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와 트럼피즘]

 

1. 나의 서재에 늘 펼쳐져 있는 책 하나가 있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나는 이 책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를 이보다 더 잘 분석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사회는 스펙타클 사회이다.

 

2.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피격 사건이 있은 후, 모든 매체는 트럼프를 조명하는 보도만 내보내고 있다. 바이든 이름은 쏙 들어갔다. 대선 국면을 맞아, 트럼프 피격 사건은 트럼프에게는 호재, 바이든에게는 악재가 되었다.

 

3. 트럼프 피격 사건과 트럼피즘은 기 드보르가 우리 사회를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명명한 것의 전형을 보여준다.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다음 테제로 시작한다.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매개 없이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

 

4. 두 문장 밖에 안되는 진술이지만, 그 깊이는 대단하다. 현대 사회는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여기서 진술하고 있듯이, 스펙타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삶은 '매개 없이 직접 경험하는 삶'이다. 몸소 체험하는 삶과 스펙타클의 삶은 다르다. 스펙타클의 삶은 모든 것을 표상 속으로 밀어 넣는다. 표상은 representation을 옮긴 말로, 머리속에 맺히는 상을 말한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용어이다.

 

5. 스펙타클의 삶은 사물과 직접 관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조적 삶 또는 관망적 삶이라고 부른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무슨 삶인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KPop 걸그룹을 떠올리면 좋다. 팬들은 그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조한다. 관망한다. 그들과 분리된 상태에서 그냥 그들에게 열광할 뿐이다.

 

6.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이 상품화된다. 사람도 예외없다. 상품이기 때문에 스펙타클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고 주목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성공한 상품은 잘 팔려 큰 이익을 가져다 주고, 여기에 실패한 상품은 그냥 폐기처분 된다. 스펙타클 사회에서 이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스펙'을 쌓는데 영혼을 갈아넣는다.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으면 죽음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7. 기 드보르의 테제를 몇 개 더 보자면 이렇다. "사회의 부분으로서 스펙타클은 특별히 모든 시선과 의식을 집중시키는 영역이다."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 "스펙타클은 오히려 물질적으로 표현된 하나의 실질적 세계관이고, 또한 대상화된 하나의 세계관이다." "스펙타클은 정보나 선전, 또는 광고물이나 곧바로 소비되는 오락물이라는 특정한 형태 아래 사회를 지배하면서 오늘날 삶의 전범을 이루고 있다."

 

8. 스펙타클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스펙타클이 시선과 의식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펙타클을 바라보느라,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이번 트럼프 피격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9.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전부는 아니겠지만)은 이번 트럼프 피격 사건에서 트럼프가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뜻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트럼프를 하나님이 미국을 위해 세운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래서 공화당 전당대회는 축제의 시간이었고, 주가는 오르고, 트럼프 피격 직후의 사진이 찍힌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스펙타클 사건이다.

 

10. 트럼프의 스펙타클 사건에 모든 시선과 의식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트럼프 피격 사건 때문에 유세 현장에 있다가 총에 맞아 죽은 피해자 가족에 대한 기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의 스펙타클을 가리는 그 어떠한 것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펙타클이 일어나고 있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묻혀야 한다.

 

11. 나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는 마태복음 2장의 이야기이다. 헤롯 대왕은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야기를 전해준 시점을 기준으로 두 살부터 그 아래 아기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마태복음 2장은 예수가 애굽으로 피난하여 목숨을 구한 이야기를 기록한 뒤, 헤롯 대왕의 이 명령 때문에 죽어나간 아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한 마디로, 베들레헴 경지에서 죽어나간 2세 이하의 모든 아이들, 이 죄없는 아이들은 예수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예수는 자신 때문에 죽은 이 아이들의 죽음을 알고 기억했을까? 예수는 이 아이들과 이 아이들의 가족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

 

12. 마태복음이 좋은 이유는 예수의 이야기를 스펙타클하게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마태가 예수의 이야기를 스펙타클하게 기록했다면 예수 때문에 죽은 무고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만 드러나야 하니까. 그러나, 마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와 베들레헴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같이 기록된다. 예수는 이들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 마음의 부채가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 위에 내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13. 트럼프 피격 사건은 전형적인 스펙타클 사건이다. 그리고 트럼피즘은 스펙타클 사회의 전형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정점을 보여준다. 트럼프는 스펙타클을 일으켜 사람들의 시선과 의식을 끄는데 귀재이다. 피격 사건을 당했으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고 'fight'을 외치며 보수세력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4. 스펙타클을 발생시키며 사회를 더욱더 스펙타클하게 만드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은 스펙타클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 스펙타클에 매개된 표상화된 현실만 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결단코 현실 왜곡과 현실 도피와 현실 파괴를 불러온다. 현실 속에서 고통 당하는 가난한 자들은 스펙타클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게 된다.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자는 더 잘 살게 되고,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부역하는 자들도 큰 이익을 취하게 되지만, 스펙타클에 가려진 현실 속의 가난한 자들은 무관심 속에서 더 큰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다.

 

15. 나는 이러한 상황이 너무 우려스러워 밤잠을 설친다. 이 시대의 예수 정신은 단연코 스펙타클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스펙타클의 바람이 너무 거세고, 여기에 아무 생각없이 휩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말조차 꺼내기 힘들다. 그랬다간,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지 모른다.

 

16. 교회는 스펙타클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교회론이다.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교회는 위험한 교회이다. 예수 정신을 따르는 게 아니라 스펙타클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17.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스펙타클의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리고 내 삶의 자리에서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고 그것을 막아 사람들이 표상의 세계에서 사는 게 아니라 몸소 체험하는 현실에서 살도록 이끄는 것이다.

 

18. 우리 주님은 스펙타클하게 죽은 게 아니다. 예수의 죽음을 스펙타클한 죽음으로 만드는 신학은 모두 가짜 신학이다. 그것은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제국에 부역하는 신학일 뿐이다.

 

19. 우리 주님은 스펙타클을 허물며 죽었다. 표상 속에서 죽은 게 아니라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가짜로 죽음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의 현실을 몸소 경험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자기 때문에 무고하게 죽은 베들레헴 지경의 아이들을 구원하는 죽음이고, 가난한 자들의 죽음을 신원하는 죽음이며, 모든 죄악을 죽이는 죽음이다.

 

20. 많은 이들이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위험을 깊이 알게 되길 바란다. 그래서 신앙의 이름으로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우매한 일을 벌이지 말고, 신앙의 이름으로 스펙타클을 물리치며 스펙타클로 인하여 망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7. 17. 07:19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기를 간구하는 기도

(막 2:13-28)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보면서

우리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묻힌 진실이 너무도 많습니다.

왜곡되고 뒤틀린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나는 그냥 지금 살만하다고 눈감고 살아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삶의 자리에서 조금만이라도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자리가 우리들로 인하여

조금만이라도 좋아지고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오르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우리들이 조금만 더 이해하며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잘 지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7. 17. 07:18

놀람으로 가득 차기를 간구하는 기도

(막 2:1-10)

 

우리의 삶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변화시켜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

우리는 질병 때문에

사회적 차별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마음의 고민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때문에

날마다 고통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려

이 모든 것을 치유 받고 해결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의 삶에 놀람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시고 주님께서 고쳐 주시며

주님께서 새롭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역사를 보면서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을 돌아봅니다.

십자가로부터 시작하여 놀람이 가득하고, 십자가로 끝나는 놀라운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오니,

주여 받아주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생명을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7. 17. 07:16

광야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막 1:1-20)

 

주님,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 그것은 우리의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우리는 복음을 듣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주님,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그저 뜨뜨미지근할 뿐이고

교회들이 책망 받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다시 돌아봅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내셔서

새롭게 신앙을 빌드업 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본분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소서.

그것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살리고

이웃과 이 세상을 살리는 길임을 잊지 말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