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5'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4.07.25 계시 없는 종교성
  2. 2024.07.25 희년을 살아내길 간구하는 기도
  3. 2024.07.25 좋은 설교란?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25. 08:56

계시 없는 종교성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 여행은 열매가 많았지만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 이들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루스드라에 도착했다. 루스드라는 제1차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만난다. 바울은 그를 고쳐준다. 그쳐 준 이유는 이렇다.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행 14:9).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태도(attitude)였을 것이다. 물론 그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진실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겠지만, 그 모든 것이 태도였을 것이다. 태도는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태도는 배신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교육의 궁극은 좋은 태도를 갖는 것이다. 태도는 마음의 상태이다. 좋은 마음의 상태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도 결국 마음 상태이다.

 

참 좋은 일이 발생했는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무리들이 바울이 한 일, 즉 보행 장애자를 일으켜 세운 기적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를 신의 현현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예배하려 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14:11). 무리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생각했다. 무리들 눈에도 바나바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였나보다. 바울은 앞에 나서 말씀을 전했으므로, 무리들은 그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령사 헤르메스로 인식했다.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숭배는 진지했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

 

제1차 전도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일을 이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부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장애인을 일으킨 기적이 발생했고, 다음으로, 그 일을 통해 바나바와 바울을 향한 무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게다가,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은 반대자들에게 돌을 맞아 거반 죽을 뻔한다.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일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클라이맥스라고 부르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내가 루스드라 사역을 제1차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들을 예배하려는 무리들에 대한 바나바와 바울의 반응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을 신의 현현으로 생각하여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무리들을 보고 곧바로 옷을 찢는다. 유대인 전통에서 옷을 찢는 경우는 불경을 경험했을 때와 회개를 할 때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었다. 그들의 제사 행위는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에게 제사드리려고 한 무리들의 행위에 불쾌감을 느꼈다.

 

계시의 빛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어둠에 휩싸이니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것을 숭배하려 든다. 어둠에 휩싸이니 숭배 받고 싶어 한다. 계시의 빛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는 일에 넘어가 쾌감을 느낀다. 다시 말해, 계시의 빛이 없으면, 엉뚱한 것을 숭배하거나, 자기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 어느 쪽이든, 불경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계시다. 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둠에 휩싸여 엉뚱한 것에 마음이 빼앗겨 절하게 되고, 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둠에 휩싸여 자기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자기를 높이고 만다. 이것은 모두 생명의 파국을 불러올 뿐이다. 엉뚱한 것을 숭배하는 일이나 스스로 숭배 받는 일은 모두 교만이다. 교만은 심리적 용어가 아니다. 교만은 신학적 용어다. 교만은 엉뚱한 것을, 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교만이 가져오는 최고의 형벌은 자유의 박탈이다. 나의 바깥 것을 섬기는 것이나, 자기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내어놓는 것은 모두 자유를 빼앗기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계시)와 관련이 없는 것이 신(God)의 역할을 감당하려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불쾌감을 드러낼 줄 아는 영적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일 수 있고, 제도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어떤 제도가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어떤 국가가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우리는 단호히 불쾌감을 드러내야 한다.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와 관련이 없는 것이 신(구원자)의 역할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100%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 우리를 자기의 종(노예)로 삼으려는 개수작에 불과하다. 구원을 주겠다고 속삭이는 그 모든 것에 불쾌감을 쏟아 놓으라!

 

루스드라에서 큰 기적을 행하였지만, 또한 그곳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큰 박해를 받기도 했다. 바울은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들은 더베에서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며,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한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행 14:22). 믿음은 복음에 관련된 것이 아닌 것이 ‘구원자’를 자처하는 일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다. 계시가 아닌 것에 불쾌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믿음이다. 사실 우리에게 어쩌면 이런 믿음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계시가 아닌 것에 불쾌한 마음을 드러낸 믿음.

 

계시 없는 종교성은 눈에 보이는 것만 좆는다. 계시 없는 종교성은 쾌(좋은 것)만 있고 불쾌는 없다. 계시 없는 종교성은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오직 좋은 것만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속임수다. 너무 형통하고, 너무 평화롭고, 너무 평안한 것만 좆지 말라. 십자가 없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쾌만 있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7. 25. 08:53

희년을 살아내길 간구하는 기도

(막 3:1-6)

 

희년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베풀어 주신 주님,

예수께서 희년의 정신을 실제로 실행하신 것을 보며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희년의 은혜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자신의 존재로부터 멀어지고

뜻하지 않게 어딘가에 매어 자유를 잃어버리고

고통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우리의 현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주님,

우리에게 희년을 선포하신 그 은혜와 뜻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삶에 새기도록 도우시옵소서.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희년을 선포하는 믿음의 결단이 있게 하셔서

우리가 어쩌다 잃어버리고 사는 자유와 나눔의 삶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받은 생명과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땅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거룩한 진리가 회복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먹고사느라 서로가 서로를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지옥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서로의 생명을 보듬어 안아주는 평화의 세상을 열어 주소서.

우리가 희년의 은혜를 누리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 위에서 몸소 희년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좋은 설교란?]

 

정현종은 릴케의 시를 읽을 때마다, 릴케는 시를 통해 말을 한다기보다 깊이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릴케의 시 읽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현종은 좋은 시란 어떤 시인지 이렇게 말한다. "말로써 말이 많은 얄팍한 시가 있는가 하면, 말은 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시가 있는데"(두터운 삶을 향하여, 44쪽).

 

나는 유튜브 설교를 잘 듣지 않는다. 우리 교회도 내 설교를 유튜브에 올리지만, 일차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우리 교회 교우들을 위해 올리는 것이지, 다른 누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올리는 게 아니다. 유튜브는 1인 방송 시대를 열어 방송권력을 민주화시키는 데 공헌했지만, 반대로 거대한 미디어 홍수의 시대를 이끌기도 했다. 홍수가 나면 먹을 물도 없어지는 법이다.

 

나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면서, 인격적인 눈맞춤이 있는 설교를 좋아한다. 미디어를 통해 듣는 설교보다, 그냥 설교자와 대면하여 듣는 설교를 좋아한다. 그래서 유튜브 설교는 듣지 않는다. 이런 나의 습성 때문에 나는 이번에 산타클라라교회 집회를 통해 김기석 목사님 설교를 처음 들었다. 책을 통해서 만나고, 그리고 책 출간 때문에 몇 번 만나 뵙기는 했지만,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현종 시인이 위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릴케의 시와 같았다. 말은 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였다. 나는 지금 김기석 목사님을 '찬양'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니다. 한 설교자의 설교 행위가 얼마나 깊은지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늘 나의 설교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 같기를 바랬다. 이것은 정현종 시인이 릴케의 시를 통해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나의 설교가 '설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게 바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설교를 마치면 청자의 입장에서 내 설교를 들으며 모니터링을 한다. 부끄럽기만 하다.

 

좋은 설교란 말하는 설교가 아니라 듣는 설교이다. 좋은 설교란 설교로써 말이 많은 설교가 아니라 설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이다. 이러한 설교를 하려면 평소에 경청을 잘 하는 연습을 하고, 실제의 삶 또한 경청이 몸에 밴 삶을 살아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 하려면, 말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을 멈추고 경청하는 것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말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영혼의 깊이와 넓이를 기약하는 대단히 중요한 능력이며 따라서 삶과 세계를 두텁게 하는 능력이다"(두터운 삶을 향하여, 45쪽).

 

설교이되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있다는 것은 참 축복이다. 그런 면에서 김기석 목사님은 우리 시대의 큰 바위 얼굴이다. 물론, 여전히, 내가 앞으로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유튜브를 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격적인 눈맞춤이 없는 설교를 나는 듣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큰 바위 얼굴'이 되기 위하여 더욱더 유튜브를 끄고(전자기기를 끄고), 경청하는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 사람에, 책에, 시대에, 아픔에, 더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고, 그렇게 경청하여 얻는 선물을 설교에 녹여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설교이되 깊이 경청하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라는 고백을 받고 싶다.

 

이 시간, 가장 떠오르는 사람들은, 나의 부족한 설교를 매주일 들어주는 우리 교회 교우들이다. 이렇게 고마운 분들을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길, 그리고 이 부족한 사람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