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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1. 00:53

바울의 첫 설교

ㅡ 부활이란 무엇인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된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사이프러스(구브로) 섬을 거쳐 소아시아 지역의 밤빌리아 버가 지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동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갑니다. 누가는 이유를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뭔가 좋지 않을 일이 발생한 것은 확실합니다. 나중에 제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바나바와 다른 루트로 전도를 나서게 된 이유는 (마가) 요한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 하고, 바울은 반대합니다. 결국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다른 루트를 따라 전도 여행을 나서고, 바울은 실라(실루아노)를 데리고 다른 루트를 따라 전도 여행을 갑니다. (마가) 요한은 베드로의 제자이자 통역사로서 사역을 감당했고, 나중에 마가복음을 썼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일어난 갈등을 보면 현실에서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쉬운 일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나바와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에 도착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은 그 지역에서 발생한 사역 이야기를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드디어 바울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 동안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나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는데, 사도행전 13장부터 바울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설교와 비교하기 딱 좋습니다. 스데반 설교는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며 아브라함 언약에 기대어 복음을 전했다면, 바울 설교는 출애굽에서 다윗 왕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며 다윗 언약에 기대어 복음을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장 초청으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첫 설교는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합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예수의 대적자로 강렬하게 등장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바나바에 의해 안디옥 교회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매우 궁금했을 겁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변했고, 바울은 첫 번째 설교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매우 궁금합니다. 신약성경에는 바울 서신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익숙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이 행한 첫 번째 설교를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 십상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설교를 장식하고 있는 용어들은 언약, 그리스도, 그리고 부활입니다. 복음을 이해하는데 이 세 가지 용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윗의 역사를 말하며 다윗 언약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를 세우십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우고,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그 위에 세워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삼하 7:12-14). 바울은 이 약속이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과 부활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예수를 가리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선포는 시편 2편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편 2편은 이스라엘 왕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선포하면서 사용된 말씀인데, 바울에게 여기서 ‘낳게 하심’은 부활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실 때 ‘낳다’라는 것은 생물학적 출생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낳다’(begotten)이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신학에서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말할 때 결정적인 용어기기도 합니다. ‘낳다’라는 말은 높아짐, 즉 영화롭게 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승귀/glorification)의 의미를 지닙니다. 부활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다윗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이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죽은 후 땅 속에서 썩었지만, 예수는 죽은 후 땅 속에서 썩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세워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죽었다 살아난 존재가 아니고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오시는 분이고 새로운 시대의 통치자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개벽(開闢)을 말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실천입니다. 부활이 가진 이러한 심오한 뜻을 알지 못한 채, 부활을 그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일로만 생각하면 그리스도 사건이 가진 충격과 전복성을 간과하는 것이 됩니다. 부활은 참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첫 설교에서 부활이 무엇인지를 밝히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죄사함이고 다른 하나는 의(righteousness)입니다. 죄사함은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한 것에 대한 해방을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여호수아에 나오는 라합 이야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현질서)에서 창녀였습니다. 그녀는 빚을 갚지 못해 여리고성의 질서에 따라 창녀로 전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리고성(현질서)를 함락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그곳에 세웠을 때 라합은 더 이상 창녀가 아니게 되었고 도리어 다윗의 조상으로 등극했습니다. 라합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하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주홍글씨가 가슴에 박힌 자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숨죽여 살기에만 바쁘겠지요. 그러나 그 정죄를 풀어주는 죄사함을 받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은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하는 것에 대한 해방이므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현질서에서 반복적으로 죄 지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근거로 삼으면 안 됩니다.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이렇게 현질서 안에서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을 죄사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사함은 현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힘입니다. 죄사함은 현실에서 죄의 부채를 쌓게 하는 값싼 은혜의 방편이 아닙니다. 죄사함은 현질서로부터의 해방이고 새로운 질서에로의 도약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십니다.

 

의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에서 우리는 의롭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 나라(하나님 나라)의 시민(citizen)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법적 지위를 가진 자는 당당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법적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적 통치 아래 합법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미국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시민권이 없는 자, 합법적인 체류 신분이 없는 자는 당당하지 못합니다. 뭔가 쫄립니다. 조심스럽습니다. 불의한 일을 당해도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했다가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의(righteousness)란 바로 이런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의로운 자는 당당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바울의 첫 설교는 복음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언약의 중요성,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선포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줍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부활을 너무 피안적으로 생각하고 부활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온 새로운 질서와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공중권세 잡은 자)이 보기에 굉장히 위협적이고 전복적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꾸 부활을 피안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부활은 죽은 다음에 발생하는 것처럼 왜곡시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불의한 질서에 대한 저항이고 전복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질서와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참으로 지축을 흔드는 하나님의 지혜요 위로입니다. 부활을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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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