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 없는 종교성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 여행은 열매가 많았지만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 이들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루스드라에 도착했다. 루스드라는 제1차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만난다. 바울은 그를 고쳐준다. 그쳐 준 이유는 이렇다.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행 14:9).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태도(attitude)였을 것이다. 물론 그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진실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겠지만, 그 모든 것이 태도였을 것이다. 태도는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태도는 배신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교육의 궁극은 좋은 태도를 갖는 것이다. 태도는 마음의 상태이다. 좋은 마음의 상태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도 결국 마음 상태이다.
참 좋은 일이 발생했는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무리들이 바울이 한 일, 즉 보행 장애자를 일으켜 세운 기적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를 신의 현현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예배하려 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14:11). 무리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생각했다. 무리들 눈에도 바나바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였나보다. 바울은 앞에 나서 말씀을 전했으므로, 무리들은 그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령사 헤르메스로 인식했다.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숭배는 진지했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
제1차 전도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일을 이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부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장애인을 일으킨 기적이 발생했고, 다음으로, 그 일을 통해 바나바와 바울을 향한 무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게다가,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은 반대자들에게 돌을 맞아 거반 죽을 뻔한다.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일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클라이맥스라고 부르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내가 루스드라 사역을 제1차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들을 예배하려는 무리들에 대한 바나바와 바울의 반응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을 신의 현현으로 생각하여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무리들을 보고 곧바로 옷을 찢는다. 유대인 전통에서 옷을 찢는 경우는 불경을 경험했을 때와 회개를 할 때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었다. 그들의 제사 행위는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에게 제사드리려고 한 무리들의 행위에 불쾌감을 느꼈다.
계시의 빛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어둠에 휩싸이니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것을 숭배하려 든다. 어둠에 휩싸이니 숭배 받고 싶어 한다. 계시의 빛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는 일에 넘어가 쾌감을 느낀다. 다시 말해, 계시의 빛이 없으면, 엉뚱한 것을 숭배하거나, 자기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 어느 쪽이든, 불경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계시다. 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둠에 휩싸여 엉뚱한 것에 마음이 빼앗겨 절하게 되고, 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둠에 휩싸여 자기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자기를 높이고 만다. 이것은 모두 생명의 파국을 불러올 뿐이다. 엉뚱한 것을 숭배하는 일이나 스스로 숭배 받는 일은 모두 교만이다. 교만은 심리적 용어가 아니다. 교만은 신학적 용어다. 교만은 엉뚱한 것을, 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교만이 가져오는 최고의 형벌은 자유의 박탈이다. 나의 바깥 것을 섬기는 것이나, 자기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내어놓는 것은 모두 자유를 빼앗기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계시)와 관련이 없는 것이 신(God)의 역할을 감당하려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불쾌감을 드러낼 줄 아는 영적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일 수 있고, 제도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어떤 제도가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어떤 국가가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우리는 단호히 불쾌감을 드러내야 한다.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와 관련이 없는 것이 신(구원자)의 역할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100%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 우리를 자기의 종(노예)로 삼으려는 개수작에 불과하다. 구원을 주겠다고 속삭이는 그 모든 것에 불쾌감을 쏟아 놓으라!
루스드라에서 큰 기적을 행하였지만, 또한 그곳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큰 박해를 받기도 했다. 바울은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들은 더베에서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며,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한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행 14:22). 믿음은 복음에 관련된 것이 아닌 것이 ‘구원자’를 자처하는 일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다. 계시가 아닌 것에 불쾌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믿음이다. 사실 우리에게 어쩌면 이런 믿음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계시가 아닌 것에 불쾌한 마음을 드러낸 믿음.
계시 없는 종교성은 눈에 보이는 것만 좆는다. 계시 없는 종교성은 쾌(좋은 것)만 있고 불쾌는 없다. 계시 없는 종교성은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오직 좋은 것만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속임수다. 너무 형통하고, 너무 평화롭고, 너무 평안한 것만 좆지 말라. 십자가 없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쾌만 있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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