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이 아니라 참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한다. 이것은 구원이 대속적 구원이 아니라, 참여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대속적 구원'이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또는 예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인 것 같다.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는 그들의 책에서 이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특별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그 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마가복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의 복음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교회의 정황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의 구원'에서 '대속의 구원'으로 신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후대에 씌어진 성경으로 갈수록 그 정황이 드러난다.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대조해보면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상황이 박해에서 제국의 지지로 바뀌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참여'보다는 '대속'쪽으로 구원론이 기울어진다. 그럴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교회가 대중들을 콘트롤 하기에는 '참여'보다는 '대속'이 훨씬훨씬 수월하고 '은혜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대속의 교리는 대중들을 위협하기에 좋은 문구이다.

 

성만찬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일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속교리가 낳은 병폐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이미 오해를 낳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원래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특정한 인물(예수)을 그저 의지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도반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구원이란 그 길에 들어섬이지, 믿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나 공간으로의 이동(천국으로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이 생각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 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대속이 아니라, 참여이다. 예수는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당신의 일에 우리가 참여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인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부활'에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데,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위로를 얻으리.

 

나는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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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9. 20. 13:19

위로와 기쁨을 간구하는 기도

(고후 7:2-16)

 

주님,

한없이 낮은 자리에 처해있던 바울의 마음을

‘디도의 옴’이라는 일을 통해서 위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낙심(downhearted)’라는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을까요.

애처롭습니다.

그러나 주님, 바울이 경험한 ‘낙심’은 그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님을 겸손히 섬길 때,

또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도 동일하게 하는 경험입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우리는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한없이 작아지고, 한없이 무력해지고, 한없이 슬퍼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감정을 견디기 힘들 때가 참 많습니다.

주님,

우리의 ‘낮은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낙심하여 한없이 낮은 자리에 처해있던 바울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낮은 마음을 드릴 때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기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직 구원이 주님께 있사오니, 주여,

우리의 낮은 마음을 돌보아 주옵소서.

높고 높은 보좌를 떠나

낮고 낮은 곳에 임하셔서

낮은 자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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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20. 13:17

위로와 기쁨

(고린도후서 7:2-16)

 

1.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다섯 번 반복되는 시가 있다. 정지용의 시 ‘향수’이다. 1989년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듀엣으로 불러 유명해진 노래 ‘향수’의 원작이다. 한국 근대시인들(일제시대 때 활동했던 시인들) 중에는 윤동주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 한국 문학계에서 정지용은 아이돌이었다. 윤동주는 정지용을 너무 좋아해서 정지용의 첫 시집(1935년)을 구입하여(1936년) 필사하며 시작 연습을 했다. 정지용은 일본 유학파인데,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도시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하여 정지용은 모교인 휘문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았고, 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쳤다.

 

2. 연희전문을 다닐 당시 윤동주는 정지용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그리고 윤동주도 일본 유학의 꿈을 꾸고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 입교대학에 입학했다가 정지용이 다닌 동지사대학으로 옮겨서 거기에서 정지용처럼 영문학을 공부한다. 이처럼 윤동주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 중 하나는 정지용이다. 윤동주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정지용의 시는 그 당시 매우 모던했다(새로웠다). 그의 시 ‘향수’가 발표된 시기는 1927년 3월이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정지용의 시는 그야말로 한국 근대문학의 기적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3. 인간에게 경험이란 존재를 꽃피우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인간은 그 인격을 형성한다. 정지용에게 ‘고향’에 대한 경험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된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같은 고향이지만 누군가에겐 ‘꿈에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곳’일 수 있다. 고향에 대하여 무슨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에 따라서 그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좋은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이 곧 생각의 틀과 그 사람의 인격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4.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위로의 하나님’이다. 1장에서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장 3-4절). 그 이후 계속해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기억하고 찬양하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삶(부요케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다.

 

5. 수련회를 연다면 공동체 활동 시간에 가장 묻고 싶은 질문 중 하나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한 단어로 표현해 보시고 왜 그런지, 무슨 경험 때문에 그런지 나누어 주세요.” 대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며 찬송하는 이유는 그가 사역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으면 바울도 그 사역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찬송이 그 당시에 있었다면, 바울이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 중 하나였을 것이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6. 고린도후서에는 정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고린도후서를 읽으며 그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는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다. 그 이면에는 어떤 긴장감이 배어 있다. 그 긴장감을 찾아내야만 성경을 읽을 때 재미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그 영화의 스토리가 지닌 긴장감을 찾아내고 유지해야만 그 영화가 재밌는 것과 마찬가지다.

 

7. 바울은 어느 순간 오해와 음해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고린도후서에 흐르는 긴장감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 간의 소원해진 관계 때문은 아니다. 그 관계가 긴장감을 촉발시키기는 했지만, 그들의 긴장감은 그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관계를 회복하고자 써서 보낸 바울의 ‘눈물의 편지’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뭔가 오해하고 복음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하여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다. 지금처럼 운송체계가 활발하지 못했던 그 당시 편지를 보내 놓으면 그에 대한 답장을 받는 것은 꽤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일었다. 편지를 보내 놓고 사도 바울은 마음을 조린다.

 

8.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렇게 정다운 편지가 아니었다. 바울은 그 편지를 ‘담대하게’ 썼다고 했는데, 여기서 담대하게 썼다는 것은 ‘frank speech’라는 말로, 아주 솔직하게 상대방을 향한 마음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솔까말 편지 / 솔직히 까놓고 말한 편지).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조목조목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편지를 써서 보낸 측에서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가감없이 다 써서 속이 시원할지는 몰라도, 그 편지를 받는 측에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9. 바울은 ‘따끔하게 한 마디 한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내 놓고 후회했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8절).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편지 한 통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는 바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도 종종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는가? 어떠한 일을 해놓고 그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서 밤잠을 설치며 전전긍긍하는 것 말이다.

 

10. 바울은 자신이 써서 디도 편에 고린도교회로 보낸 편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아마도 바울은 그 편지로 인하여 자신과 고린도교회와의 관계가 완전히 뒤틀릴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보내 놓고 “괜히 보낸 것 같다.”라며, 근심 속에서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수일 내에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바울은 그 편지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마음 졸였을까. 생각만 해도 애처롭다. 바울은 당연히 고린도교회에 보내 편지를 놓아두고 하나님께 매일같이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11.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은 ‘디도(Titus)’였다. 디도는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전했고, 디도는 그 편지를 받아 든 고린도교회의 반응을 바울에게 전해주었다. 고린도후서는 마치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인 바울과 고린도교회 간에 알콩달콩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 드로아의 사역을 포기하고 마케도냐로 건너가서 빌립보에 이르러 디도를 만나게 되는데, 디도가 가져온 소식은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2. 바울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바울이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자.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바울은 말한다. 사역을 하면서 여러가지 어려운 일이 있어서 바깥으로는 사람들과 여러 다툼이 있었고, 심정적으로는 마음이 많이 두려웠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바울은 ‘낙심(downhearted)’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6절). 바울이 자신의 ‘낙심’을 표현하기 위해 쓴 헬라어는 ‘타페이노스’이다. 이는 낮은, 가난한, 겸손한’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사역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자신의 질병과 디도에 대한 염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보내 놓은 편지에 대한 걱정 등으로 인하여 한없이 ‘낮은 자리’에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상황을 ‘낙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3. 낮은 자리에 처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위로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병에 걸렸을 때, 가족 중 누가 아플 때(특별히 자식이 아프면),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가족의 불화를 경험할 때, 직장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하고자 하는 일이 제대로 잘 안 될 때, 등등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낮은 자리’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낙심(낮은 자리에 처하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 정말 애처로운 모습이다.

 

14. 그런데, 본문에 흐르는 기류는 단순히 ‘낙심’이 아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낙심’이 아니라, 위로와 기쁨이다.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6-7절). ‘낮은 자리에 처해 있던’ 바울의 상황에 반전을 일으킨 사건은 ‘디도의 옴’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낮은 자리에 처해 있던’ 바울을 위로하셨는데, 그 방법은 ‘디오의 옴(by coming of Titus)였다. 바울에게 ‘디오의 옴’은 그냥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의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15. 디도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들고 왔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고 있던 바울에게 디도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고서, (그 편지는 결코 friendly한 편지가 아니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켰다는 소식이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써서 보낸 편지를 받아들고 근심했을(마음 찔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칭찬하며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10절).

 

15. 이것은 참으로 따스한 고백이다.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내 놓고,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하여 후회하면서 마음을 쓸어내리고 숱한 날을 가슴 조리며 기도했을 바울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지금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지에 함께 하시고, 그 편지를 읽은 고린도교회 성들과도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한 근심이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한 근심은 세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하나님 안에서 한 근심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좋은 결과,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할렐루야!)

 

16. 지금, 우리를 낙심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를 ‘낮은 자리에 처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낮은 자리에 처하는 일은 참 어렵다.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내 자신이 한없이 무력해지고, 내 자신이 한없이 슬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눈물 흘리는 것 외에는 마땅히 할 게 없다. 그러한 감정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니까, 조금 힘을 냈으면 좋겠다. 나를 한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일’을 주님께 내어드리면 좋겠다. 그러면, 낮은 자의 하나님, 스스로가 낮은 자리에 처하신(케노시스)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에게도 ‘디오의 옴’과 같은 위로와 기쁨을 안겨주실 것이라 믿는다.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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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9. 16. 19:48

넓은 마음을 간구하는 기도

(고후 6:1-13)

 

주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신앙이, 특별히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좁아져 있는지를 보며

깜짝 놀라게 됩니다.

넓은 집, 큰 차를 타기는 좋아하면서

우리는 왜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좁은 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일까요?

마음이 너무 좁기 때문에 오히려 외적으로 넓은 것만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육체로 세상을 바라본 우리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상처받은 공동체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니,

회개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넓히라”는 통렬한 말씀을 받아들여,

좁은 마음으로 남을 쉽게 정죄하고, 남 탓 하고,

상대방의 진실한 마음과 수고를 알아보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벗어나

‘넓은 마음’ 안에서 용납하고 용서하고 화합을 이루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도 부요케 하고,

무엇보다 주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워 나가기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소서.

온 우주가 담아낼 수 없는 넓은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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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16. 19:46

마음을 넓히라

(고린도후서 6:1-1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1. 어떤 물건을 매뉴얼 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 보니, 그 물건이 가진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거나, 사용하다 잘못해서 고장나게 하고, 또는 매뉴얼대로 사용하지 않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좋은 음식도 적당히 먹어야지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원장님한테 배운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아이오다인(요오드)를 먹으면 갑상선 저하증을 치료할 수 있는데,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약을 먹을 때도 용량에 맞게, 의사의 지시를 따라서 먹는 게 중요하다. 안 그러면 병을 고치려다 더 큰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2. 디모데후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듯이, 성경은 신앙의 매뉴얼이다. 신앙도 매뉴얼을 따라 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물건의 매뉴얼을 대충 보거나 아예 보지 않고 물건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듯,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매뉴얼에는 별로 관심 없고 그냥 자신의 감정을 기준 삼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앙이 주는 유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참 안타까운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절).

 

3. 신앙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 자체를 가져다 준다. 이 진리를 모르는 것도 결국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매순간 ‘구원’을 원한다. ‘힘들다. 어렵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낙심된다. 고통스럽다.’ 등등, 우리는 부정적인 환경과 기운 속에서 살아내려고 애쓰고 또 애쓰며 산다. 우리의 삶은 온통 구원의 갈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누가 나 좀 구원해 줬으면 좋겠다!”

 

4.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신앙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구원을 지금 당장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다. 우리가 마음이 답답한 이유, 우리가 사는 게 힘든 이유, 우리가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 우리가 마음을 나쁜 기운에 내어주는 이유는 지금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서 자꾸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물건만 잃어버리고, 정신만 깜빡깜빡 한 게 아니라, 신앙에도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5. 오늘 본문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신앙의 매뉴얼에서 벗어나, 아주 한참 벗어나 변변치 못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거울로 보듯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 일행 간의 감정선(tension)을 볼 수 있다. (바울 서신은 뭔가 일이 happen했고 그에 대하여 address 하는 내용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매우 엉뚱한 해석을 낳는다.) 그 둘 사이(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는 아주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 일단,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을 보는 눈이 조금 삐딱하다. 다른 말로 해서,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다.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니까, 바울이 무슨 말을 해도 그의 말이 귀청만을 울릴 뿐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그러한 고린도교회의 강퍅한 마음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6.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대적하게 만드는 바울의 대적자들과는 달리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수고했는지, 그들과는 달리 얼마나 순수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자기 자랑(self-commendation/자기 자신을 뽐 내는 게 아니라, 수사법(레토릭)이다.)을 하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들로 추천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많은 인내와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감옥에 갇히는 것과 난동과 수고와 자지 못함과 배고픔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들로 지냅니다. 또한 우리는 순결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과 모욕, 비난과 칭찬을 동시에 겪으며 일합니다”(4-8절/우리말 성경).

 

7.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이 신앙생활의 매뉴얼이라면, 이 매뉴얼에 비친 우리의 신앙은 말도 못하게 부족하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굉장히 독특하고 특별하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기복’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잘 따라서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을 ‘기복’의 수준으로 하락시킬 수 있다. (기복: 복만 받기 원하고 십자가가 없는 신앙)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정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선물로 주시는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을 받는다.

 

8.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은 완전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하는데, 바울은 그 다른 차원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무명한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10절/우리말 성경).

 

9. 기독교 신앙, 그리스도인의 삶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절대자/신)으로부터 단순히 무엇인가를 제공받는 사람이 아니라(기복),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누기 때문이다(십자가).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친구란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르다. 세상에서는 반대의 일이 발생한다. 진실한 것 같으나 알고 보면 속이는 사람이었고, 유명한 사람 같았는데 보면 별 존재 아니고,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사람이고, 기뻐하는 것 같으나 실은 근심이 가득한 사람이고, 부유한 사람 같았으나 알고 보니 속이 텅 빈 사람이었고,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으나 빈털터리인 사람.

 

10. 바울은 자신의 겉모습과 실제 모습이 어떻게 다른 지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부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요즘 시대에 바울의 모습은 여러 모로 생각할 것이 많다. 특별히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진정한 부자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정말 부자다. 그의 겉모습을 보면 매우 불쌍한 사람 같지만, 실제로 바울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재물을 축척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긴 유.무형의 자산을 내어 놓은 삶 말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다른 이를 부요케 하는 자가 진짜 부자라는 뜻이다.

 

11. 바울은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밝히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고린도 사람들이여, 우리의 입이 여러분을 향해 열려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 넓게 열려 있습니다”(11절/우리말 성경).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게 열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개 사랑하지 않으면 입을 닫는 법이다. 상대방하고 말을 섞기 싫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마음이 닫힌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따끔한 말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여러분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스스로 좁아진 것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이 말합니다. 여러분도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십시오”(12-13/우리말 성경).

 

12.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좁아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남 탓 하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여기서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할 때, 마음은 영어로 ‘affections’라고 번역한다. 이건 굉장히 감정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대개 ‘애정, 속이 좁다 깊다’라는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말은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그 좁은 마음을, 그 좁은 이해력을 넓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13. 이런 속담이 있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아무리 잘 생겼어도,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몸/몸매가 좋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마음 좁은 사람 하고는 못사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말하면, 그냥 일반 심리학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복음은 심리학 이상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왜 그렇게 마음이 좁아졌을까? 바울은 5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체를 따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를 따라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고후 5:16/우리말 성경).

 

14.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마음이 좁아진 이유는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사람을 육체에 따라 판단했고, 그리스도도 육체에 따라 믿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할 때 아주 쉽게 육체에 따라, 겉모습에 따라, 세상적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 그러나 바울은 더 이상 그렇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그는 사람을 판단할 때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따라 판단한다. 그의 판단 기준이 되는 복음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Christ has died for all)”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몇몇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판단할 때 그들의 외적인 모습(flesh)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15. 우리가 이 복음을 잊어버리면, 우리도 얼마든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마음이 좁아질 수 있다. 그리고 본인들의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좁아진 것이면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 탓을 하기 쉬워진다. 그렇게 좁은 마음으로는, 자기 스스로의 삶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도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하는 바울의 질책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16.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좁은 마음으로 남을 쉽게 정죄하고, 남 탓 하기 십상이고, 상대방의 진실한 마음과 수고를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복음을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넓은 마음’ 안에서 용납하고 용서하고 화합을 이루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도 부요케 하고, 무엇보다 주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워 나갈 것이다. 모든 것은 복음과 그 복음을 붙드는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을 좁게 가지지 말고, 마음을 넓히라. 너무도 따스하고 멋진 메시지다. “복음으로 마음을 넓히라”, 이것이 복음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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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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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재미있는 전개입니다. 마치 제가 글을 써내려간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추석입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만나면 송편이나 떡을 나눠 먹고 싶네요.

    2021.09.20 07:15 [ ADDR : EDIT/ DEL : REPLY ]

기도문2021. 9. 7. 09:28

갈망의 기도

 

주님,

주님을 기뻐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성령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처럼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사랑에 내어드리오니,

주여,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주님 품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와 함께 동행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위에 자기의 생명을 바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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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7. 09:27

그리스도인의 갈망

(고린도후서 5:1-21)

 

시편 37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참 따스한 말씀이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산다. 마음의 소원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힘든 삶이지만, 우리가 그래도 이렇게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대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쟁 또는 공정이라고 부른다. 우리 시대에 차별과 인간에 대한 무시(갑질)가 난무하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된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반대로, 실의와 절망이 가득한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되지 못했을 때, 자신이 못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자책감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는 상식과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나,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결정적 요인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라!’ 이 명령문을 앞에 놓아두고 잠시 묵상해 본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을까?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에서 이런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풀어간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선한용 역, 45쪽) 시편 기자가 말하는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당신을 향하여”와 같은 말이다. 기뻐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대상을 향한 ‘방향성’과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올바른 것을 욕망하고 있는가?”

 

바울은 2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간절히 사모하다’를 두 자로 줄이면 ‘갈망’이다. 바울의 갈망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바울이 아주 멋진 말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가 그토록 갈망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란 ‘부활’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부활’이라는 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즉 ‘부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은 종말의 때이다. 기독교인의 믿음과 소망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온전히 드러나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종말은 파국이 아니라 안식이다.

 

바울은 육신의 생명을 벗어버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8절). 이것을 ‘죽고 싶다’라는 말로 잘못 오해하면 안 된다. 육신 안에 있는 인간 생명은 ‘탄식(신음하고 애통하는 것) 뿐이다. 그러한 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식’에 이르는 길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죽음 같은 일이 주변에 널려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그 죽음을 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례자(길 떠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가 그 갈망을 잃지 않도록 보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히 하고,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례의 길을 걸으며 고난과 고통에 노출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능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여기서 ‘강권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쉬네코’인데, 이는 ‘통제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쉬네코’를 ‘control’로 번역한다.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대개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돈’이나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더 이상 돈이나 두려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의 삶을 내어드린다.

 

우리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와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구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의 의지와 상반되는 일을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자유로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귀찮아도, 하고싶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헌신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니스트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윤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생명(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린도후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17절에 나온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체계를 따라 산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 새로운 피조물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성령으로 산다.

 

물을 길어 나르는 항아리가 있었다. 주인은 언제나 두 개의 물항아리를 물지게 양쪽에 걸어 먼 길을 오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항아리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허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더니 왼쪽에 금이 가고 말았다. 주인이 열심히 물을 길어 항아리에 넘치게 담아도 집에 돌아와 보면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항아리를 계속 사용했다. 어느 늦은 봄 주인과 함께 물을 길으려고 가는 길에 그 깨진 항아리가 주인에게 부탁했다.

“주인님, 이제 저를 버리세요. 전 깨진 항아리라서 물이 다 새어 나가 버리니,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그때 주인은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켰다.

“이 꽃들이 보이니? 이 꽃길이 너의 작품이란다.”

“저의 작품이라뇨? 무슨 뜻인가요?”
“너의 깨진 허리춤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새어 나간 것이 아니라, 꽃길에 물을 준 거란다. 너의 몸에 상처가 나던 그날 내가 길에 꽃씨를 심어 두었단다. 돌아오는 길에 네가 날마다 물을 주지 않았다면,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꽃길을 걷지 못했을 거야.”

(최병락, <부족함>에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사람’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함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것에 욕망을 두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내어드리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향한 평안을 잃어버린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괴로운가. 나와 ‘저사람’에게서 부족함을 느끼거든, 기도하라.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인생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다른 이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서 ‘꽃길’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의 갈망.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중세의 아가씨는 ‘면벌부’를 욕망했고, 현대의 아가씨는 ‘명품백’을 욕망한다. 하나는 과도한 종교적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과도한 세속적 욕망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지 배운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부활,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한다. 아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망이 바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한 주님의 약속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 두기 바란다.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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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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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아멘

    2021.09.13 08:34 [ ADDR : EDIT/ DEL : REPLY ]

기도문2021. 8. 31. 12:13

낙심하지 않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후 4:1-18)

 

주님,

우리는 낙심하기 참 쉬운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낙심하기 쉬운 시절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는 사도 바울을 통한 복음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자유와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세상은 우리더러 자기 자신과 돈에 집중하라고 다그치지만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 굴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우리는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고

돈에 이끌리는 인생이 아닙니다.

자유와 자본의 가치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길을 잃었으며

낙심하는 날이 많고 우울한 날이 많아졌습니다.

주님,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소서.

복음에 집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할 때 우리는 종말론적인 시간, 하나님의 시간을 살면서

우리는 낡아지는 것이 아니라 날로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며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복음을 굳게 붙들고 낙심할 겨를 없이

좋은 마음을 가지고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소명과 사명을 받은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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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31. 12:10

낙심하지 않으려면

(고린도후서 4:1-18)

 

1. 요즘엔 개인주의적 문화가 하도 강해서, ‘보냄을 받았다’라든지,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말이 굉장히 구시대적인 말로 들린다.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사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보냄을 받거나, 부름을 받는 것에 대해서 요즘 사람들은 굉장한 거부감을 가진다. 그렇다 보니, 현대인들은 ‘낙심’하는 일도 많다.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이내 풀이 죽고 낙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못난 존재라는 자책감에 빠져 우울해 한다.

 

2. 요즘 한국 군대 문화를 보면 비인간적이었던 문화가 많이 바뀌고 군인들의 인권이 매우 존중 받는 군대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것 같다. 참 좋은 일이다. 요즘 군인들에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입대 했다’는 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그래서 한국도 미국처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 개인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심화되다 보니, 이제 한국도 전통적인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

 

3. “우리 시대의 소명은 자유주의를 증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자유는 모든 인류에게 권리와 능력이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은 2003년 9월 6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의 연설이다. 미국의 정치이념은 이른바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의 추구다.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가 표적으로 삼은 나라들의 민족주의, 종교를 이길 수 있다”는 이상에 근거한다. 자유주의는 민족주의나 종교를 넘어서 그러한 것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4. 우리가 사는 시대는 두 개의 ‘주의/ism’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와 자본주의(capitalism). 삶의 선택(조건)이 모두 자유와 자본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자기가 선택하되, 자본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미국은 군대를 가는 것도 모병제로서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이고, 군대를 가면 물질적 보상이 크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다. 한국도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재 한국은 징병제이지만, 그래서 자신이 선택해서 군대를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 보니, 군인들의 정신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의 선택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서 군인이 된 것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군대를 강제로 간다는 것은 굉장히 모순된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결혼하고 싶지 않은 배우자와 강제 결혼해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모든 삶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보냄을 받은 삶’, ‘부르심을 받은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이는 기독교가 점점 우리 사회에서 매력을 잃어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와 별로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기독교는 개인의 선택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가, 자본(돈)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자유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부대낌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6.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내가 선택해서, 내 마음대로,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는, 그런 모임이 아니다. 교회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자유주의적인 생각인 것이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에클레시아)는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다. 부르신 이가 있고, 부름에 응답한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이들 간의 교제(fellowship)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은 서로를 보면서 이렇게 인사해야 한다. “당신도 부름을 받았습니까? 저도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우리 부름을 받고 여기에 왔으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끼리 잘 해봅시다!”

 

7. 교회는 기본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보냄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다. 부르신 이께서는 동시에 우리를 보내신다. 부르심은 소명(calling)이라고 하고, 보내심은 사명(sending out/mission)이라고 한다. 우리는 소명과 사명의 사람들이다. 교회의 역동성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교회에 모인 이들이 소명 받은 이들과 사명 받은 이들로 가득 찬다면 교회의 역동성은 아무도 못 말린다. 마치, 나라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굳게 믿는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와 마지 못해 군대에 끌려온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의 사기가 다른 것과 같다.

 

8.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속적인 ‘자유주의’ 이념과 다르다. 자유주의 이념을 따라사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유’에 예속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목격하고,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경험한다. 그 누구도 ‘나’를 건들 수 없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최고의 이념이고, 이것을 벗어나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시대의 자유는 자신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 천명할 뿐이지,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9. 우리가 사는 시대에 사람들은 아주 쉽게 ‘낙심’할 수밖에 없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한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짊어지게 되는 것은 ‘낙심’ 뿐이다. 또한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사나워진다. ‘자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죽이는 일은 너무 쉽게 발생한다. 삶이 전쟁터 그 자체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보고 싶은 ‘섬’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경쟁’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 사회는 우울한 사회다.

 

10. 고린도후서 4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구는 “낙심하지 아니하고”이다. 우리는 수도 없이 낙심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바울은 어떻게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 바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고린도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를 낙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는데,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고린도교회는 복음을 위한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았다. 얼마나 낙심되었겠나.

 

11.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엥카케오’라고 하고, 영어로는 ‘lose heart’라고 한다. ‘엥카케오’는 ‘엔(~안에)’이라는 전치사와 ‘카코스(나쁜)’라는 낱말이 합해진 말인데, 이는,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만큼 살면서 두렵고 힘든 것도 없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마음만 늘 좋은 상태를 유지해도 어떠한 상황이 오든지 모든 것을 잘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잠언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런데,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면,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우리의 인생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12. AP News의 보도에 의하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이들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기사였다.

 

UNICEF says aid concerns are growing in Afghanistan.

UN agency for children expects the humanitarian situation in the country to worsen due to a severe drought, the onset of winter, and the Coronavirus pandemic.

The agency says 10 million children in Afghanistan already survive off humanitarian assistance and around a million are expected to suffer from life-threatening malnutrition this year.

It says some 4.2 million children, including 2.2 million girls, are out of school.

 

정치적 소용돌이 외에, 극심한 가뭄과 겨울철 진입,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등의 삼중고로 인하여 1000만명의 아이들이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해 연명하고 있고, 약 100만명의 아이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영양실조로 고통받을 것이고, 약 440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13. 풍요로운 미국의 주민들과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주민들 중 누가 더 낙심할까? 우리도 낙심하고 그들도 낙심하겠지만, 낙심의 이유가 정말 다를 것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고 살다가(자유주의) 삶에 제약이 오니 그렇지 못하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그들은 생명 자체가 너무 위협을 받아서 낙심할 것이다. 낙심의 차원이 좀 다르다. 아마도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우리들이 낙심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들으면 기가 막힐지 모르겠다. 낙심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미국에서는 약물(drug) 소비만 늘어가고,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그러한 것조차 없어 그냥 굳건하게 맨정신으로 참고 있을 것이다.

 

14. 우리가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낙심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를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선포는 단순히 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복음’ 때문이다. 우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15. 문맥에 따르면,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 바울은 그 보배가 질그릇 같은 자신들의 마음에 있다고 고백한다. 사실 여기에는 우리 시대가 최고의 가치로 삶고 있는 ‘개인(자유)’과 ‘자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우리 마음에 ‘나’나 ‘자본’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빛’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빛을 품고 있는 자들이 행하게 되는 것은 다음처럼 바울이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11절).

 

16.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죽음’이라는 헬라어는 완전히 죽은 상태인 ‘싸나토스’가 아니라 ‘죽어 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네크로시스’이다. 이 표현은 굉장히 중요한 표현인데, 이 표현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유대 당국에게 ‘넘겨주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에 넘겨졌다. 예수님의 죽음으로의 넘겨짐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구원 사건이 되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죽음에 넘겨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자신들도 죽음에 넘겨져 생명을 주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7. 이것은 ‘자기(개인/자유)’와 ‘자본’으로 꽉 차 있는 요즘 우리들의 삶과 너무도 다른 삶이다. 자기 뜻대로 안 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게 되는 요즘 사람들의 삶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살기에, 사실 낙심할 겨를이 없다. 우리가 낙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삶’, 즉 복음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18.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한 이분법은 플라톤을 중심으로 한 헬라 철학/신앙이 말하고 있는 ‘영육 이원론’과는 다르다. 영육 이원론은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기 때문에 악한 육체를 벗어나 영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겉사람’과 ‘속사람’의 구분은 시간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는냐의 문제이다.

 

19. 겉사람의 관점은 현세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현세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겉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게 끝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현세적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종말론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종말’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을 이루는 시간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모든 것이 아름다움의 끝에 도달한다. 겉으로 보면(보이는 것에 의하면) 우리가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 같지만, 속으로 보면(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면) 우리는 그와 반대로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20. 우리는 왜 낙심하는가? 우리는 왜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가? 개인과자본에 집중하게 만드는 체제는 끊임없이 낙심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래야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심하고 있으니,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의 삶이 기쁠 리 없다. 현대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을 때 기쁨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대로 소비를 못하다가 마음대로 소비하게 되는 현상을 ‘보복소비(revenge consumption)’라고 한다. 별말이 다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용어이다.

21. 낙심하기 쉽고,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기 쉬운 이 시대에 낙심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복음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과 주님께 보냄을 받았다는 사명의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부르신 이와 보내신 이가 있기 때문에 일이 좀 우리의 마음처럼 잘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 일이 잘 안 되면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속상해 하실 일이지, 우리가 속상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부르시고 보내신 이의 뜻대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성실하게 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돌봐주실 것이다. 이 얼마나 진정으로 자유한 삶인가.

 

22. 또한 답답한 현실만 바라보게 하는 이 땅의 시간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즉 종말론적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중이 아니라 더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낙심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한 마디로, 낙심하지 않으려면, 부르심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 답게, 복음에 붙들려 살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낙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다시 복음을 믿음으로 굳게 붙들고, 나쁜 상태에 빠져 있는 마음을 좋은 상태로 구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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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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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8. 22. 20:57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후 3:1-18)

 

주님,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사역을 하고 어떠한 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지

밝히 깨달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 가기 위하여

옛 언약을 벗어버리고 새 언약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문자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자유케 하는 주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정죄하고 죽이는 문자에 사로잡혀

우리 자신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후패하는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옵소서.

우리는 문자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하시고

살리는 영, 자유케 하시는 영이신 주님의 영을 마음에 새기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

풍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감을 잃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과 자유케 하는 일을 하면서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슴 벅찬 복음을 마음에 품고

삶의 형편이 어떻든지, 승리의 깃발을 들고 전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자유케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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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2. 20:55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

(고린도후서 3:1-18)

 

1. 나이가 들면 생기는 현상 중 하나는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이다.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읽다 보면, 통상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것, 즉 나이가 먹어가면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현상과는 아주 대조되는 이야기를 한다. 바울은 대표적으로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공동번역성서).”

 

2. 이뿐만 아니다. 본문의 마지막절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공동번역성서).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통념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즉 나이를 먹어가면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고,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3. 바울이 본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레토릭(수사법/화법) 지식과 두 가지의 구약 지식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레토릭 지식 중 하나는 이미 지난 시간에 배웠다. Self-commendation 레토릭(자기칭찬/자화자찬 화법). 2장 12절에서 17절 사이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문구는 전형적인 ‘self-commendation’ 수사법(화법)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를 품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이러한 진술을 할 때 사용되는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5절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4. 맞는 말이긴 하나, 이것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맥락에서 조금 떨어진 이야기다. 고린도후서 2장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과 일행)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화자찬’ 수사법이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화자찬 수사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는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다짜고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나,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전혀 경청하지 않는 태도이다.

 

5. 지금은 ‘바울(Paul)’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도 중의 사도이지만, 그 당시 바울의 사역(ministry)은 많은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특별히 유대인들(또는 그리스도 사건을 유대인의 종교 안에서만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는데, 고린도교회에도 여느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대적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바울서신에서는 대개 그러한 사람들을 ‘거짓 교사’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잘못 해석하거나,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왜곡해서 가르치고, 신앙생활의 실천을 율법적으로 전락시키는 일들을 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잡상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견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6.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바울은 대적자들과 맞서고 있는 중이다. 어떤 거짓 가르침, 아주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뒤틀어서 그것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 같은 이들에 맞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향기’는 로마의 군사문화의 배경을 가진 용어이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정복 전쟁에서 이기고 다시 부대복귀 할 때,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정복한 나라의 향품을 피우면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결기가 묻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것이다.

 

7.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두 번째 레토릭은 ‘칼 와호메르’라고 불리는 수사법이다. 영어로는 ‘from the lesser to the greater’ 용법으로 불리고, 한국어로는 ‘하물며 논리’라고 한다. 이것은 가벼운 차원의 진리(the lesser)를 무거운 차원(the greater)의 진리와 대비시키는 화법인데, 이런 것이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하물며) 주 얼굴 뵈올 때에에야 얼마나 좋을까.” (생각-좋음 -à 대면-더좋음) 이러한 레토릭은 성경 곳곳에 쓰이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 4:10-11)

 

8. 바울은 3장에서 전형적인 ‘하물며 논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다.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구약의 두 이야기를 가져오는데, 그 두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바울의 주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이야기이다. 하나는 예레미야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의 이야기이다.

 

9. 바울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바울의 사역의 신빙성(Authenticity)을 공격하며 그에게 자격을 물어왔을 때, 자신은 다른 누군가에게 소개장(recommendation)을 받을 필요없이, 고린도교회 교우들 자체가 소개장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레미야 31장의 말씀을 근거 삼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입니다.”(3절)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가져다 쓴 예레미야의 본문은 이렇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1, 33).

 

10.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변호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과 연결 짓는데,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일컬어 ‘새 언약의 사역’이라고 하고,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 칭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하면서 자신의 사역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11.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시키는 이유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아직까지도 모세의 사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8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모세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옛 언약의 사역이고, 바울 자신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라는 주장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

 

12. 바울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 언약(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6절). 옛 언약은 율법이다. 그것은 문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돌판에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은 성령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와 성령의 결정적인 차이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문자(율법)과 성령’의 차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보통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고 알려진 <예수를 시험하는 유대인들> 이야기를 볼 것이다.

 

13. 예수와의 극한 대립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조항을 들이대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처리를 말한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요 8:4-5). 바로 이 구절에 대한 바울의 코멘트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율법은 석판에 새겨진 문자로서 결국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7절).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모세의 율법대로 처리하면, 그 여인에게는 오직 죽음 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14. 율법의 기능은 매우 분명하다. 사람들을 모두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을 들이 댔을 때, 죄인이 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이 말하기를, 모세는 바로 이러한 일의 심부름 꾼이었다. 그러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들이댄 유대인들과 다른 모습을 취하신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에 있으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으냐?”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 (요 3:10-11).

 

15.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문자)은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왜 ‘새 언약의 사역’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새 언약의 일꾼’인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대적자들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 아니라 ‘옛 언약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옛 언약의 사역을 따르지 말고, 새 언약의 사역을 따르라고! 옛 언약의 일꾼이 되지 말고, 새 언약의 일꾼이 되라고!

 

16. 물론, 바울은 모세가 율법을 통해서 했던 ‘옛 언약의 사역’을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터라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건을 두고,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이유는 그 영광이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문자로 된 율법을 통한 ‘옛 언약의 사역’이 가진 한계였다.

 

17. 바울은 문자로 된 율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율법, 돌에 새겨진 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법이 더 영광스러운 사역이라는 것을 위에서 말한 ‘칼 와호메르 수사법 / 하물려 논리’를 사용하여 주장한다. “이 문자의 심부름꾼(모세)도 그렇게 영광스러웠다면, 하물며,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문자로 된 율법의 기능/사역)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하물며,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일(성령의 기능/사역/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18.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사역’을 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모세보다 더 영광스러운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직도 모세의 사역을 강요하여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 아래에 가두어 꼼짝 달싹 못하게 하려는 바울의 대적자들,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이자 일침이다. 그렇게 문자로 된 율법에 갇혀 ‘죽음과 정죄’ 안에 가두는 행위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가증스러운 일인 것이다.

 

19.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문자(율법)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였다. 그런데, ‘옛 언약’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주님께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잘 지켜야 한다.

 

20. 바울의 편지가 기독교의 성경(경전/canon)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문자의 법(율법) 아래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또한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죄책감) 아래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성령의 법을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18절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라는 것은 죽음의 일, 정죄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일, 자유케 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몸 바쳤듯이, 우리도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의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성경이 되었을 것)

 

21. 이 복음이 전해진지도 벌써 2천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성령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여전히 문자로 된 율법 아래 있는 것을 본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차별하고, 누군가를 억압하며 산다. 또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생명력 있는 삶,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성령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그것으로 인하여 짓눌리면서 산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나이 먹어가면서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서, 자신감을 잃어갈 뿐이다.

 

22. 그런 모습들은 바울이 그토록 경계하던 ‘옛 언약’에 붙들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옮아가지 못한 어린 아이의 믿음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성령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마음에 새긴, 성령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마음에 품고 생명력 넘치게 삶을 살고 하나님 아닌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살 뿐만 아니라(내 마음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고, 나는 지금 무엇에 매어 힘들어하는가 가만히 살펴보자),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지금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저 나 먹고 살려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인가?(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을 하면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과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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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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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다른 글보다 분량이 더 되고 형식이 다르다고 느껴지네요. 번호를 붙이셨고요. 흐름이 잘 보입니다.

    내용에서 깨닫는 바가 여러가지 있습니다. 살리고 자유롭게하는 성령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배우고 알고 느껴야겠습니다.

    2021.08.23 05:52 [ ADDR : EDIT/ DEL : REPLY ]

기도문2021. 8. 20. 16:49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후 2:1-11)

 

주님,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가 눈물로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황하지 않고

예배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싶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여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믿음입니다.

눈물로 쓴 편지 안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들이 즐비합니다.

그 절절한 사랑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사랑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주님 안에서 평안하길 소망합니다.

주님, 우리가 날마다 먼저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겠사오니,

우리의 삶을 돌보아 주옵소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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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0. 16:46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 2:1-11)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큰 봉변을 당했던 것 같다. 편지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봉변을 당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냈던 편지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지, 어떤 일인지 자세히 서술하지 않아도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모두 그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방문 때 당했던 봉변으로 인하여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그 사건은 다른 사건을 불러오는데, 바울이 원래 고린도교회를 또다시 방문하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려고 했던 약속을 어긴 바울의 행동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비난 거리를 제공한다. 바울이 방문하기로 했던 약속을 어기자 고린도교회에 있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을 ‘말 바꾸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바울을 비난한다. 이 소식도 바울의 귀에 들어갔고, 바울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고린도교회에 항변하지 않을 수 없어, 편지를 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고린도후서이다.

 

고운정도 있지만 미운정이라는 것도 있다. 고운정보다 미운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다. (지도 참조) 바울은 소아시아(Asia minor)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아가야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생겨났다. 소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에베소교회이고, 마케도니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빌립보교회이고, 아가야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고린도교회이다. 바울에게는 모두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바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교회는 고린도교회였다. 그만큼 고린도교회와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고린도교회는 고운정, 미운정 모두 깊이깊이 든 교회였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착과 사랑은 1장 14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전 1:14). 이것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너희가 우리의 자랑인 것처럼 우리가 너희의 자랑일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에게 자랑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신실하게 전했는데, 그 복음을 통해 고린도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교회는 순전한 복음에 의해서 탄생한 교회였다. 금으로 따지자면, 순도 99.99%의 순도를 자랑하는 금인 것이다. 그러니 자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를 방문했다가 그 교회의 어느 한 교우로 인해서 큰 상처를 받은 바울은 상심이 컸다. 그 일로 인하여 사도 바울만 상심이 컸던 게 아니라 고린도교회 전체가 술렁였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방문하겠노라’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될지 바울은 몰랐다. 바울의 사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탄하거나 형통치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목회’가 바울에게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적대자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아킬레스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하여 늘 시비를 걸었다.

 

바울 서신의 특징 중 하나는 그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자화자찬)’ 레토릭(수사법)을 자주 구사한다는 것이다. 대적자들에 맞서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러한 정황이 반영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 방문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대적자들을 향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 화법을 사용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육체의 지혜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고 강변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전 1:12절).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라고 자기칭찬(self-commendation)을 하고 있다. 거룩함과 진실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하플로스테’와 ‘에일리크리네이아’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하플로스테(거룩함)’은 ‘생각이나 마음을 두 번 접어 다르게 표현하지 않고 한 겹으로 진솔하고 솔직하게 드러냄’을 뜻한다. 에일리크리네이아(진실함)’은 ‘태양 빛으로 비추어 보아도 가려지거나 숨겨진 부분이 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진실함’을 뜻한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기칭찬’이다.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이것을 적용하면, 바울은 지금 자신이 ‘방문하겠다고 했다가 방문하지 않은 것’은 변덕쟁이처럼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그의 언어로 표현하면, 한 입으로 Yes와 No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의 지혜로 그런 것이 아니라(그곳에 가면 또다른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하는 염려 같은 것),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바울의 믿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wisdom)도 소중하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지혜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인간의 지혜는 참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지혜를 먼저 내세운다면, 거기에서는 선한 열매가 맺어지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일의 출발점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기 위하여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아브라함/이삭/야곱)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행동이 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새롭게 무엇인가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제단을 먼저 쌓고 시작했다. 이것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삶의 여정을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신앙 행위였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은 나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 지금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 앞에서 제단을 쌓는다는 것, 즉 예배 드린다는 것은 이제 내가 경험하게 될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게 될 거룩한 시간, 공간으로 내어드린다는 뜻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하고, 수많은 일을 겪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일들 가운데서 어떠한 열매(결과)가 맺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기면서 무엇이든지 시작한다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거룩한 시간과 공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은 주말(한 주간의 끝)이 아니라 한 주간의 시작이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반복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기억한다. 우리가 일주일 단위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바로 이렇게, 무엇을 시작하기 전, 구체적으로는 일주일의 삶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그 행위 자체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다.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 외에,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황하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주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삶을 보듬어 주기 위해서이다. 어려운 일, 답답한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괴로워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그 문제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라.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으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3-16).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교회의 지체들을 청하여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것’은 나쁜 일 한 것을 이실직고 고하라는 뜻이 아니라(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연약하다. 즉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의도하지 않고 뜻하지 않았던,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함께 기도할 줄 아는 신앙이 우리가 인간의 지혜로 모든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방문계획을 취소한 이유는 1절에 진술되어 있다. 이제 나는 또다시 근심 가운데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우리말성경). 대신 바울은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4절).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약 본인이 약속한 대로 방문했더라면 근심과 아픔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은 바울의 아픔이요, 그들의 기쁨은 곧 바울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묶여 있다는 뜻이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이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했다는 뜻이다. 고운정, 미운정이 듬뿍 들어 깊이 사랑했던 고린도교회를 생각하며, 바울은 눈물로 편지를 썼다. 가만히 감정 이입을 해보자. 우리는 지금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는 중이다. 바울의 그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가. 아마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했던 문제가 우리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직접 경험했던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두 손에 받아들고 읽어내려가면서 울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문제의 발단이 된 ‘어떤 사람’을 치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문제를 다룬다. 그들은 사랑과 온유로, 즉 눈물로 이 문제를 다룬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에 아픔을 가져온 사람에 대한 치리를 언급하는 6절에서 8절을 개역개정으로 읽어보자.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6-8절).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바르게 번역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더 잘 번역한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다. 뜻이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여러분은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가 더 큰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기를 권면합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마음 아프게 ‘그 사람’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은 것 같다. 그 벌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형벌 같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교회 공동체로부터 특별한 제재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가 받은 벌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용서와 위로의 단계로 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과 온유로 내리는 벌은 그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 목적이 있지 그 사람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를 용서하는 이유,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그를 이제 용서하고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이유, 모두가 다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를 읽다보면 그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던 것처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처럼 사랑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아픔은 자신의 아픔이었고, 교회의 기쁨은 자신의 기쁨이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교회에서 발생한 마음 아픈 일도 모두 사랑과 온유로 치리하려고 했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 들고 읽는 우리도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면 좋겠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사랑했던 이유는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신앙고백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교회를 단순히 ‘다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신앙고백에 의하면,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물론 사도신경에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를 구분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의 전치사를 쓰고(credo in Spiritum Sanctrum), 교회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이라는 전치사를 쓰지 않는다(credo ecclesiam).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185쪽). 교회 자체가 곧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한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눈물로 쓴 편지를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그리고 교회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신앙의 충분한 표준이 되는 가르침들을 만나게 된다. ‘이래서 고린도후서가 성경이 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본문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우게 된다. 첫째,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있는가. 둘째,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라고 고백할 만큼 사랑하고 있는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는 우리들, 주일예배는 일주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어려운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힘들어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자.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니 우리 서로 더 사랑하자.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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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8. 8. 21:57

주님 뜻 안에서 주님만 의지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후 1:1-11)

 

주님,

우리의 생명을 짓누르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어느 순간 지쳤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주 작은 일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일쑤이고

악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하나도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척 살아가느라 우리는 너무도 가식적이고 힘듭니다.

이렇게 힘들고 아픈데도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오기를 주저합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과연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좀 더 치열하게 묻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뜻 안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닥치는 그 어떤 고난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고, 주님이 위로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의지하라고, 사적인 영역을 만들어 그 안으로 빠져들게 하는 이 시대의 외침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젖어 들어,

어느 새 우리는 소라게처럼 그 안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주님의 뜻 안에 있고, 우리는 주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고난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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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8. 21:55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고린도후서 1:1-11)

 

신약성경에는 ‘바울’의 이름이 등장하는 서신(letters)가 13개 있다. 보통 그들은 ‘바울 서신’이라 불린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중에서 일곱 서신만 실제 바울이 쓴 편지들이고, 나머지는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이름을 빌어 다른 누군가가 쓴 편지들이다. 바울이 직접 쓰지 않았다고 성경으로서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후서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성경은 교회 공동체가 정경(canon)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직접 쓴 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울은 매우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서신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디아 쎌리마토스 쎄우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디아’는 ‘~에 의해, ~를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쎄우’는 ‘하나님’의 속격’이고 ‘셀리마토스’는 ‘뜻(will)’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도직은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 인하여 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게 은혜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는 표현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며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 선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요즘엔 ‘하나님의 뜻’ 운운하면 ‘꼰대’소리 듣는다. 꼰대 중에서도 상꼰대 소리를 듣는다. 요즘 가장 인기 없는 찬송이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549장)”이다.

 

발명은 과학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에서도 발생한다. ‘사적인 영역(privacy)’라는 말은 근대에 발명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사적 재산(property)의 개념도 동시에 불러왔는데, 사적 재산은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근대에 발명된 ‘사적(privacy)’ 개념에는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신적 존재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사적(privacy)’라는 말은 ‘나만의 고유 영역’이라는 뜻으로,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영역은 다른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도 끼어들지 못한다.

 

이것은 지금도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현대인들은 그것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사적 영역’을 건들면 그 존재가 누구든, 그게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든, 국가든, 하나님이든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에서 보수정치란 바로 이 사적인 영역을 지켜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정치를 말한다. 그 누구도 나의 ‘사적인 영역’ 또는 ‘사유재산’을 건들 수 없다. 이것은 ‘자유’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다. 이것은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보수정치의 근간이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사적인 영역이 보장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사적 영역’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바울의 사도직은 사적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이런 의심을 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게 맞어? 그가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야?” 바울은 이러한 의심에 대하여 단호하게,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은 정말 좋고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묻는 것이 쉽게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는 첫째, 우리가 너무 ‘사적 영역’이라는 개념에 매몰되어 있어서 그렇고, 둘째, 자신의 사적 욕망을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말 좋고 중요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사적 영역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욕망을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려는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고난과 위로를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독특한 고백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의 하나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경험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영광송을 부르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3-4절).

 

이 구절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울이 의도적으로 단어를 배열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 – 아버지 – 하나님 – 우리”가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며 경험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요, 자비의 아버지, 그리고 위로의 하나님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경험한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경험된다고 고백하는 중이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5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에서 쓰인 헬라어 동사 “파쎄마(고난들)”는 복수형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한 모든 고난들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한 사람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될까 싶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셨다. 모욕은 인격적인 모욕을 말한다. 감정이 상하는 모욕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았는데, 이것은 법적인 모욕을 말한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을 때 사람은 쉽게 죽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 대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면서 밝혀낸,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누겠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채찍질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셨다. 이것은 신체에 당하는 모욕(고난)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죽음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마지막, 결정적인 모욕이다. 이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고난들)을 쉽게 보면 안 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다. 인격적 모욕, 법적 모욕, 신체적 모욕,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 이 모든 것을 당하시고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특별한 고난의 이력을 지닌 분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은 이러한 특별한 고난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고난당하여 죽으신 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의 그 어떤 고난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깊은 고난과 연결되어 있다. 고난 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 고난들(인격적/법적/신체적/생명적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해 주실 수 있다.(룻기의 나오미(기쁨): 마라(쓰다) à 기쁨을 회복시켜 주심: 오벳(효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으로, 위로의 하나님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고난을 당했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니, 그저 눈물만 주룩주룩 나올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즘, 현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할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너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만 무엇이든지 하려고 들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보니,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하면서 당하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들어설 여지가, 공간이 없어서 그런 것을 아닐까. 요즘 시대를 돌아보면, 현대인들에게 고난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경험하는 통로일 뿐,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려 하지 않고,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의 뜻, 자신의 의지 안에 머물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도된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불평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한 바로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신 이유는 동일한 고난을 당하여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한다. 고난을 수치로 여겼던 그리스도-로마 세계에서 고난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로 여기고, 자신이 고난 당한 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이다.

 

바울은 8절에서 자신의 일행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은 나오지 않지만, 그 고난이 엄청난 고난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8b-9a).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래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했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 (주의: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가리킴)

 

이 부분을 놓아두고 학자들은 몇 가지 가설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이라는 구절과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는 에베소에서의 소요 사태를 연결한 가설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 일행에게 발생한 에베소에서 활동하던 우상판매 업자 데메드리오와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거대한 아데미 신전이 있던 에베소에서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파는 상업행위가 성행했다. 데메드리오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 일행은 데메드리오와 그의 사람들이 은으로 만든 신상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행 19:26).

 

이게 단순히 우상숭배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계를 위협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해하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19장을 자세히 보면, 적어도 그들은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9장에 소개되고 있는 일화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바울의 간헐적 질병의 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우리는 바울이 경험한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에서의 환난을 경험하고 나서 바울이 하고 있는 고백이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we would not trust in ourselves, but in God who raises the dead)”(19b절).


요즘 우리가 뉴스 기사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단어는 ‘전례 없는(unprecedented)’이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기에 오히려 감각이 무덤덤한 듯하다. 이전에 경험해 본 것이 다시 발생한다면,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텐데,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적 재난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기에 오히려 무감각한 것 같다. 상상을 초월한 사건이 발생하면 인간은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법이다.

 

기후위기 같은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일들 뿐 아니라, 개인이나 가족에게, 또는 공동체에게 발생한 고난들을 마주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신경 써서, 의식적으로, 우리의 인생이, 또는 우리의 어떠한 선택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발생하는 고난들(고통의 일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된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을 괴롭히는 고난들은 단순히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 신앙의 원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도록,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하나님 경험이 드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해 보인다.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 자기의 의지대로 할 뿐이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간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으니, 고난을 경험하더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손해다. 고난이 얼마나 괴로운가. 고난 속에서 괴로움만 당하고 만다면, 그것은 정말 큰 손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고난이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경험은 놀라운, 아주 신비로운 경험과 마주하게 되는데, 당한 고난이 그냥 괴로움으로만 남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어준다. (성경의 스토리들은 모두 그것에 대한 증언 아닌가. 아브라함, 요셉, 모세, 나오미와 룻, 다윗 등등)

 

둘째, 우리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 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적 영역의 개념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유 재산(사적 영역)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여 그것에 의지해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개념은 근대가 만들어낸 허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적 영역, 사유 재산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러한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아, 하나님만이 구원하시는구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그것이 거룩하거나 죄악되거나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힘에 겹도록 심히 고난에 처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하여, 바로 그 한 순간을 위하여 수년간 피땀흘려 노력하듯이, 우리가 평소에 열심히 신앙생활에 정진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려고 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나의 사적 재산이나 또는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한 번 가만히, 오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를 짓누르는 영적 기운은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위로인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가.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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