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27. 06:09

예루살렘 공의회: 환대를 열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제1차 전도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귀환한 바울과 바나나 일행은 전도여행에서 이룬 성과를 교회 공동체와 나누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몸을 추스르며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어떤 무리들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한바탕 소동을 겪는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어떤 무리들은 안디옥 교회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 이방인들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 교우들은 이들의 한 수 ‘가르침’에 적잖은 반감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행 15:2).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진술이 그 당시 어느 정도의 충격적인 상황인지를 피부로 느끼려면, 우리 시대에 발생하고 있는 동성애 문제를 떠올리면 된다. 이게 보통 논란과 분쟁을 가져온 게 아니다.

 

율법의 문제는 바울 서신 곳곳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로마서에서도 할례와 절기, 그리고 음식 문제가 로마교회를 괴롭혔다. 로마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례, 절기, 음식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식별 장치처럼 작동했다. 이것은 구별인가, 차별인가. 구별과 차별은 맞물려 있다. 구별은 평등에 기반하지만, 차별은 차등에 기반한다. 구별은 ‘우리는 다르지만 나는 너랑 잘 지내고 싶어!’이지만, 차별은 ‘나는 너랑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너랑 밥을 같이 먹을 수 없어!’이다. 차별의 근본에는 구원의 문제가 깔려 있다. ‘나는 구원 받지만, 너는 구원 받을 수 없어.’

 

‘구원 받고 싶으면, 너는 나랑 똑같아져야 해!’ 배제와 차별, 그리고 폭력은 이렇게 발생한다. 우월감은 ‘나는 구원 받은 존재이고, 너는 구원 받지 못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병리적 생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 욕을 먹고 저항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구원을 둘러싼 우월감.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선교(전도)나 봉사는 시혜적(우월한 위치에서 베푸는 선행)이고, 폭력적(나랑 똑 같은 존재를 만들려고 하는 폭력과 억압)이다. 구원은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 전혀 아닌데, 구원이 차별의 조건으로 작동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폭력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율법의 문제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 큰 소란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것이 폭력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 진영 간에는 의견 충돌(dissension)과 공적인 논쟁(debate)가 있었다. 의견의 충돌이 있을 때 공적인 논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어떤 것을 결정하는 것은 폭력일 뿐이다. 초대교회의 양대 산맥,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이 논쟁적인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연다. 예루살렘 공의회. 이것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공의회이다. 공의회는 보편적인 신앙을 도출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공의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편 신앙을 위해서 열심히 모였고, 치열하게 논쟁했고, 권위를 확보하여 선포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발생하는 문제들도 이런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유대 그리스도 진영은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적용해야 할 법이다. 할례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전력이다. 만약 유대 그리스도인 진영이 보편적인 지지를 받았다면,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대략적으로, 돼지고기를 못 먹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이방 그리스도인 진영은 베드로의 증언과 바울과 바나나의 증언,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의 설득을 통해 의견을 표출했다. 이 중 베드로의 증언이 인상적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제자들의 목에 멍에를 메어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구원 받는다고 믿는다”(행 1:10-11). (We believe that we are saved through the grace of the Lord Jesus, in the same way as they also are.) 베드로는 구원을 말할 때 유대인을 중심에 놓고 말하지 않고 이방인을 중심에 놓고 말한다. 이게 정말 인상적인 증언이다. 그들(이방인들)이 우리(유대인들)처럼 구원 받는 게 아니라, 우리(유대인들)가 그들(이방인들)처럼 구원 받는다. 비교 대상을 자기들(유대인들)로 삼지 않고 그들(이방인들)로 삼았다. 기준이 ‘내’가 아니라 ‘너이다. 놀라운 고백이다. 그렇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는다. 구원은 선물이다. 선물이기 때문에 구원은 결코 차별의 준거가 될 수 없다.

 

격렬한 논쟁이 있은 후,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 사항을 공포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행 15:28-29). 이것은 모두 그 당시 성행하던 그리스-로마 종교행위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렇게 결정한 것의 속뜻은 ‘누가 주님인가’를 분명히 하는 신학적 조치였다. 로마제국과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이끄는 신앙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 결정은 즉시 안디옥 교회(이방인들의 교회)에 알려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환대가 열린 것이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추가적으로 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 구원은 환대이다. 주님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이다. 환대는 이런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 시대는 환대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자기랑 똑같지 않으면(신분, 외모, 배움, 소유 등)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랑 똑같아지라는 요구와 저 사람이랑 똑같아지려는 욕구만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주님의 환대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이 시대의 불의한 풍파에 휩쓸려 요구와 욕구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볼 일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차별 가득한 세상에 균열을 내야 한다. 요구와 욕구를 환대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요구와 욕구가 아니라 상대방(타자/이웃)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구원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환대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와 생명이 달려 있다. 우리는 잘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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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한국 신학의 위치]

 

서구(유럽)신학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신학이다. 그래서 때로는 안쓰럽고 애처롭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사회에서 종교(그리스도교)는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중세에 천하를 호령하던 그 기세와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개무시 당하게 된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보니, 서구신학은 옛영광을 그리워하며, 또는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또는 그나마 존재하는 조그마한 영광이라도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서구신학은 온갖 사회적 이슈와 연결을 지어 자기의 존재성을 호소하고, 세상을 향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유지하고 있는지, 또는 어떻게 사회 발전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애처롭다. 마치 사랑 받지 못하는 자가 사랑 받고 싶어서 내는 기죽은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에는 현실을 향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담겨 있다. 빈곤과 사회적 억압, 그리고 정치적 혼란을 통해 고통 받는 민중을 향한 애닮은 마음이 담겨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종교(그리스도교)는 서구사회처럼 무시 당하지 않는다.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지 않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서구신학처럼 인정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무력하다. 사회 정의를 외쳐도 좀처럼 변혁을 일구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 공허하다. 깊은 정말이 베어 있다.

 

서구신학과 라틴 아메리카 신학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신학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일까? 민중이 자취를 감추고, 이제 부르주아와 부르주아가 되고 싶은 사람들만 가득한 한국에서 신학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와 달리 다종교 사회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려 든다.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처럼 한 번도 크리스텐덤을 이룬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크리스텐덤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국사회에는 다른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사회 인식이 결여된 것이다.

 

한국사회는 서구화된 사회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속에 가깝게 묶여 있다. 한국인은 서구 문물을 소비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통시키고 소비한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 교회는 서구로부터의 "온갖 영향의 결과이며, 우리 속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발견한 게 아무것도 없다. 독창적이고 원래대로 명징한 게 아무것도 없다."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이 뿌리 내린 사회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무한경쟁 체제이다. 말이 좋아 무한경쟁이지, 결국 힘 있는 자(경쟁력 있는 자)가 힘 없는 자(경쟁력 없는 자)를 무한히 착취하는 구조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쟁력을 갖추려고 영혼을 갈아넣고, 경쟁력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경쟁자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경쟁에서 이기려고 종교를 이용한다.

 

그래도 한국은 아직까지 지정학적으로 극동 아시아에 위치해 있고, 인종적으로 아시아인이며,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서서히 서구화되긴 했지만, 문득문득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의심과 울분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한국신학은 서구신학과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과는 다른, 어디쯤에 놓여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처한 현실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신학은 다종교 사회 상황에서, 서구화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억눌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한국인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과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을 돕는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스펙타클'이 무엇인지 폭로하고, 스펙타클을 걷어내 사람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 인식을 가지고 '이건 아닌데...'라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음성을 듣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에서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이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교회에서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저모양이고, 한국사회가 저모양이라면, 성경은 믿을 게 못되고 공허한 것이고 쓸모없는 것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저모양이고, 한국사회가 저모양인 것은, 다행히도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오히려 밝다. 그리고 해야할 일이 너무도 명징하다. 성경을 정직하게 읽고, 성경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일, 그것이 우리들의 주어진 과제이고 사명이다.

 

다행히, 이런 자각과 노력이 곳곳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성경을 오용하고 남용하는(abuse) 무리들이 많지만, 그리고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그들이 아직도 교회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에 맞서 그리스도교의 위대함과 전복성을 제대로 알리려고 하는 '빛과 소금'같은 사람들이 많다.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교단과 상관없이 연대하여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을 도모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일이 더 많아지고 깊어지기를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25. 08:56

계시 없는 종교성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 여행은 열매가 많았지만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 이들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루스드라에 도착했다. 루스드라는 제1차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만난다. 바울은 그를 고쳐준다. 그쳐 준 이유는 이렇다.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행 14:9).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태도(attitude)였을 것이다. 물론 그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진실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겠지만, 그 모든 것이 태도였을 것이다. 태도는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태도는 배신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교육의 궁극은 좋은 태도를 갖는 것이다. 태도는 마음의 상태이다. 좋은 마음의 상태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도 결국 마음 상태이다.

 

참 좋은 일이 발생했는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무리들이 바울이 한 일, 즉 보행 장애자를 일으켜 세운 기적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를 신의 현현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예배하려 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14:11). 무리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생각했다. 무리들 눈에도 바나바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였나보다. 바울은 앞에 나서 말씀을 전했으므로, 무리들은 그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령사 헤르메스로 인식했다.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숭배는 진지했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

 

제1차 전도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일을 이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부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장애인을 일으킨 기적이 발생했고, 다음으로, 그 일을 통해 바나바와 바울을 향한 무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게다가,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은 반대자들에게 돌을 맞아 거반 죽을 뻔한다.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일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클라이맥스라고 부르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내가 루스드라 사역을 제1차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들을 예배하려는 무리들에 대한 바나바와 바울의 반응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을 신의 현현으로 생각하여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무리들을 보고 곧바로 옷을 찢는다. 유대인 전통에서 옷을 찢는 경우는 불경을 경험했을 때와 회개를 할 때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었다. 그들의 제사 행위는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에게 제사드리려고 한 무리들의 행위에 불쾌감을 느꼈다.

 

계시의 빛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어둠에 휩싸이니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것을 숭배하려 든다. 어둠에 휩싸이니 숭배 받고 싶어 한다. 계시의 빛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는 일에 넘어가 쾌감을 느낀다. 다시 말해, 계시의 빛이 없으면, 엉뚱한 것을 숭배하거나, 자기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 어느 쪽이든, 불경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계시다. 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둠에 휩싸여 엉뚱한 것에 마음이 빼앗겨 절하게 되고, 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둠에 휩싸여 자기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자기를 높이고 만다. 이것은 모두 생명의 파국을 불러올 뿐이다. 엉뚱한 것을 숭배하는 일이나 스스로 숭배 받는 일은 모두 교만이다. 교만은 심리적 용어가 아니다. 교만은 신학적 용어다. 교만은 엉뚱한 것을, 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교만이 가져오는 최고의 형벌은 자유의 박탈이다. 나의 바깥 것을 섬기는 것이나, 자기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내어놓는 것은 모두 자유를 빼앗기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계시)와 관련이 없는 것이 신(God)의 역할을 감당하려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불쾌감을 드러낼 줄 아는 영적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일 수 있고, 제도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어떤 제도가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어떤 국가가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우리는 단호히 불쾌감을 드러내야 한다.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와 관련이 없는 것이 신(구원자)의 역할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100%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 우리를 자기의 종(노예)로 삼으려는 개수작에 불과하다. 구원을 주겠다고 속삭이는 그 모든 것에 불쾌감을 쏟아 놓으라!

 

루스드라에서 큰 기적을 행하였지만, 또한 그곳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큰 박해를 받기도 했다. 바울은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들은 더베에서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며,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한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행 14:22). 믿음은 복음에 관련된 것이 아닌 것이 ‘구원자’를 자처하는 일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다. 계시가 아닌 것에 불쾌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믿음이다. 사실 우리에게 어쩌면 이런 믿음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계시가 아닌 것에 불쾌한 마음을 드러낸 믿음.

 

계시 없는 종교성은 눈에 보이는 것만 좆는다. 계시 없는 종교성은 쾌(좋은 것)만 있고 불쾌는 없다. 계시 없는 종교성은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오직 좋은 것만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속임수다. 너무 형통하고, 너무 평화롭고, 너무 평안한 것만 좆지 말라. 십자가 없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쾌만 있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7. 25. 08:53

희년을 살아내길 간구하는 기도

(막 3:1-6)

 

희년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베풀어 주신 주님,

예수께서 희년의 정신을 실제로 실행하신 것을 보며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희년의 은혜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자신의 존재로부터 멀어지고

뜻하지 않게 어딘가에 매어 자유를 잃어버리고

고통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우리의 현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주님,

우리에게 희년을 선포하신 그 은혜와 뜻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삶에 새기도록 도우시옵소서.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희년을 선포하는 믿음의 결단이 있게 하셔서

우리가 어쩌다 잃어버리고 사는 자유와 나눔의 삶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받은 생명과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땅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거룩한 진리가 회복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먹고사느라 서로가 서로를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지옥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서로의 생명을 보듬어 안아주는 평화의 세상을 열어 주소서.

우리가 희년의 은혜를 누리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 위에서 몸소 희년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좋은 설교란?]

 

정현종은 릴케의 시를 읽을 때마다, 릴케는 시를 통해 말을 한다기보다 깊이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릴케의 시 읽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현종은 좋은 시란 어떤 시인지 이렇게 말한다. "말로써 말이 많은 얄팍한 시가 있는가 하면, 말은 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시가 있는데"(두터운 삶을 향하여, 44쪽).

 

나는 유튜브 설교를 잘 듣지 않는다. 우리 교회도 내 설교를 유튜브에 올리지만, 일차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우리 교회 교우들을 위해 올리는 것이지, 다른 누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올리는 게 아니다. 유튜브는 1인 방송 시대를 열어 방송권력을 민주화시키는 데 공헌했지만, 반대로 거대한 미디어 홍수의 시대를 이끌기도 했다. 홍수가 나면 먹을 물도 없어지는 법이다.

 

나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면서, 인격적인 눈맞춤이 있는 설교를 좋아한다. 미디어를 통해 듣는 설교보다, 그냥 설교자와 대면하여 듣는 설교를 좋아한다. 그래서 유튜브 설교는 듣지 않는다. 이런 나의 습성 때문에 나는 이번에 산타클라라교회 집회를 통해 김기석 목사님 설교를 처음 들었다. 책을 통해서 만나고, 그리고 책 출간 때문에 몇 번 만나 뵙기는 했지만,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현종 시인이 위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릴케의 시와 같았다. 말은 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였다. 나는 지금 김기석 목사님을 '찬양'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니다. 한 설교자의 설교 행위가 얼마나 깊은지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늘 나의 설교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 같기를 바랬다. 이것은 정현종 시인이 릴케의 시를 통해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나의 설교가 '설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게 바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설교를 마치면 청자의 입장에서 내 설교를 들으며 모니터링을 한다. 부끄럽기만 하다.

 

좋은 설교란 말하는 설교가 아니라 듣는 설교이다. 좋은 설교란 설교로써 말이 많은 설교가 아니라 설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이다. 이러한 설교를 하려면 평소에 경청을 잘 하는 연습을 하고, 실제의 삶 또한 경청이 몸에 밴 삶을 살아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 하려면, 말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을 멈추고 경청하는 것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말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영혼의 깊이와 넓이를 기약하는 대단히 중요한 능력이며 따라서 삶과 세계를 두텁게 하는 능력이다"(두터운 삶을 향하여, 45쪽).

 

설교이되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있다는 것은 참 축복이다. 그런 면에서 김기석 목사님은 우리 시대의 큰 바위 얼굴이다. 물론, 여전히, 내가 앞으로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유튜브를 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격적인 눈맞춤이 없는 설교를 나는 듣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큰 바위 얼굴'이 되기 위하여 더욱더 유튜브를 끄고(전자기기를 끄고), 경청하는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 사람에, 책에, 시대에, 아픔에, 더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고, 그렇게 경청하여 얻는 선물을 설교에 녹여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설교이되 깊이 경청하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라는 고백을 받고 싶다.

 

이 시간, 가장 떠오르는 사람들은, 나의 부족한 설교를 매주일 들어주는 우리 교회 교우들이다. 이렇게 고마운 분들을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길, 그리고 이 부족한 사람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목회와 인내: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의 쓸쓸함]

 

1. 목회는 불가능하다.

 

2. 목회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설교의 불가능성을 말했다. 바르트는 설교를 말했지만, 동시에 목회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설교는 목회의 가장 큰 부분이니까.

 

3. 이제 와서 보니, 나는 목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목회자가 된 것 같다.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목회를 생득적으로 경험했지만, 목회자가 될 즈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목회가 무엇인지 정말 몰랐던 것이다.

 

4. 목회를 시작하며, 나는 외숙부이신 무불달 오세종 목사님께 참을 '인'자를 선물로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5. 나는 삼대째 목사다. 우리 집안에 목사가 엄청 많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목회자를 배출한 집안 일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에게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득적으로 안다.

 

6. 아버지의 목회를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았다. 무엇보다 부당한 일을 겪을 때마다 인내의 덕목은 큰 힘을 발휘했다. 인내는 교회를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

 

7. 우리 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간암은 집안 내력이긴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너무 참아서 간에 암이 생겨, 결국 참다참다 못해 돌아가셨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어떤 원망 같은 것은 결코 없다. 그냥 그렇다고 생각할 뿐이다.)

 

8. 나는 민수기를 좋아한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힘들고 어려운 일, 무엇보다 부당한 일을 당할 때 마다 지혜롭게 대처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목회자에게 민수기만큼 좋은 텍스트는 없다.

 

9. 목회자 집안에서 자란 생득적 경험과 민수기가 주는 지혜 때문에 나는 목회를 시작하며 '참을 인'을 선택했고, 그것을 선물로 받았다.

 

10. 그런데, 담임 목회를 20년쯤 해 본 결과, 왜 목회에 인내가 필요한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11. 목회는 불가능하다. 목회를 하면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목회는 불가능하다.

 

12. 그럼에도, 목회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이는 마치 버나드 쇼의 "The Show Must Go On"과 같다.

 

13. 목회는 삶을 닮았다. 그렇지 않은가? 삶은 불가능하다. 결국 아무리 발버둥쳐도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 목회와 삶을 닮았다.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래도 계속 진행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굴레와 같다.

 

14. 나는 이제 왜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인내'인지 알 것 같다.

 

15. 인내는 내가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 무엇보다 부당한 일을 참아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코.

 

16. 인내는 당장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언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17. 목회. 사람이 사람을 돌본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돕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좋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성스러워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미소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의 죄성을 온몸으로 껴안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18. 목회를 하면할수록 깨닫는 것은 단 하나이다. 목회는 불가능하다는 것!

 

19. 불가능한 일을 하는 사람의 고뇌는 불가능한 일을 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일까?

 

20. 목회는 쓸쓸하다. 불가능한 일을 해야 하는 운명 때문이다.

 

21.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목회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목회는 세상 최고의 아이러니, 십자가를 닮았다.

 

22. 목회를 시작하며, 철없이, 참을 '인'자를 요청하고, 선물로 받았으나, 이제 돌이켜 보면, 그것은 참으로 절묘한 요청이고 선물이었다.

 

23. 지금도 나는 부당한 일을 경험하더라도 잘 참는다. 하지만  무작정 참지는 않는다. 내 목표 중 하나는 아버지처럼 참고 또 참다 간암에 걸려 죽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간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다. 죽더라도 다른 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24. 하지만, 나는 인내한다.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다르게 인내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인내 없이는 목회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이다.

 

25. 나의 목회가 당장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바로 지금,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오늘 밭을 갈지 않으면, 오늘 씨를 뿌리지 않으면, 오늘 물을 주지 않으면, 열매는 결코 거두지 못할 것이다.

 

26. 하지만, 오늘 밭을 갈면, 오늘 씨를 뿌리면, 오늘 물을 주면, 당장 열매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열매가 있을 것을 믿는다.

 

27.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

 

28. 인생은 가뜩이나 쓸쓸한데, 목회를 하는 인생이니 그 쓸쓸함이 두 배다.

 

29. 쓸쓸함은 나의 무기다. 얼마나 큰 폭발력을 지녔는지 모른다.

 

30. 시방 나는 위험한 짐승이다.

 

31. 주님께서 이 무기를 선하게 쓰시기를!

Posted by 장준식

[스펙타클의 사회와 트럼피즘]

 

1. 나의 서재에 늘 펼쳐져 있는 책 하나가 있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나는 이 책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를 이보다 더 잘 분석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사회는 스펙타클 사회이다.

 

2.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피격 사건이 있은 후, 모든 매체는 트럼프를 조명하는 보도만 내보내고 있다. 바이든 이름은 쏙 들어갔다. 대선 국면을 맞아, 트럼프 피격 사건은 트럼프에게는 호재, 바이든에게는 악재가 되었다.

 

3. 트럼프 피격 사건과 트럼피즘은 기 드보르가 우리 사회를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명명한 것의 전형을 보여준다.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다음 테제로 시작한다.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매개 없이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

 

4. 두 문장 밖에 안되는 진술이지만, 그 깊이는 대단하다. 현대 사회는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여기서 진술하고 있듯이, 스펙타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삶은 '매개 없이 직접 경험하는 삶'이다. 몸소 체험하는 삶과 스펙타클의 삶은 다르다. 스펙타클의 삶은 모든 것을 표상 속으로 밀어 넣는다. 표상은 representation을 옮긴 말로, 머리속에 맺히는 상을 말한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용어이다.

 

5. 스펙타클의 삶은 사물과 직접 관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조적 삶 또는 관망적 삶이라고 부른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무슨 삶인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KPop 걸그룹을 떠올리면 좋다. 팬들은 그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조한다. 관망한다. 그들과 분리된 상태에서 그냥 그들에게 열광할 뿐이다.

 

6.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이 상품화된다. 사람도 예외없다. 상품이기 때문에 스펙타클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고 주목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성공한 상품은 잘 팔려 큰 이익을 가져다 주고, 여기에 실패한 상품은 그냥 폐기처분 된다. 스펙타클 사회에서 이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스펙'을 쌓는데 영혼을 갈아넣는다.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으면 죽음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7. 기 드보르의 테제를 몇 개 더 보자면 이렇다. "사회의 부분으로서 스펙타클은 특별히 모든 시선과 의식을 집중시키는 영역이다."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 "스펙타클은 오히려 물질적으로 표현된 하나의 실질적 세계관이고, 또한 대상화된 하나의 세계관이다." "스펙타클은 정보나 선전, 또는 광고물이나 곧바로 소비되는 오락물이라는 특정한 형태 아래 사회를 지배하면서 오늘날 삶의 전범을 이루고 있다."

 

8. 스펙타클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스펙타클이 시선과 의식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펙타클을 바라보느라,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이번 트럼프 피격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9.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전부는 아니겠지만)은 이번 트럼프 피격 사건에서 트럼프가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뜻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트럼프를 하나님이 미국을 위해 세운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래서 공화당 전당대회는 축제의 시간이었고, 주가는 오르고, 트럼프 피격 직후의 사진이 찍힌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스펙타클 사건이다.

 

10. 트럼프의 스펙타클 사건에 모든 시선과 의식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트럼프 피격 사건 때문에 유세 현장에 있다가 총에 맞아 죽은 피해자 가족에 대한 기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의 스펙타클을 가리는 그 어떠한 것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펙타클이 일어나고 있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묻혀야 한다.

 

11. 나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는 마태복음 2장의 이야기이다. 헤롯 대왕은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야기를 전해준 시점을 기준으로 두 살부터 그 아래 아기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마태복음 2장은 예수가 애굽으로 피난하여 목숨을 구한 이야기를 기록한 뒤, 헤롯 대왕의 이 명령 때문에 죽어나간 아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한 마디로, 베들레헴 경지에서 죽어나간 2세 이하의 모든 아이들, 이 죄없는 아이들은 예수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예수는 자신 때문에 죽은 이 아이들의 죽음을 알고 기억했을까? 예수는 이 아이들과 이 아이들의 가족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

 

12. 마태복음이 좋은 이유는 예수의 이야기를 스펙타클하게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마태가 예수의 이야기를 스펙타클하게 기록했다면 예수 때문에 죽은 무고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만 드러나야 하니까. 그러나, 마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와 베들레헴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같이 기록된다. 예수는 이들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 마음의 부채가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 위에 내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13. 트럼프 피격 사건은 전형적인 스펙타클 사건이다. 그리고 트럼피즘은 스펙타클 사회의 전형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정점을 보여준다. 트럼프는 스펙타클을 일으켜 사람들의 시선과 의식을 끄는데 귀재이다. 피격 사건을 당했으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고 'fight'을 외치며 보수세력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4. 스펙타클을 발생시키며 사회를 더욱더 스펙타클하게 만드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은 스펙타클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 스펙타클에 매개된 표상화된 현실만 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결단코 현실 왜곡과 현실 도피와 현실 파괴를 불러온다. 현실 속에서 고통 당하는 가난한 자들은 스펙타클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게 된다.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자는 더 잘 살게 되고,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부역하는 자들도 큰 이익을 취하게 되지만, 스펙타클에 가려진 현실 속의 가난한 자들은 무관심 속에서 더 큰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다.

 

15. 나는 이러한 상황이 너무 우려스러워 밤잠을 설친다. 이 시대의 예수 정신은 단연코 스펙타클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스펙타클의 바람이 너무 거세고, 여기에 아무 생각없이 휩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말조차 꺼내기 힘들다. 그랬다간,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지 모른다.

 

16. 교회는 스펙타클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교회론이다.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교회는 위험한 교회이다. 예수 정신을 따르는 게 아니라 스펙타클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17.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스펙타클의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리고 내 삶의 자리에서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고 그것을 막아 사람들이 표상의 세계에서 사는 게 아니라 몸소 체험하는 현실에서 살도록 이끄는 것이다.

 

18. 우리 주님은 스펙타클하게 죽은 게 아니다. 예수의 죽음을 스펙타클한 죽음으로 만드는 신학은 모두 가짜 신학이다. 그것은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제국에 부역하는 신학일 뿐이다.

 

19. 우리 주님은 스펙타클을 허물며 죽었다. 표상 속에서 죽은 게 아니라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가짜로 죽음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의 현실을 몸소 경험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자기 때문에 무고하게 죽은 베들레헴 지경의 아이들을 구원하는 죽음이고, 가난한 자들의 죽음을 신원하는 죽음이며, 모든 죄악을 죽이는 죽음이다.

 

20. 많은 이들이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위험을 깊이 알게 되길 바란다. 그래서 신앙의 이름으로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우매한 일을 벌이지 말고, 신앙의 이름으로 스펙타클을 물리치며 스펙타클로 인하여 망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7. 17. 07:19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기를 간구하는 기도

(막 2:13-28)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보면서

우리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묻힌 진실이 너무도 많습니다.

왜곡되고 뒤틀린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나는 그냥 지금 살만하다고 눈감고 살아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삶의 자리에서 조금만이라도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자리가 우리들로 인하여

조금만이라도 좋아지고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오르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우리들이 조금만 더 이해하며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잘 지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7. 17. 07:18

놀람으로 가득 차기를 간구하는 기도

(막 2:1-10)

 

우리의 삶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변화시켜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

우리는 질병 때문에

사회적 차별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마음의 고민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때문에

날마다 고통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려

이 모든 것을 치유 받고 해결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의 삶에 놀람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시고 주님께서 고쳐 주시며

주님께서 새롭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역사를 보면서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을 돌아봅니다.

십자가로부터 시작하여 놀람이 가득하고, 십자가로 끝나는 놀라운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오니,

주여 받아주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생명을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7. 17. 07:16

광야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막 1:1-20)

 

주님,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 그것은 우리의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우리는 복음을 듣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주님,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그저 뜨뜨미지근할 뿐이고

교회들이 책망 받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다시 돌아봅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내셔서

새롭게 신앙을 빌드업 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본분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소서.

그것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살리고

이웃과 이 세상을 살리는 길임을 잊지 말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14. 11:27

아낌없이 주는 구원

 

제1차 전도 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첫 번째 설교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회당에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다음 주에도 또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던 이유는 평소에 회당에서 듣던 랍비 전통의 말씀과 달랐기 때문이다. 랍비는 율법 이야기를 했지만, 바울은 사람(예수) 이야기를 했다. 랍비는 도덕 이야기를 했지만, 바울은 사랑 이야기를 했다. 랍비는 죄 이야기를 했지만, 바울은 은혜 이야기를 했다. 랍비는 특별한 선택에 대하여 이야기 했지만, 바울은 보편적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복음은 사람, 사랑, 은혜, 보편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되고 드러난 하나님의 호의(generosity)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아낌없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의 요청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 다음 주에 회당에 가서 더 풍성한 복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더 풍성한 복음 이야기가 전해지자 복음을 거부하고 싫어한 무리가 생겨났다. 누가는 그들이 ‘유대인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전했는데, 그들은 왜 복음을 싫어했을까? 누가는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젤로스)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시기한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복음은 이렇게 적대적 그룹을 드러낸다. 복음은 감추어진 잘못된 질서를 드러낸다. 사건이 발생하면 한 사람의 성품이 드러나듯이, 복음은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낸다. 유대인들이 전한 말씀은 결국 구원을 주지 못하고 죄책감을 주고 차별했다는 뜻이다.

 

성경에 의하면, 복음은 원래 유대인들이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요 4:22). 이것은 유대인들의 허세일까?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못말리는 부분이 있지만, 신약성경은 유대인의 특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의 담장을 넘어 보편 시민(이방인/세계인)에게도 전해졌다고 선포한다. 신약성경의 특징 중 하나는 복음을 제일 먼저 듣고 돌이켰어야 할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바울의 첫 설교 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발생한다. 유대인들의 복음 거부는 바울과 바나바의 폭탄 선언으로 이어진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니 복음이 이방인들(세계인)에게 갈 수밖에 없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한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이방인은 헬라어로 ‘에쓰네’이다. 워드 플레이를 좀 해 보면, 이방인은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원래 복음을 들어야 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으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제부터 자신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의 사도가 되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거부가 있었기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 때문에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탄생했고, 그로 인해 이방인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참 신비로운 일이다. 악한 것, 또는 안타까운 일을 선하게 사용하시는 지혜가 드러나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주는 권면은 이렇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 13:43).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한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권면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권면이었다. 그당시 로마 제국에 의해서 사람들은 지배받고 착취당하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에 협조하는 지배 세력에 의한 착취가 만만치 않았다. 빼앗기기만 하고 뭔가 채워지는 게 없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고 구원이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권면의 뜻은 “주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 주실 것이니 힘을 내라”는 위로의 말씀이었다.

 

우리 시대를 생각해 보아도 이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우리는 뭔가에 우리 자신의 삶을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사람들은 살아내느라 지쳐 있는 것을 본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고, 내가 나의 것을 잘 모아두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삶에서 낙오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살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존재하지 못하고 소유하느라 존재를 잃어버리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생명을 알뜰하게 챙기지 못하고 각자도생의 삶 가운데서 가까이 있지만 결코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살려고 애쓰는 이방인(에쓰네)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 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낌없이 주는 삶을 살라는 것을 말한다. 누가는 이러한 삶이 어떠한 삶인지 사도행전 2장에서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두려움과 부족함이 없도록 삶을 이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야 하는데 도리어 두려움과 부족함만 넘친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쌍하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다. 인류는 한 번도 하나님의 사랑이 정치 원리인 적이 없었다고. 대신에 두려움과 부족함이 늘 정치 원리였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정치 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을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탓에, 우리는 정치 원리가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매우 낯설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정치 원리로 작동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 이야기다. 이 나라를 이 땅 위에 가져오기 위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의 핏값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이 복음이 귀에 들리고 마음에 가 닿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낌없이 주는 구원이다. 주님께서 아낌없이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낌없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나누며 살자. 무엇이든지, 내가 가진 유무형의 모든 것을 아까워하지 말자.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구원의 삶이 될 것이고 이 세상은 구원된 세상이 될 것이다. 구원은 상상도 아니고 저 세상 이야기도 아니다. 구원은 오늘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낌없이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사는 것,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Posted by 장준식

[진화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유쾌한 진실]

 

그리스도인이 진화론을 신앙에 반하는 과학적 가설로 이해하고 반대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다. 진화론은 과학적 가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라고 말하는 게 좋다. 진화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이상 중세(medieval era)가 아니라 근대(modern era)라는 것을 말해주는 역사적 지표와 같다.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고정된 세계관이었다. 다른 말로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계층적 세계관이었다. 세상은 위계적 질서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존재하는 하이어라키는 그러한 질서의 반영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교황이 존재했고, 주교가 존재했고, 사제가 존재했고, 평신도가 존재했다. 교회의 구조는 위계적이었다.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관이었다. 그래서 중세 한국의 풍경도 위계적이었다. 왕과 귀족과 중인과 천민이 존재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그 위계를 지키는 것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살았다.

 

진화론은 근대의 개념이다. 근대가 더이상 중세가 아닌 이유는 세상을 더이상 위계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이 세상이 위계적이지 않다는 근대적 시각의 반영이다. 진화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존재는 한 위계에 갇혀 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그 존재가 변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롭게 근대/현대 신학을 진술하고자 했던 신학자들은 모두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신학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이상 중세를 사는 중세인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사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칼 라너를 들 수 있다. 그의 기독론은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그리스도론'이라 불린다. 라너에게 성육신 사건은 "단지 하나님이 위에서 인류에게로 내려온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진화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초월을 향한 내적 원동력의 실현"으로 여겨진다. (오늘의 신학과 신학자들, 128쪽)

 

그리스도인 중에 진화론을 문제 삼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도 중세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진화론의 표면적 의미에만 갇혀 있으면 진화론은 그저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는 불경한 과학적 가설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내면적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더이상 중세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살아가는 역동적 자유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화론이냐 창조과학이냐의 논쟁과 그것과 결부된 일련의 해프닝들은  정말 창피한 일이다. 공부가 짧다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고, 아직 자신은 중세를 살고 있다고 선포하는 미련한 고백이다.

 

칼 라너의 말처럼,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진화의 은총이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그 태생부터 진화론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고 있고, 우리는 그 나라를 향해 가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통찰처럼 모든 만물은 'becoming' 중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진화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갇혀 있는 세계, 위계적인 세계,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마도 그런 자가 있다면 이미 공중권세 잡은 자 뿐일 것이다. 그런 세계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자는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며 사람들을 착취하고 권세를 누리고 싶은 자들일 것이다.

 

존재의 역동적인 진화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답답해서 모두 멸망당했을 것이다. 진화론을 통해 이 세상은 갇혀 있거나, 고정되어 있거나, 위계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진화론은 해방과 자유이다.

Posted by 장준식

[공허함/Nothingness]

 

우리 인간의 공허함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창조 공간이다. 그 공허함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럴 때 비로소 공허함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사탄은 그 공허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라고, 채울 수 있다고 꼬드긴다. 현대 소비주의 사회가 사탄의 체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주의 사회는 인간의 공허함을 소비를 통한 상품으로 채우라고, 그것이 구원이라고 선전한다.

 

사람들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공허함을 채운다. 그러면서 만족하고 구원 받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 그 소비 구조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하고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소비를 통해 공허함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지칠 대로 지치고 물질 세계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다.

 

현대 소비사회의 사탄은 강력하여 인간을 꼼짝 못하게 결박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공허함은 무저갱이 되어가고 자연은 피폐해져 지옥이 되어 가고 있다.

 

오호라 곤고한 현대인이여, 누가 우리를 이 사망의 체제에서 건져내랴.

공허함을 직면하는 용기 있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공허함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누가 가서 이 진리를 전파할꼬.

누가 이 진리를 듣고 사탄의 결박을 끊어낼꼬.

 

밤은 깊고 해 뜨는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구나.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 저를 지켜주소서.

주님, 저를 보내소서.

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경계한 두 가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를 짚어보면 교회는 두 가지를 경계해 온 것이 보인다.

1) 반지성/반이성

2) 엘리트주의(엘리티시즘)

 

1) 교회는 언제나 합리적 신앙을 추구했다

안셀무스의 명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Faith seeking understanding."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성과 신앙은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서로를 보완해준다. 이성 없이 신앙이 존재하지 않고, 신앙 없이 이성이 존재하기 힘들다. 이성은 합리성을 확보한다. 합리성의 확보는 인간이 가진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대자적 존재이다. 대자적 존재란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 존재를 말한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 분리가 가능하다.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교회가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성을 통해 신앙을 이해하고 바라보고자 한 이유는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짐과 동시에 그래야만 건전한 신앙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합리성, 즉 한 발짝 물러나서 조망하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신앙은 그냥 자기 만족이나 자기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양이 되기 쉽다. 합리성이 결여된 신앙은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언제나 반지성/반이성을 경계해 왔다. 지성을 무시하거 이성을 거부하는 류의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 뿐 아니라 어느 신앙 체계라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지성과 이성을 거부하는 신앙체계는 사람들을 우매화시켜 통치하기 편하게 만들어 맹목적인 신앙인을 양산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신앙) 지도자는 그들을 착취하려는 악한 자이다.

 

맹목적인 신앙,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나쁜 신앙이다. 믿음은 합리성을 발판삼아 하나님께 도약하는 행위이지 합리성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말하는 자기 성찰은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성찰은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자기를 대자적 존재로 머물게 하여 신앙의 합리성을 확보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최고의 합리적 행위이다. 기도는 지성과 이성의 향연이다.

 

2)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

교회의 역사는 엘리트주의와의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두개파, 젤롯파, 에세네파, 그리고 바리새파는 모두 엘리트주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사두개파는 기득권자들로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젤롯파는 혁명을 꿈꾸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에세네파는 더러운 세상과의 분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바리새파는 아주 사소한 율법까지 지킬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등장한 첫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이다. 요한복음과 일반서신들에는 영지주의와 싸운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영지주의는 깨달음을 중요시했다. 영지는 감추어진 지식을 말한다. 감추어진 천상의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췄거나 아니면 특별히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지, 즉 감추어진 지식을 깨달았다고 믿는 자들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꼈고, 이는 곧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차별하는 근거가 되었다.

 

모든 이단 종파, 사이비 주교는 영지주의 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전형적인 레토릭이 있다. '비밀'이라는 말이다. 비밀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 종파나 종교 지도자는 대개 자신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을 지녔거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일례로, 신천지의 이만희 같은 경우도 자신이 성경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어떤 신령한 은사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경의 비밀을 들은 신도들은 자신들도 특별한 존재가 된 것같은 착각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전혀 엘리트가 아님에도 자신들이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래서 이단 종파는 더 강력한 조직력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는 언제나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도덕적 엘리트주의와 영지적 엘리트주의는 언제나 교회의 경계 대상이었다.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영지적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아니다. 죄인이란 뭔가 특별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그냥 수많은 제약과 연약함 속에서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주어진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존재론적 차별성을 즐기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의 삶이 전혀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 그래서 뭔가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신앙을 지성과 이성에 비추어 보며 합리성을 확보하여 평범해지려는 것이 좋은 신앙의 자세이다. 반지성/반이성은 믿음이 아니다. 엘리트주의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1. 00:53

바울의 첫 설교

ㅡ 부활이란 무엇인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된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사이프러스(구브로) 섬을 거쳐 소아시아 지역의 밤빌리아 버가 지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동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갑니다. 누가는 이유를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뭔가 좋지 않을 일이 발생한 것은 확실합니다. 나중에 제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바나바와 다른 루트로 전도를 나서게 된 이유는 (마가) 요한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 하고, 바울은 반대합니다. 결국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다른 루트를 따라 전도 여행을 나서고, 바울은 실라(실루아노)를 데리고 다른 루트를 따라 전도 여행을 갑니다. (마가) 요한은 베드로의 제자이자 통역사로서 사역을 감당했고, 나중에 마가복음을 썼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일어난 갈등을 보면 현실에서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쉬운 일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나바와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에 도착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은 그 지역에서 발생한 사역 이야기를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드디어 바울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 동안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나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는데, 사도행전 13장부터 바울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설교와 비교하기 딱 좋습니다. 스데반 설교는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며 아브라함 언약에 기대어 복음을 전했다면, 바울 설교는 출애굽에서 다윗 왕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며 다윗 언약에 기대어 복음을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장 초청으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첫 설교는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합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예수의 대적자로 강렬하게 등장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바나바에 의해 안디옥 교회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매우 궁금했을 겁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변했고, 바울은 첫 번째 설교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매우 궁금합니다. 신약성경에는 바울 서신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익숙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이 행한 첫 번째 설교를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 십상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설교를 장식하고 있는 용어들은 언약, 그리스도, 그리고 부활입니다. 복음을 이해하는데 이 세 가지 용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윗의 역사를 말하며 다윗 언약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를 세우십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우고,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그 위에 세워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삼하 7:12-14). 바울은 이 약속이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과 부활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예수를 가리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선포는 시편 2편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편 2편은 이스라엘 왕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선포하면서 사용된 말씀인데, 바울에게 여기서 ‘낳게 하심’은 부활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실 때 ‘낳다’라는 것은 생물학적 출생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낳다’(begotten)이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신학에서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말할 때 결정적인 용어기기도 합니다. ‘낳다’라는 말은 높아짐, 즉 영화롭게 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승귀/glorification)의 의미를 지닙니다. 부활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다윗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이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죽은 후 땅 속에서 썩었지만, 예수는 죽은 후 땅 속에서 썩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세워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죽었다 살아난 존재가 아니고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오시는 분이고 새로운 시대의 통치자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개벽(開闢)을 말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실천입니다. 부활이 가진 이러한 심오한 뜻을 알지 못한 채, 부활을 그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일로만 생각하면 그리스도 사건이 가진 충격과 전복성을 간과하는 것이 됩니다. 부활은 참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첫 설교에서 부활이 무엇인지를 밝히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죄사함이고 다른 하나는 의(righteousness)입니다. 죄사함은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한 것에 대한 해방을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여호수아에 나오는 라합 이야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현질서)에서 창녀였습니다. 그녀는 빚을 갚지 못해 여리고성의 질서에 따라 창녀로 전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리고성(현질서)를 함락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그곳에 세웠을 때 라합은 더 이상 창녀가 아니게 되었고 도리어 다윗의 조상으로 등극했습니다. 라합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하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주홍글씨가 가슴에 박힌 자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숨죽여 살기에만 바쁘겠지요. 그러나 그 정죄를 풀어주는 죄사함을 받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은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하는 것에 대한 해방이므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현질서에서 반복적으로 죄 지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근거로 삼으면 안 됩니다.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이렇게 현질서 안에서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을 죄사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사함은 현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힘입니다. 죄사함은 현실에서 죄의 부채를 쌓게 하는 값싼 은혜의 방편이 아닙니다. 죄사함은 현질서로부터의 해방이고 새로운 질서에로의 도약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십니다.

 

의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에서 우리는 의롭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 나라(하나님 나라)의 시민(citizen)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법적 지위를 가진 자는 당당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법적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적 통치 아래 합법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미국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시민권이 없는 자, 합법적인 체류 신분이 없는 자는 당당하지 못합니다. 뭔가 쫄립니다. 조심스럽습니다. 불의한 일을 당해도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했다가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의(righteousness)란 바로 이런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의로운 자는 당당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바울의 첫 설교는 복음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언약의 중요성,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선포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줍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부활을 너무 피안적으로 생각하고 부활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온 새로운 질서와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공중권세 잡은 자)이 보기에 굉장히 위협적이고 전복적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꾸 부활을 피안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부활은 죽은 다음에 발생하는 것처럼 왜곡시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불의한 질서에 대한 저항이고 전복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질서와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참으로 지축을 흔드는 하나님의 지혜요 위로입니다. 부활을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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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