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5'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4.08.15 교회와 세속화
  2. 2024.08.15 빌립보 교회의 탄생
  3. 2024.08.15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
  4. 2024.08.15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다

[교회와 세속화]

 

"그람시가 말하는 세속화란 모든 사회관계를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새로이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교회가 기존의 모든 지적, 도덕적 관계, 즉 지배계급이 축적/유지해온 사회관계의 총체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김항, <종말론 사무소> 16쪽)

 

그람시의 문제의식을 통해서 보듯, 서구사회에서 교회는 "지배계급이 축적/유지해온 사회관계의 총체"였다. 요즘 우리가 자주 하는 말로 옮기면, 서구사회에서 교회는 '적폐' 그 자체였다. 우리는 '세속화'라고 하는 말을 별로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서구사회에서 '세속화'란 적폐 청산을 위한 몸부림을 담고 있는 말이다.

 

서구의 세속화 논쟁은 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동시에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화'의 다름 아니다.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문명의 총아는 뭐니뭐니 해도 종교이다.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총아다. 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서구문명을 깊숙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서구사회에서 기독교의 위상과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기본의 모든 지적, 도덕적 관계, 즉 지배계급이 축적/유지해온 사회관계의 총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이 된 이후, 서구사회에서 기독교는 지배계급의 위상와 위력을 누리며 발전해 왔다.

 

종교만큼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종교는 지배체제를 성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에, 지배체제를 축복하는 순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듯, 그 지배체제는 신성화된다. 이는 지배세력이 종교를 등에 업으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과 몇몇 교단의 수장들은 새로이 대통령이 당선되면 '당선 감사예배'를 드린다. 보수 기독교 세력은 언제나 정부(특별히 보수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특별히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기독교의 뉴라이트 세력은 보수 정부가 들어선 요즘 대놓고 보수 정권을 지지하며 정부가 보수 정책을 펼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이는 그람시의 통찰에서 보듯, 한국 기독교가 스스로 적폐 세력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건이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 세력들은 지금까지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보수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배후에 외세의 압도적 지원을 업고 있는 것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392-393쪽).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보수당 국민의 힘은 노론에 잇대어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해, 한국에서 보수세력/지배세력의 역사는 500년이나 된 것이다. 이 500년 간의 지배세력 역사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한 것일까? 당선 축하 예배와 뉴라이트 세력의 득세를 통해서 한국 (보수) 기독교의 역할은 명확해진다. 한국 (보수) 기독교는 지배체제를 신성화시키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길지 않는 역사에서 서구 기독교의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 (보수)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적폐가 된 것이다.

 

이것은 복음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현상이다. 복음은 국가와 종교 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국가와 종교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힘이 잘못 쓰이면 국민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힘이 올바로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랄한 비판이 필요하다. 복음은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이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고단한 길을 걷는 이들이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임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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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8. 15. 06:03

빌립보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16장은 빌립보 교회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는 데는 세 가지의 사건이 연관되어 있다. 루디아와의 만남, 귀신 들린 여종을 해방시키는 사건, 그리고 감옥 사건이다. 교회가 탄생하는데 있어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을 통해 교회는 탄생한다.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는데 있어 처음으로 눈 여겨보아야 할 사건은 루디아(Lydia/리디아)와의 만남이다. 회당이 없던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기도 처소를 찾으러 강가에 갔다가 루디아를 만난다. 루디아의 만남 사건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문구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행 16:14)이다. 주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루디아의 집에 구원이 임하게 하신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서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야 교회를 나오기도 하는 것이고,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서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마음이 열린 루디아를 통해 빌립보 교회는 시작된다.

 

두 번째 사건은 귀신 들린 여종의 해방 사건이다. 루디아를 만난 것도 기도 처소를 찾으러 가다가 인 것처럼, 귀신 들린 여종 해방 사건도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발생한 일이다. 무슨 일이든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는 것은 뭔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신비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통로가 된다. 기도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낸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라고 한국어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를 그대로 표현하면, ‘퓌톤의 영을 가진 어떤 여자 노예’라는 뜻이다. 퓌톤은 오비디우스 신화에서 대홍수 후 대지가 만들어낸 괴물(뱀)으로 묘사된다. 그가 거주하던 산의 이름이 퓌토인데, 그 이름을 따 퓌톤이라고 불린다. 퓌토는 델피의 옛지명이다.

 

델피는 아폴로 신전이 있던 곳이다. 퓌톤의 영을 가진 여자는 아폴로 신전의 여사제로서 미래를 예언하는 일을 했다. 자신의 운명이 궁금했던 사람들은 델피 신전에 가서 퓌톤의 영을 가진 여사제를 통해 미래를 예언 받았다. 그런데, 델피까지 가지 않아도, 그 일을 하는 여자 사제가 빌립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자 노예는 매우 유용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이 여자 노예를 통해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 사제가 바울 일행을 가리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외쳤다. 이 외침은 바울 일행을 곤경에 빠뜨렸고, 참다 못해 바울은 그 여자 사제 안에 있던 퓌톤의 영을 쫓아낸다. 이 일로 여자 사제(여자 노예)는 억압과 학대와 착취로부터 해방되지만, ‘주인들’은 그 여자 노예를 통해서 얻던 이익을 박탈 당하게 된다. 좋은 수입원을 잃은 ‘주인들’은 화가 나서 바울 일행을 그 도시의 고위관리들에게 고발한다.

 

여자 사제 해방 사건 때문에 바울 일행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죄목은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하다.”(행 16:20-21)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이 이곳 빌립보 도시에서 불법을 행하고 있다는 고발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꼼짝없이 감옥에 갇힌다. 그런데, 매를 받고 갇힌 그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는 기도와 찬송을 한다. 같은 감옥에 있던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의 행동에 감동한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그들의 기도는 또 한번 신비한 사건이 발생하는 통로가 된다. 지진이 발생하여 감옥 구조물이 파괴되고 죄수들이 탈옥하기 용이한 상황이 발생한다. 감옥의 간수는 그 상황을 보고, 상부로부터 문책을 당해 처벌 받을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져 자결하려 든다. 그때, 바울은 크게 소리 질러, “우리 모두 여기 있으니 죽지 마시오!”하면서 간수를 위급한 상황에서 진정시킨다. 간수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간청한다. “선생님들이여(퀴리오이/주님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간수의 간청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 가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신앙으로서의 구원에 대한 영적인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아주 실제적인 의미이다.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하였을 때 어떻게 법적인 처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바울과 실라에게 쏟아 놓는다. 그리고 법적인 처벌을 면하려면 죄수들이 도망가지 않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텐데, 그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에는 이런 실제적인 요청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간구의 간절한 요청에 응답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간구의 요청에 적절한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예수를 믿는 영적인 구원과 더불어 아주 실제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의 기도와 찬송 소리를 듣고 감동한 죄수들을 다독인다. 도망 가면 간수가 처벌 받을 것이라고.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죄수들은 탈옥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 간수의 생명을 보존해 주었다.

 

이날, 간수가 받은 구원은 단순히 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예수를 믿어 영적인 구원을 받았어도, 죄수들이 탈옥했다면 간수는 상부로부터의 처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수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 구원은 이렇게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간수는 자칫 엄한 처벌을 받아 큰 화를 당할 뻔한 상황에서 구원 받았다. 그래서 간구의 기쁨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다.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나면서 아주 성숙하게 대처한다. 빌립보의 고위관리들이 직접 와서 바울 일행에게 사과하고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 만약, 바울이 이렇게 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감옥을 나왔다면, 빌립보에서의 전도는 그냥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불법적인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빌립보의 고위관리들이 직접 와서 사과하고 바울 일행을 풀어주었다는 것은 바울 일행의 행보가 불법적인 일이 아니며, 바울 일행의 활동을 생겨난 빌립보 교회는 불법적인 단체가 아니라 합법적인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영적인 기쁨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실질적인 기쁨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평생 선교 사역의 가장 든든한 후원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기도는 배신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기도를 통해서 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가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다. 반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기도가 있다.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 기도가 일구어 낼 역사와 뜻밖의 사건을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또한 서로의 삶을 세워주고 풍요케 하는 것도 중요하다. 구원은 단순히 정신 승리나 영적인 기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주 실제적인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관념적인 기쁨이 아니다. 아주 구체적이다. 기도하는 삶을 살면서 주님이 주시는 실제적인 기쁨을 경험하는 것, 이러한 삶 자체가 바로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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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8. 15. 05:57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

(막 5:21-43)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주님,

혈루증 여인이 가졌던 간절한 마음을

우리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간절함이 아니라 무력한 마음을 갖는 바람에

한숨과 불평만 입에서 나올 뿐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 앞으로 향하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님이 지금 바로 우리 앞에 와 계신 데도

우리는 주님의 옷깃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문제에 매몰되어 있어

눈을 들어 주변을 바라보지 못하고 삽니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하고 무시하고 꺼려합니다.

그렇게 무력한 삶을 살다보니

우리는 주님의 그 치유하시는 은총,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삽니다.

이 얼마나 큰 생명의 낭비입니까.

주님, 우리에게 야이로와 혈루증 여인의 말씀을 들려주셨사오니,

무력감 대신 간절함을 갖게 하시고

나의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길에 놓여있는

너의 문제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민족 시인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입니다. 학창시절 했던 국어 공부를 되돌아보면, 여기서 ‘님’은 ‘국가’를 의미합니다. 국가(나라)를 사랑하는 ‘님’에 비유해서 표현한 이 시 ‘님의 침묵’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정서를 깊이 반영한 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마도, 한용운의 시에서 절절하게 외치는 것처럼 ‘국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조건에서 국가만큼 중요한 것도 드뭅니다. 국적이 없으면 난민이 됩니다. 현재 유럽대륙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난민문제입니다. 얼마 전에는 유럽연합에서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앓다, 결국 난민법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죠. 일정 부분 난민들을 책임지는 방향으로 정책을 정했습니다. 난민 입장에서는 감사한 결정입니다.

 

나라를 빼앗기면 주권이 사라집니다. 한국은 이미 그 경험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주권 없는 ‘인간’으로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님의 침묵’처럼 애절한 노래도 부르게 된 것이죠. 그 당시 거의 모든 문인들은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소망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외에도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소설가이자 시인 김훈의 ‘그날이 오면’, 시인 이육사의 ‘광야’, ‘절정’ 등 수많은 작품들이 빼앗긴 국가, 주권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국가는 여전히 인간의 조건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좋은 나라를 세우는 일은 여전히중요합니다. 이와 더불어, 21세기에 들어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다”(한길사, 78쪽). 21세기에 떠오른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은 바로 ‘지구’입니다.

 

그동안 인류는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구는 그냥 인간이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자원’ 정도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앞두고 사람들은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을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기후변화 때문입니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인류 최초 기후변화 대책회의가 열립니다. 일명 ‘기구정상회담’(Earth Summit)입니다. 이와 발맞추어 한국에서도 1991년에 ‘녹색평론’이 창간되고, 이보다 앞서 1989년에는 ‘한살림선언’이 발표되고, 1993년에 김대중은 지속가능한 경제를 환경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할 것을 주문합니다. 환경 문제를 단순히 경제 성장의 부차적인 문제로 보지 말고, 경제 발전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생각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평범하고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단순히 ‘기후가 변화하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서 기후변화는 늘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21세기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는 이전 기후변화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기후변화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인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구원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문제'라는 것이죠.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변화 문제에는 인간의 온갖 죄악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인간의 ‘조건’인 지구가 고통받는 이 시대에 세상과 발맞추어 교회는 인간의 조건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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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