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6'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4.07.06 진화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유쾌한 진실
  2. 2024.07.06 공허함/Nothingness
  3. 2024.07.06 교회가 경계한 두 가지

[진화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유쾌한 진실]

 

그리스도인이 진화론을 신앙에 반하는 과학적 가설로 이해하고 반대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다. 진화론은 과학적 가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라고 말하는 게 좋다. 진화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이상 중세(medieval era)가 아니라 근대(modern era)라는 것을 말해주는 역사적 지표와 같다.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고정된 세계관이었다. 다른 말로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계층적 세계관이었다. 세상은 위계적 질서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존재하는 하이어라키는 그러한 질서의 반영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교황이 존재했고, 주교가 존재했고, 사제가 존재했고, 평신도가 존재했다. 교회의 구조는 위계적이었다.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관이었다. 그래서 중세 한국의 풍경도 위계적이었다. 왕과 귀족과 중인과 천민이 존재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그 위계를 지키는 것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살았다.

 

진화론은 근대의 개념이다. 근대가 더이상 중세가 아닌 이유는 세상을 더이상 위계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이 세상이 위계적이지 않다는 근대적 시각의 반영이다. 진화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존재는 한 위계에 갇혀 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그 존재가 변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롭게 근대/현대 신학을 진술하고자 했던 신학자들은 모두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신학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이상 중세를 사는 중세인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사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칼 라너를 들 수 있다. 그의 기독론은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그리스도론'이라 불린다. 라너에게 성육신 사건은 "단지 하나님이 위에서 인류에게로 내려온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진화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초월을 향한 내적 원동력의 실현"으로 여겨진다. (오늘의 신학과 신학자들, 128쪽)

 

그리스도인 중에 진화론을 문제 삼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도 중세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진화론의 표면적 의미에만 갇혀 있으면 진화론은 그저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는 불경한 과학적 가설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내면적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더이상 중세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살아가는 역동적 자유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화론이냐 창조과학이냐의 논쟁과 그것과 결부된 일련의 해프닝들은  정말 창피한 일이다. 공부가 짧다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고, 아직 자신은 중세를 살고 있다고 선포하는 미련한 고백이다.

 

칼 라너의 말처럼,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진화의 은총이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그 태생부터 진화론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고 있고, 우리는 그 나라를 향해 가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통찰처럼 모든 만물은 'becoming' 중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진화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갇혀 있는 세계, 위계적인 세계,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마도 그런 자가 있다면 이미 공중권세 잡은 자 뿐일 것이다. 그런 세계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자는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며 사람들을 착취하고 권세를 누리고 싶은 자들일 것이다.

 

존재의 역동적인 진화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답답해서 모두 멸망당했을 것이다. 진화론을 통해 이 세상은 갇혀 있거나, 고정되어 있거나, 위계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진화론은 해방과 자유이다.

Posted by 장준식

[공허함/Nothingness]

 

우리 인간의 공허함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창조 공간이다. 그 공허함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럴 때 비로소 공허함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사탄은 그 공허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라고, 채울 수 있다고 꼬드긴다. 현대 소비주의 사회가 사탄의 체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주의 사회는 인간의 공허함을 소비를 통한 상품으로 채우라고, 그것이 구원이라고 선전한다.

 

사람들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공허함을 채운다. 그러면서 만족하고 구원 받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 그 소비 구조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하고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소비를 통해 공허함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지칠 대로 지치고 물질 세계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다.

 

현대 소비사회의 사탄은 강력하여 인간을 꼼짝 못하게 결박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공허함은 무저갱이 되어가고 자연은 피폐해져 지옥이 되어 가고 있다.

 

오호라 곤고한 현대인이여, 누가 우리를 이 사망의 체제에서 건져내랴.

공허함을 직면하는 용기 있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공허함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누가 가서 이 진리를 전파할꼬.

누가 이 진리를 듣고 사탄의 결박을 끊어낼꼬.

 

밤은 깊고 해 뜨는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구나.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 저를 지켜주소서.

주님, 저를 보내소서.

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경계한 두 가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를 짚어보면 교회는 두 가지를 경계해 온 것이 보인다.

1) 반지성/반이성

2) 엘리트주의(엘리티시즘)

 

1) 교회는 언제나 합리적 신앙을 추구했다

안셀무스의 명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Faith seeking understanding."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성과 신앙은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서로를 보완해준다. 이성 없이 신앙이 존재하지 않고, 신앙 없이 이성이 존재하기 힘들다. 이성은 합리성을 확보한다. 합리성의 확보는 인간이 가진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대자적 존재이다. 대자적 존재란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 존재를 말한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 분리가 가능하다.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교회가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성을 통해 신앙을 이해하고 바라보고자 한 이유는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짐과 동시에 그래야만 건전한 신앙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합리성, 즉 한 발짝 물러나서 조망하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신앙은 그냥 자기 만족이나 자기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양이 되기 쉽다. 합리성이 결여된 신앙은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언제나 반지성/반이성을 경계해 왔다. 지성을 무시하거 이성을 거부하는 류의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 뿐 아니라 어느 신앙 체계라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지성과 이성을 거부하는 신앙체계는 사람들을 우매화시켜 통치하기 편하게 만들어 맹목적인 신앙인을 양산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신앙) 지도자는 그들을 착취하려는 악한 자이다.

 

맹목적인 신앙,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나쁜 신앙이다. 믿음은 합리성을 발판삼아 하나님께 도약하는 행위이지 합리성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말하는 자기 성찰은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성찰은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자기를 대자적 존재로 머물게 하여 신앙의 합리성을 확보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최고의 합리적 행위이다. 기도는 지성과 이성의 향연이다.

 

2)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

교회의 역사는 엘리트주의와의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두개파, 젤롯파, 에세네파, 그리고 바리새파는 모두 엘리트주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사두개파는 기득권자들로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젤롯파는 혁명을 꿈꾸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에세네파는 더러운 세상과의 분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바리새파는 아주 사소한 율법까지 지킬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등장한 첫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이다. 요한복음과 일반서신들에는 영지주의와 싸운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영지주의는 깨달음을 중요시했다. 영지는 감추어진 지식을 말한다. 감추어진 천상의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췄거나 아니면 특별히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지, 즉 감추어진 지식을 깨달았다고 믿는 자들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꼈고, 이는 곧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차별하는 근거가 되었다.

 

모든 이단 종파, 사이비 주교는 영지주의 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전형적인 레토릭이 있다. '비밀'이라는 말이다. 비밀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 종파나 종교 지도자는 대개 자신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을 지녔거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일례로, 신천지의 이만희 같은 경우도 자신이 성경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어떤 신령한 은사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경의 비밀을 들은 신도들은 자신들도 특별한 존재가 된 것같은 착각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전혀 엘리트가 아님에도 자신들이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래서 이단 종파는 더 강력한 조직력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는 언제나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도덕적 엘리트주의와 영지적 엘리트주의는 언제나 교회의 경계 대상이었다.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영지적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아니다. 죄인이란 뭔가 특별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그냥 수많은 제약과 연약함 속에서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주어진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존재론적 차별성을 즐기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의 삶이 전혀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 그래서 뭔가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신앙을 지성과 이성에 비추어 보며 합리성을 확보하여 평범해지려는 것이 좋은 신앙의 자세이다. 반지성/반이성은 믿음이 아니다. 엘리트주의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