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2. 10. 26. 08:27

[기후교회로 가는 길]

 

1. 우리가 처한 상황과 생태 영성

 

“기후위기는 시간 싸움이다.” 굉장히 무서운 표현입니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은 도둑같이 임합니다. 대기에 탄소 비율이 늘어나면서 산소가 부족한 상태가 되고, 이는 바다의 산성화를 불러와 바다 생물을 죽게 만듭니다. 식수난과 식량난이 급속하게 닥쳐서 식량 폭동이 일어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전세계는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지금은 세상이 태평한 것 같아도, 이러한 끔찍한 일이 도둑같이 임합니다. 탄소배출을 급속히 늦추지 않으면, 2040년 정도부터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현실입니다.

 

린 화이트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거나 우리의 옛 종교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더 많은 과학과 더 많은 공학기술조차도 우리들로 하여금 현재의 생태위기를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27쪽). 우리가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종교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버드 대학교의 종교학과에서 오랜 세월 교수로 지낸 하비 콕스가 한 말이기도 합니다. 종교는 아주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종교의 힘을 올바로 사용해야겠지만요.

 

짐 안탈은 기후위기 앞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진지하게 성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기독교가 공동의 구원을 무시하면서 개인적 구원만 강조하기를 계속한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로부터 아무리 멀리 소외되었어도 인류를 보호하고 특권을 주는 인간중심적 투사(projection)에로 창주 하나님을 축소시키기를 계속한다면, 종교의 실천은 점차로 감소하고 피조물들의 구원에는 별로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30쪽). 개인의 구원, 또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근대 세계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신앙이 매우 인간중심적 신앙으로 변질된 것은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개인(자기)에게 집중하는 문화를 가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앙의 역할은 자기를 좀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렇다 보니, 짐 안탈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기후위기 앞에서 이러한 인간중심적이고 개인중심적인 신앙의 형태를 고수할 경우, 기독교인이 기후위기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듣습니다. 기후변화 프로젝트 모임에서도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소위 믿음 좋다는 복음주의권 기독교인들은 기후변화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후변화를 믿지 않거나, 아니면, 기후변화가 발생하더라도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개입이나 도움없이 기후변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지구의 모든 자원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마음껏 쓰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기후변화 같은 것에 신경 쓸 필요없이 자유롭게 소비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면서도 어떠한 신앙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기후변화에 대하여 대처하는 마음가짐과 방식이 다릅니다.

 

17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의 여파로 지구와 기후는 2백 년이 지나 수백만 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던 자연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그리하여 급기야 지구과학자들은 지금 현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류가 지구대기자연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찍이 수십 억년에 이르는 지구의 역사에서 한 종(species)이 지구대기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인류(Human-being)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는 ‘인류세’라고 불립니다.

 

탄소 배출이 온실효과를 가져와 지구의 기후를 가열시킬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인류가 처음 알게 된 것은 1850년, 존 틴달(John Tyndall)이라는 기후과학자 때부터입니다. 그 이후 1965년에 이르러서는 과학자들이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에게 대기권에 이산화탄소가 증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위험성을 경고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다 기후위기에 대해서 과학자들의 견해가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입니다. 특별히 1989년에 빌 맥키븐(Bill McKibben)이 쓴 『자연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 기후변화는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은 기후위기에 대해서 여러 매체를 경고해 왔고, 이제는 일반인들까지 기후변화를 실제적으로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후변화가 발생하고 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위기가 닥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기후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어도 그러한 관심을 막고 있는 두 단체가 있습니다. 바로 정치권과 종교권입니다. 이미 우리는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이 행한 파리기후협약 탈퇴 발언을 통해서 기후변화에 대한 정치권의 방해를 경험했고, 그와 더불어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던 미국 복음주의권 기독교인들의 방해를 목도하기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정치권과 종교권을 중심으로, 명백한 사실인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담론을 회피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조지 마샬(George Marshall)은 이러한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사실의 핵심은 우리가 기후변화가 일으키는 불안과 그것이 요구하는 깊은 변화를 회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기후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53쪽).

 

화석연료 사용과 관련된 기업들이 로비를 하여 정치권이 기후변화에 대하여 부정하도록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그들의 이익이 달린 문제이고 기업의 존폐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종교권에서 기후변화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는 일은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 외부의 현상이라기 보다 종교 내부의 현상에서 비롯된 것인데, 기독교의 창조론이나 구원론에 대한 큰 오해와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기후변화에 대하여 부정하고 기후변화 담론을 회피하며 기후위기에 맞서 기후정의를 실현할 의지나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동안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뭔가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현재 사회정의 문제, 즉 기아, 홈리스, 인종차별, 이민과 난민 문제, 문명의 충돌과 전쟁, 식수 부족 사태, 이스라엘-팔레스탄인 문제, 공중 보건 문제, 주택 문제,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불의(injustice)와 씨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변화는 이러한 문제들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는 데 전문가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후변화에 의해 이미 가장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일으키는데 가장 적은 몫을 한 사람들이고, 그걸 다루기에 가장 적은 자원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당황스럽고 참담하게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처한 상황(현실)을 정직한 양심으로 바라보며, 기후변화로 인하여 촉발된 위기들, 또는 기후변화로 인해 더 깊어진 사회적 문제와 갈등들을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하여 ‘생태 영성(Ecological Spirituality)’을 갖는 일은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짐 안탈의 『기후교회』에서 인용했고, 이 책의 쪽수를 달았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