말은 헬라어 ‘유게네스테로스’이다. 이는 ‘유게네스’에 비교급 ‘테로스’를 붙여 만든 용어이다. ‘유게네스’는 고귀한 자, 귀족, 고상한 출신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Eugene’이 여기에서 왔다. 한국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 ‘Eugene Choi’(최유진)였다. 선교사가 붙여준 이름이다. ‘위대하고 고귀한 자여!’ 드라마에서 ‘유진’(Eugene)은 이름대로 참으로 고귀한 삶을 산다.

 

바울 일행은 복음을 받아들인 베뢰아 지역의 사람들을 ‘유게네스테로스’라고 불렀다. ‘더 고귀한 사람들.’ 이 말은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비교한 것이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우들은 ‘고귀한 사람들’이고, 베뢰아 교회의 교우들은 ‘더 고귀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참 따뜻한 말이다. 고귀한 자. 귀족 같은 사람. 고상한 출신. 이것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차별적인 용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그 근방에 있던 베뢰아 교회의 교우들을 ‘고귀한 자’라고 불렀다.

 

이 호칭은 굉장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찬사를 받는 것일까? 약간의 실마리를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복음이 정말로 그런가를 탐구하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했다. 한 마디로, 이들은 복음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이런 진지함을 갖는 일은 쉽지 않다. 특별히 모든 것이 가벼워진 시대에, 복음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을 쉽지 않다. 우리 시대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베뢰아 교회의 교우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귀한 시대이다.

 

이들의 고귀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면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살펴보면 된다. 특별히,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 중 다음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Be joyful always, pray continually,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이것이 고귀한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기쁨이 있는 자.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만큼 고귀한 인생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쁨, 기도, 감사의 삶을 사자 고귀한 자이다. 고귀한 자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고귀한 자.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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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8. 21. 10:07

환대를 간구하는 기도

(막 6:30-44)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말씀대로 살기 원합니다.

우리는 때로 남이 해주길 바라고

모른 척 넘어가길 바라지만,

주님은 남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이것이 환대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환대는 주님이 역사하시는 귀한 자리인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주님의 은총으로 넘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환대를 통하여 공동체가 더 아름답게 성장해 나가는 것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바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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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자유가 자유가 아닌 세상]

 

21세기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 경제적 자유다. 이것을 헷갈리면 안 된다. 대통령이 말끝마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될 수 없다.

 

정치신학을 공부할 때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정치 사상가로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가 있다. 슈미트는 1923년 출간한 <로마 가톨릭과 정치적 형식>이라는 책에서 자유주의 정치를 비판하는데, 그가 간파한 당시의 자유주의 정치는 산업자본주의 체제의 산물로서 산업의 합리적 관리가 목표인 정치였다. 한 마디로, 자유는 정치 개념이 아니라 경제 개념이라는 뜻이다.

 

산업혁명 이래 자본주의가 사회의 근본 체제로 자리잡으면서 자유의 개념은 끊임없이 정치적 자유에서 경제적 자유로 그 의미가 변해왔다. 그러다 20세기말 대두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의 개념이 확고하게 드러났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공고해진 21세기에서 자유는 결코 정치적 개념이 아니다. 경제적 개념이다. 이것을 헷갈리면 안 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경제적 사고로 귀속시킨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자유는 경제의 창출, 즉 돈의 창출(이익의 창출)을 위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하는 '자유'를 최고의 이념으로 삼는다. 이 자유를 막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돈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 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처단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정치는 경제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정치란 정치의 고유한 영역이 없고 오직 경제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경제 앞에서 정치는 쩔쩔맨다. 경제를 잘 돌보지 못한 정치는 정치도 아니게 된다.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나 그 어느때보다 자유가 없어 답답해 하고, 자유가 없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세대는 왜 자신이 이렇게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운 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살다, 참다참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유'를 실행한다. 사실 그 행위는 자유가 아닌데, 신자유주의 체제의 압박에 내몰린 사회적 타살인데, 사람들은 그것이 그냥 자유로운 선택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이런 세상에서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자본을 독점하고 있거나, 또는 자본을 지키기 위하여 개처럼 봉사하는 부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말끝마다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자유를 지키겠다고 기득권에 부역하는 자들 또한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자유'는 감언이설로 포장된 '억압'일 뿐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하거든, 도망치라. 그 사람이 말하는 자유 뒤에는 덫이 있다. 우리는 지금 그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아우성 거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지옥에 살고 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Posted by 장준식

[교회와 세속화]

 

"그람시가 말하는 세속화란 모든 사회관계를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새로이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교회가 기존의 모든 지적, 도덕적 관계, 즉 지배계급이 축적/유지해온 사회관계의 총체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김항, <종말론 사무소> 16쪽)

 

그람시의 문제의식을 통해서 보듯, 서구사회에서 교회는 "지배계급이 축적/유지해온 사회관계의 총체"였다. 요즘 우리가 자주 하는 말로 옮기면, 서구사회에서 교회는 '적폐' 그 자체였다. 우리는 '세속화'라고 하는 말을 별로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서구사회에서 '세속화'란 적폐 청산을 위한 몸부림을 담고 있는 말이다.

 

서구의 세속화 논쟁은 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동시에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화'의 다름 아니다.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문명의 총아는 뭐니뭐니 해도 종교이다.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총아다. 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서구문명을 깊숙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서구사회에서 기독교의 위상과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기본의 모든 지적, 도덕적 관계, 즉 지배계급이 축적/유지해온 사회관계의 총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이 된 이후, 서구사회에서 기독교는 지배계급의 위상와 위력을 누리며 발전해 왔다.

 

종교만큼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종교는 지배체제를 성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에, 지배체제를 축복하는 순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듯, 그 지배체제는 신성화된다. 이는 지배세력이 종교를 등에 업으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과 몇몇 교단의 수장들은 새로이 대통령이 당선되면 '당선 감사예배'를 드린다. 보수 기독교 세력은 언제나 정부(특별히 보수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특별히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기독교의 뉴라이트 세력은 보수 정부가 들어선 요즘 대놓고 보수 정권을 지지하며 정부가 보수 정책을 펼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이는 그람시의 통찰에서 보듯, 한국 기독교가 스스로 적폐 세력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건이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 세력들은 지금까지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보수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배후에 외세의 압도적 지원을 업고 있는 것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392-393쪽).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보수당 국민의 힘은 노론에 잇대어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해, 한국에서 보수세력/지배세력의 역사는 500년이나 된 것이다. 이 500년 간의 지배세력 역사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한 것일까? 당선 축하 예배와 뉴라이트 세력의 득세를 통해서 한국 (보수) 기독교의 역할은 명확해진다. 한국 (보수) 기독교는 지배체제를 신성화시키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길지 않는 역사에서 서구 기독교의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 (보수)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적폐가 된 것이다.

 

이것은 복음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현상이다. 복음은 국가와 종교 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국가와 종교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힘이 잘못 쓰이면 국민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힘이 올바로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랄한 비판이 필요하다. 복음은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이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고단한 길을 걷는 이들이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임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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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8. 15. 06:03

빌립보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16장은 빌립보 교회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는 데는 세 가지의 사건이 연관되어 있다. 루디아와의 만남, 귀신 들린 여종을 해방시키는 사건, 그리고 감옥 사건이다. 교회가 탄생하는데 있어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을 통해 교회는 탄생한다.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는데 있어 처음으로 눈 여겨보아야 할 사건은 루디아(Lydia/리디아)와의 만남이다. 회당이 없던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기도 처소를 찾으러 강가에 갔다가 루디아를 만난다. 루디아의 만남 사건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문구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행 16:14)이다. 주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루디아의 집에 구원이 임하게 하신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서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야 교회를 나오기도 하는 것이고,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서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마음이 열린 루디아를 통해 빌립보 교회는 시작된다.

 

두 번째 사건은 귀신 들린 여종의 해방 사건이다. 루디아를 만난 것도 기도 처소를 찾으러 가다가 인 것처럼, 귀신 들린 여종 해방 사건도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발생한 일이다. 무슨 일이든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는 것은 뭔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신비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통로가 된다. 기도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낸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라고 한국어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를 그대로 표현하면, ‘퓌톤의 영을 가진 어떤 여자 노예’라는 뜻이다. 퓌톤은 오비디우스 신화에서 대홍수 후 대지가 만들어낸 괴물(뱀)으로 묘사된다. 그가 거주하던 산의 이름이 퓌토인데, 그 이름을 따 퓌톤이라고 불린다. 퓌토는 델피의 옛지명이다.

 

델피는 아폴로 신전이 있던 곳이다. 퓌톤의 영을 가진 여자는 아폴로 신전의 여사제로서 미래를 예언하는 일을 했다. 자신의 운명이 궁금했던 사람들은 델피 신전에 가서 퓌톤의 영을 가진 여사제를 통해 미래를 예언 받았다. 그런데, 델피까지 가지 않아도, 그 일을 하는 여자 사제가 빌립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자 노예는 매우 유용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이 여자 노예를 통해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 사제가 바울 일행을 가리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외쳤다. 이 외침은 바울 일행을 곤경에 빠뜨렸고, 참다 못해 바울은 그 여자 사제 안에 있던 퓌톤의 영을 쫓아낸다. 이 일로 여자 사제(여자 노예)는 억압과 학대와 착취로부터 해방되지만, ‘주인들’은 그 여자 노예를 통해서 얻던 이익을 박탈 당하게 된다. 좋은 수입원을 잃은 ‘주인들’은 화가 나서 바울 일행을 그 도시의 고위관리들에게 고발한다.

 

여자 사제 해방 사건 때문에 바울 일행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죄목은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하다.”(행 16:20-21)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이 이곳 빌립보 도시에서 불법을 행하고 있다는 고발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꼼짝없이 감옥에 갇힌다. 그런데, 매를 받고 갇힌 그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는 기도와 찬송을 한다. 같은 감옥에 있던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의 행동에 감동한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그들의 기도는 또 한번 신비한 사건이 발생하는 통로가 된다. 지진이 발생하여 감옥 구조물이 파괴되고 죄수들이 탈옥하기 용이한 상황이 발생한다. 감옥의 간수는 그 상황을 보고, 상부로부터 문책을 당해 처벌 받을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져 자결하려 든다. 그때, 바울은 크게 소리 질러, “우리 모두 여기 있으니 죽지 마시오!”하면서 간수를 위급한 상황에서 진정시킨다. 간수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간청한다. “선생님들이여(퀴리오이/주님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간수의 간청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 가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신앙으로서의 구원에 대한 영적인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아주 실제적인 의미이다.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하였을 때 어떻게 법적인 처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바울과 실라에게 쏟아 놓는다. 그리고 법적인 처벌을 면하려면 죄수들이 도망가지 않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텐데, 그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에는 이런 실제적인 요청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간구의 간절한 요청에 응답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간구의 요청에 적절한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예수를 믿는 영적인 구원과 더불어 아주 실제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의 기도와 찬송 소리를 듣고 감동한 죄수들을 다독인다. 도망 가면 간수가 처벌 받을 것이라고.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죄수들은 탈옥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 간수의 생명을 보존해 주었다.

 

이날, 간수가 받은 구원은 단순히 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예수를 믿어 영적인 구원을 받았어도, 죄수들이 탈옥했다면 간수는 상부로부터의 처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수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 구원은 이렇게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간수는 자칫 엄한 처벌을 받아 큰 화를 당할 뻔한 상황에서 구원 받았다. 그래서 간구의 기쁨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다.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나면서 아주 성숙하게 대처한다. 빌립보의 고위관리들이 직접 와서 바울 일행에게 사과하고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 만약, 바울이 이렇게 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감옥을 나왔다면, 빌립보에서의 전도는 그냥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불법적인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빌립보의 고위관리들이 직접 와서 사과하고 바울 일행을 풀어주었다는 것은 바울 일행의 행보가 불법적인 일이 아니며, 바울 일행의 활동을 생겨난 빌립보 교회는 불법적인 단체가 아니라 합법적인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영적인 기쁨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실질적인 기쁨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평생 선교 사역의 가장 든든한 후원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기도는 배신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기도를 통해서 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가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다. 반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기도가 있다.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 기도가 일구어 낼 역사와 뜻밖의 사건을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또한 서로의 삶을 세워주고 풍요케 하는 것도 중요하다. 구원은 단순히 정신 승리나 영적인 기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주 실제적인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관념적인 기쁨이 아니다. 아주 구체적이다. 기도하는 삶을 살면서 주님이 주시는 실제적인 기쁨을 경험하는 것, 이러한 삶 자체가 바로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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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8. 15. 05:57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

(막 5:21-43)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주님,

혈루증 여인이 가졌던 간절한 마음을

우리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간절함이 아니라 무력한 마음을 갖는 바람에

한숨과 불평만 입에서 나올 뿐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 앞으로 향하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님이 지금 바로 우리 앞에 와 계신 데도

우리는 주님의 옷깃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문제에 매몰되어 있어

눈을 들어 주변을 바라보지 못하고 삽니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하고 무시하고 꺼려합니다.

그렇게 무력한 삶을 살다보니

우리는 주님의 그 치유하시는 은총,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삽니다.

이 얼마나 큰 생명의 낭비입니까.

주님, 우리에게 야이로와 혈루증 여인의 말씀을 들려주셨사오니,

무력감 대신 간절함을 갖게 하시고

나의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길에 놓여있는

너의 문제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민족 시인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입니다. 학창시절 했던 국어 공부를 되돌아보면, 여기서 ‘님’은 ‘국가’를 의미합니다. 국가(나라)를 사랑하는 ‘님’에 비유해서 표현한 이 시 ‘님의 침묵’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정서를 깊이 반영한 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마도, 한용운의 시에서 절절하게 외치는 것처럼 ‘국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조건에서 국가만큼 중요한 것도 드뭅니다. 국적이 없으면 난민이 됩니다. 현재 유럽대륙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난민문제입니다. 얼마 전에는 유럽연합에서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앓다, 결국 난민법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죠. 일정 부분 난민들을 책임지는 방향으로 정책을 정했습니다. 난민 입장에서는 감사한 결정입니다.

 

나라를 빼앗기면 주권이 사라집니다. 한국은 이미 그 경험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주권 없는 ‘인간’으로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님의 침묵’처럼 애절한 노래도 부르게 된 것이죠. 그 당시 거의 모든 문인들은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소망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외에도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소설가이자 시인 김훈의 ‘그날이 오면’, 시인 이육사의 ‘광야’, ‘절정’ 등 수많은 작품들이 빼앗긴 국가, 주권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국가는 여전히 인간의 조건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좋은 나라를 세우는 일은 여전히중요합니다. 이와 더불어, 21세기에 들어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다”(한길사, 78쪽). 21세기에 떠오른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은 바로 ‘지구’입니다.

 

그동안 인류는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구는 그냥 인간이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자원’ 정도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앞두고 사람들은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을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기후변화 때문입니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인류 최초 기후변화 대책회의가 열립니다. 일명 ‘기구정상회담’(Earth Summit)입니다. 이와 발맞추어 한국에서도 1991년에 ‘녹색평론’이 창간되고, 이보다 앞서 1989년에는 ‘한살림선언’이 발표되고, 1993년에 김대중은 지속가능한 경제를 환경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할 것을 주문합니다. 환경 문제를 단순히 경제 성장의 부차적인 문제로 보지 말고, 경제 발전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생각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평범하고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단순히 ‘기후가 변화하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서 기후변화는 늘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21세기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는 이전 기후변화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기후변화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인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구원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문제'라는 것이죠.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변화 문제에는 인간의 온갖 죄악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인간의 ‘조건’인 지구가 고통받는 이 시대에 세상과 발맞추어 교회는 인간의 조건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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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8. 8. 04:05

좋은 땅을 간구하는 기도

(막 4:1-9)

 

우리에게 좋은 땅을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

희년이 실현되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배고프지 않고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

주님의 그 고마운 마음이 우리의 삶에 성취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좋은 땅을 갖고 싶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

흘린 눈물이

아프지 않고 부끄럽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때로 우리는 많이 속상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땅이

길가 땅, 돌밭 땅, 가시떨기 땅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럴 때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옵소서.

우리에게 좋은 땅을 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믿고

마음을 지켜 소망 가운데 땅을 일구어 나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복내려 주셔서

좋은 땅을 선물로 받아 결실을 많이 맺거든

그 기쁨을 아낌없이 나누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자 되어

주님께서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삶의 자리,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좋은 땅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바라나이다.

우리에게 좋은 땅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8. 4. 11:53

성령이 하시는 일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증언이다. 복음서의 특징은 예수가 누구인지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예수(삼위일체의 성자 위격)를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후대의 신학자들이다. 성경은 예수를 개념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개념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철학의 용어를 써서 언어로 존재를 규정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예수의 영)에 대한 증언이다. 사도행전의 특징은 예수의 승천 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성령이 누구인지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이나 모두 똑같이 예수와 성령을 개념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줄 뿐이다. 사실, 예수와 성령은 개념을 통해서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존재가 그렇다. 인간 존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어떻게 한 인간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규정할 수 있는가. 어떤 존재는 사건을 통해서 경험될 뿐이다. 그 경험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 존재를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나 성령이나, 우리가 주님으로 부르는 존재들에 대하여 성경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어떠한 공동체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교회는 이야기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야기 공동체이어야 한다. 교회는 성경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재료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공동체이다. 이야기가 많아야 좋은 교회이다. 이야기가 많아야 교회는 성장한다. 언제 어디서나 기쁘고 즐겁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 이야기를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성장하는 교회이다.

 

사도행전 16장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야기로 들려준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제1차 전도 여행지를 다시 방문하여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자 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들의 뜻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지역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워 나간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보면, 무엇보다, 성령은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사람에게 사람을 만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성령은 그 가장 중요한 일을 이루신다. 바울 일행은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난다. 디모데는 제1차 전도여행 때 전도했던 인물인 듯하다. 사도행전은 디모데가 어떻게 전도되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디모데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몇 년 사이에 제자가 될만큼 신앙이 성장해 있었다. 그런 디모데를 바울은 데리고 전도여행을 하고 싶어한다.

 

디모데를 만난 덕에 바울 일행은 사역의 역량이 늘었다. 역량을 늘리는 것은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역의 역량이 늘어난 바울 일행은 성령이 이끄신 새로운 선교지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갔다(5절). 사명을 수행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바울 일행은 회당을 찾아 기도하기를 원했으나, 그곳에는 회당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강가로 갔고, 거기에서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난다. 루디아를 만난 덕분에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고, 평생 사역을 하면서 빌립보 교회로부터 큰 도움과 위로를 받았다. 우리에게는 ‘도반’(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또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보면, 성령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신다. 인간은 구체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존재이다. 성령은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공간에서 활동을 해야 하는지 제시해 주신다. 바울 일행은 제1차 여행 때 갔던 곳을 다니며 교회들을 보살피려고 했다. 그들의 움직이고자 했던 방향은 시계방향이었다. 그런데, 성령(예수의 영)이 그들의 계획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는데,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더러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이었다. (행 16:9) 성령은 우리가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손과 발로 봉사해야 할지 알려주신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머무는 공간과 시간, 우리가 구체적으로 봉사하는 공간과 시간을 거룩하게 하신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보면, 성령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신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성령이 바울에게 알려주신 일이다. 성령이 알려 주시는 해야 할 일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일이다. 우리가 영어로 ‘ministry’라고 하는 용어를 한국어로는 사역, 목회, 사목 등으로 번역하여 부른다. 사역은 ‘구원하는 일’을 가리킨다. 교회에서 하는 일, 또는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은 모두 ‘사역’이라고 부른다. 사역은 헌신이다. 사역은 나를 내어주는 일이다. 사역은 마음, 시간, 물질, 노동력 등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거기에서 해방 사건(구원 사건)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자리에서 우리를 내어주어 구원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한 일을 그대로 따라하는 ‘따라쟁이’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명문대에서 학생을 뽑는 기준은 ‘기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서 기여할 줄 아는 사람이란 쓸모 있는 사람, 그리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뜻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관계 조율이 가능하고 동료와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부정의 분위기를 긍정의 분위기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성령을 통해 우리가 신앙인으로 세워지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과 잘 지내고, 동료 그리스도인과 잘 지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에 있든지, 부정의 분위기를 긍정의 분위기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사역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우리 모두 기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우리의 삶의 자리를,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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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8. 1. 07:50

강한 자를 결박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막 3:20-30)

 

주님

참으로 심오하고 도전적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작아집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은 이렇게 목숨 내놓고 하신 거룩하고 놀라운 일인데

우리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강한 자를 결박하기에 동참하기는커녕

강한 자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강한 자를 따라 나서고 있는 듯합니다.

주님,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도우시옵소서.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우리의 행복과 자유를 빼앗아가는 거대한 힘들 앞에서

때로는 무력하게 주저 앉아 눈물 흘리며 애통해 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었사오니,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우시고

삶에서 조금이라도

강한 자를 결박하신 주님을 도와

좀 더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일에 동참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강한 자를 결박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구원을 가져다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