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2. 7. 18. 00:48

멈춤을 간구하는 기도

 

주님,

세상이 종말의 이야기로만 가득 찼습니다.

그 종말은 거룩한 주님의 종말이 아니라 비참한 우리들의 종말일 뿐입니다.

주님의 종말은 영생을 가져오지만 우리들의 종말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주님,

왜 우리는 그토록 허탄한 것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쁘게 움직이게 하는 일은 세상의 요구에 따라 너무도 잘하면서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잠시 멈추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던 대로 살던 방식을 너무도 익숙해 하고 좋아하고 편안해 합니다. 그렇다 보니, 멈추어 서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을 너무도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주님,

멈추어 서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기후위기나 허탄한 종교적 신화에 빠져 생명을 잃은 일이나 모두

우리가 멈추어 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에 경험하는 고통과 아픔들입니다.

주님,

우리를 멈추어 세워 주시옵소서. 멈추어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고 확신하는 시간을 반드시 갖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께 우리의 생명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랑의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이 정체성을 잃지 말게 하시고, 허탄한 것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날마다 기억하며, 복된 인생을 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잠시 멈추어 바라보고 구원 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십자가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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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18. 00:46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아모스 8:11-13, 골로새서 1:24-29, 누가복음 10:38-42)

 

1. 하인츠 폰 푀르스터 일리노이 공대 교수가 20여년 전에 수학 공식을 사용하여 지구 종말에 대하여 쓴 논문이 다시 회자된 기사를 보았다. 그는 인류의 인구 증가율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지구 종말의 날을 계산했는데, 그가 지목한 종말의 시간은 2026년 11월 13일 금요일이다. 4년 남았다. 하인츠 교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종말론적 예언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구의 무한대 팽창이 인류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일인가를 경고한 학문적 분석이었다. 하인츠 교수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양심 있는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 멸망을 계속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기후변화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다른 말로, 종말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무의식적 집단 자살 상태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2.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 중인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사우디 아라비아의 빈 살만 왕세자와의 회담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요즘 물가폭등에 대한 원인에 대한 분석인데, 서방 국가에서 물가폭등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에너지 공급의 차질이지만, 빈 살만 왕세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했다.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비현실적 에너지 정책은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즉, 빈 살만 왕세자는 물가폭등의 원인을 서방 국가들의 친환경 정책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석유 안 쓰려는 정책들이 물가폭등을 불러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3.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인츠 교수가 예견한 지구 종말의 날이 그대로 실현될 것 같은 분위기다. 게다가 종교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도 만만치 않다. 요즘 한국에서 신천지 활동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동안 음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신천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만방에 알려지게 되자 전략을 바꿔서 이제는 아예 대놓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방문 중 양재역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큰 싸움이 벌어져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장로교인 아줌마와 신천지 포교활동 중이던 신도들 간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장로교인 아줌마가 허망한 듯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장로교인인데 나를 이단이라고 해?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4. 요즘 신천지에서는 신천지-보혈 서사가 유행이라고 한다. 코로나는 주님이 주신 시련이고, 그 시련을 신천지는 주님의 은혜로 잘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천지 신도들이 제공한 혈장(피) 덕분에 코로나 치료제(백신)이 개발됐고, 그것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렸다는 서사이다. 신천지 신도들의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보혈이다. 생명을 살리는 보혈. 그래서 신천지는 요즘 이러한 신천지-보혈 서사를 통해서 내부결속을 다지고, 이 서사로 결속된 신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힘을 내어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5. 일본의 아베 전 총리 총격 사망 사건을 통해서 아베 집안과 통일교의 관계, 일본에서의 통일교 활동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아베 전 총리에게 총격을 가한 사람은 통일교, 즉 종교적인 이유로 그러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노컷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에는 통일교피해대책변호사연합회가 존재하고, 그 조직을 통해서 통일교가 일본 사회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밝혀지고 있다. 통일교에는 영감상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영감상법이란 ‘영계의 지옥에 있는 조상들의 고통을 없애고 후손들이 안전하려면 영적능력이 있는 물건을 구매하고 헌금을 해야한다'는 교리다. 중세의 면벌부를 흉내 낸 교리 같다.

 

6. 통일교피해대책변호사협의회에서 아베 총리 피살 사건에 대하여 이러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야마가미 어머니가 통일교에 빠지고 그로 인해서 가정의 모든 경제적인 것이 파탄이 나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헌금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으로 내몰았다는 분노심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통일교에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가진 모든 재산을 바치라고 하는 교육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통일교 신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자녀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낮구요. 그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야마가미씨도 마찬가지지만 심지어는 여러 가지 형편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교육,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도 낮고 그로 인해서 가정의 파탄을 일으키는 수많은 통일교 가정이 있습니다."

 

7. 정치, 경제, 종교, 어디를 둘러봐도, 혀를 쯧쯧 찰 수밖에 없는 종말의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만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말의 소식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세상은 옛날부터 종말을 목전에 두었다. 대략 2천 7백년 전에 활동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메시지도 종말론적이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8. 곤고한 날, 애통한 날, 죽음 같은 날이 닥친다. 특별히 기근이 닥치면 그렇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는 것만큼 종말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그러한 상황이 닥친 것에 대한 아모스의 해석은 매우 독특하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에 의하면, 종말이 닥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종말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 때문에 온다. 종말은 먼 훗날 오지 않는다. 당장 온다.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을 때 우리는 종말이 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종말은 당장 온다. 종말은 이미 와 있다.

 

9. 기후위기가 왜 닥쳤는가? 우리 인간들의 탐욕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탐욕을 그치는 일이 종말을 맞이하는 일보다 어렵다. 인간은 끝끝내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종말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이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육신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탐욕에 대한 경고를 끊이지 않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인류는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10. 신천지나 통일교도 마찬가지다. 신천지-보혈 서사나 통일교의 영감상법 같은 교리가 왜 생겨나고 사람들은 왜 그러한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몸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는가.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마음이 곤고한 사람(건강하고 건전한 하나님의 영이 가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하여 신천지가 만들어내는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뿐 아니라, 통일교에서처럼 허탄한 일에 열심을 내게 된다.

 

11. 이러한 일은 신천지나 통일교 같은 곳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말씀의 기갈 현상은 이런 곳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정통 기독교에서도 발생한다. 이단이 별거인가. 말씀의 기갈 현상을 겪어 배고프고 목마르니까 허탄한 것으로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자세히 전해주고 있는 말씀이 골로새서의 말씀이다. 골로새교회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골 2:4). 골로새교회에는 ‘교묘한 말로 교인들을 속이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넘어가 허탄한 것에 자기의 인생을 소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믿음 위에 굳게 선 신실한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12.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우리에게 좋은 지침을 준다. 마르다는 봉사(일함)의 대명사이고, 마리아는 침묵(멈춤)의 대명사이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멈추어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게(봉사) 된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추는 일과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 중에서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추는 일을 우선 순위에 놓는 듯하다. 주님은 마르다보다도 마리아를 칭찬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13.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이렇게 우선순위의 관점에서 놓고 읽으면 우리는 아주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도덕적으로 더 옳은 일이고 봉사하는 일은 열등한 일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옳지 못하다. 멈춤과 봉사는 동일하게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잠시 멈추는 일도 중요하고, 주님을 위하여 몸바쳐 봉사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14.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멈추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십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제4계명, 즉 안식일법이다. (출애굽기 중, <우리들의 십계명>을 참고하라.) 애써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멈추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멈추는 것을 불안해 한다. 멈추면 마치 죽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쉼 없이 돌아간다. 말씀의 기갈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후위기나 또는 종교적 왜곡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씀의 기갈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다의 영성(봉사의 영성)은 상대적으로 쉽게 도달할 수 있지만, 마리아의 영성(멈춤의 영성)에 도달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5. 우리는 쉽게 활동을 멈추지 못한다. 활동이라는 것은 관성을 가지고 있다. 관성은 하던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던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하던 것을 멈추어야 한다. 관성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잘 하지 못한다. 힘들어 하고 어려워 하고 불편해 한다. 일례로, 팬데믹이 처음 닥쳤을 때 우리는 하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 팬데믹이 관성을 멈추어 세웠다. 그래서 우리는 관성대로 나오던 교회를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을 힘들어 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이 관성이 바뀌어 버렸다. 재택 근무하는 게 이제 관성이 되다보니, 재택 근무를 그만 두고 회사에 나가서 일하는 것을 힘들어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직원을 뽑을 때 ‘remote work available’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으면 직원 채용이 힘들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교회에 나와서 대면예배 드리는 일이 힘들어졌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일이 관성화되어 이것을 멈추고, 교회 다시 나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6. 마르다와 마르아의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더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봉사의 일이 하찮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하는 일을 우리가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멈추지 못하면 사건이 발생한다. 기후위기가 왜 발생하는가. 탐욕을 멈추지 못해서 그렇다. 하인츠 교수가 예견한 것처럼, 2000년 동안 멈추지 않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지구에 대한 착취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신천지에서 말하는 신천지-보혈 서사 같은 황당하고 허탄한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 통일교에서 말하는 영감상법 같은 허탄한 요구에 자신의 재산을 바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 그래서 아베 총기 총격 사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멈추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17.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이 무엇을까?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바쳐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뜻일까? 물론 이러한 뜻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면,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다. 이전에 살던 대로 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울 수 없다. 멈추어 서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 겨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멸망하고 말 것이다.

 

18. 우리가 허탄한 것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빼앗겨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고 잊지 않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허탄한 것에 마음을 몸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확신이 없는 사람은 존재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기 때문에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허탄한 것에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착취당한다. 재산을 잃고 생명을 잃는다.

 

19.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생명을 그분께 맡긴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팬데믹이라는 것 때문에 주저 않아 있을 수 없다. 힘써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사랑의 역사를 일구어 나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잠시 멈추어서, 우리가 멈추어서 바꾸어야 할 관성,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을 방해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자각하고 확신하는 은혜를 간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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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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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7. 12. 06:21

선한 이웃을 간구하는 기도

(눅 10:25-37)

 

선하신 주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입니다.

선한 이웃이 없다면 이미 죽었을 존재인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선한 이웃으로서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 우리 자신을 높은 자리에, 강자의 위치에 놓는 자 되지 말게 하시고

언제나 약자의 위치에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한 겸손한 마음과 행동이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소서.

팬데믹을 지나면서

이 땅의 교회들이 모두 강도 만난 자처럼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선한 이웃이신 주님의 자비가 더욱더 간절히 필요한 시절입니다.

주여,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께서 선한 이웃이 되어서 교회를 다시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도 조금 더 힘을 내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회복하는 데 헌신하게 하옵소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을 온 몸에 새겨

우리의 몸으로 교회를 섬기게 하옵소서.

선한 이웃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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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12. 06:18

선한 이웃

(누가복음 10:25-37)

 

1. 이러한 콤플렉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 – 자기가 착하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예쁜 여자 콤플렉스 –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예뻐야 한다는 강박관념)

믿음 좋은 콤플렉스 – 자기가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믿음이 좋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2.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한 이웃 콤플렉스가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선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이다.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린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처럼 선한 이웃이 됩시다’이다.

 

3. 성경에서 이러한 정도의 교훈만 얻어도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한 이웃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요즘 기독교가 개독교니 뭐니 사회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실제적인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만큼 자선사업을 많이 하는 단체도 없다. 이는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덕분이다. 그리스도인은 싫으나 좋으나 선한 이웃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4. 그래도 우리가 좀 더 밀고 나가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지는 의미를 좀 더 알아보는 게 좋겠다. 그리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본문이 처한 정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이방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누가는 복음이 유대 땅에만 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덩어리로서 ‘누가-행전’의 정체성은 다음 구절이 담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니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5. 누가복음은 이방인에 대하여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복음이 전달되는 것의 최종 목적이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방 지역의 대표격인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드시면서 이야기의 주인공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한 것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청중이었던 유대인들, 특별히 율법교사에게는 매우 전복적으로 들렸다. 율법교사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내 가족, 내 친구, 내 민족, 내 나라 등 자기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이웃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6.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전복성’에 대하여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어느새 새로운 유대인, 새로운 바리새인이 되어 예수님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생각의 틀을 수용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차별하고 이웃의 범주와 기준을 ‘나 자신’으로 축소시켜 그 안에 갇혀 버리는, 매우 어리석고 안타까운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떤 율법교사(아주 보수적인 유대인)의 질문이었다. 누가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시험’이었다고 평가한다. 율법교사의 질문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 영원한 생명. Eternal Life.

 

8. 율법교사의 질문에 맞서 예수님은 그가 스스로 답을 말하도록 유도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랬더니, 율법교사는 율법교사 답게 정답을 줄줄 이야기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모세오경의 말씀 중 두 군데서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 말씀이고,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이다.

 

9.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100점짜리 대답이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누가는 그 정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29절). 율법교사는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교사는 한 가지 더 질문을 한다. 다시 말해, 율법교사는 자신이 얼마나 이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지, 그래서 자신은 영생을 얻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쭐한 마음으로 물은 것이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10.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신다. 그러면 일차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교사의 자기 의가 얼마나 교만한 것이고,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읽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만든 이웃의 범주에서만 말씀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이웃이란 그저 자기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자를 향한 자기애에 불과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11.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 속에서는 여러 명이 등장한다. 강도들(몇 명인지 알 수 없다),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자,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그리고 주막 주인이다. 이 비유를 연극 무대에 올리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고 싶어할까? 아마도 사마리아인을 맡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강도들처럼 나쁜 사람이거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몰인정한 사람이거나, 주막 주인처럼 주변인물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자는 절대로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에 투영하고 싶어한다.

 

12.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은 전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강도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했던 독립투사들, 성경에 등장하는 열심당원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단순히 민족적 투쟁이 아니라 신앙적 투쟁이었다. 지금도 이런 투쟁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성시화 운동’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지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자금이 필요했고,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들은 강도 짓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적 열정이 그 방향을 잘못 잡으면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드러나고 있다.

 

13. 강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열정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못 본 채 하고 피하여 지나간 것은 그들에게 인정머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불가피 하게 피 흘리고 있는 사람을 지나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사마리아인처럼 거반 죽게 된 자를 만졌다면, 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며칠 간 자가격리를 해야 했고, 자신들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14. 그러나 이것 또한 종교적 열정이 불러온 폭력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세세한 항목(피 흘린 자를 만지면 부정해진다)에는 충실했지만, 율법(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정신(스피릿)을 읽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종교적 열정만 있고 방향을 올바로 잡지 못하면, 이렇게 폭력이 발생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강도들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에게 폭력을 저지른 것이다. 이렇게 폭력은 무엇인가를 해도 발생하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발생한다. 하지만, 강도들이나 제사장과 레인인이 지닌 종교적 열정이 폭력을 불러왔다는 것은 동일하다.

 

15. 우리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과 동일화 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은 강도들이나 제사장과 레위인, 또는 주막 주인에 가깝다. 더군다나 신앙인으로서 더 그렇다. 우리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존경 받은 신앙인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많으나, 실제로 어떠한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싫어한다. 또한, 주막 주인처럼, 연루되더라도 최대한 주변부에서 수동적으로 연루되고 만다. 사마리아인처럼 실제로 어떤 사건의 중심에 서는 것은 극도로 꺼려한다.

 

16. 그러나,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동일화를 생각해 봐야 하는 등장인물은 오히려 강도 만난 자이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가. 이국 땅에서 이민자로 20년 간 살면서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동일화 하는 데서 벗어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 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이겠구나.

 

17. 우리는 나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사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 당시에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동일화 하고 싶어하는 강자처럼 그 위치가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어려운 일을 당한 이에게 선한 일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베푸는 자가 베풂을 받는 자보다 강자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내 가족, 내 친구, 내 민족, 내 나라를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을 때 그를 도와주면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율법교사도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고 “네 생각에는 누가 장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사마리아인이요!”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마지 못해 돌려서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여전히 그는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받아들 수 없었던 것이다.

 

19. 우리는 나 자신을 강자가 아닌 약자의 위치에 놓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실제로 누가복음이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더러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도덕적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이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줄 참된 선한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다. 우리는 거반 죽게 된 자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어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20.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 팬데믹을 지나면서, 강도 만난 자, 그래서 거반 죽게 된 자는 교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팬데믹 동안 교회 상황을 조사한 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에 비해 대면예배 회복율은 70% 정도이고, 목회자의 절반은 번아웃 상태이고, 인력이 없어 큰 교회에 비해 여러가지 활동을 못한 작은 교회들은 대부분 문을 아예 닫거나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팬데믹을 구실삼아 교회를 떠난 사람도 많고, 교회를 옮긴 사람도 많다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방문한 모든 교회들이 팬데믹 동안 ‘거반 죽게 된’ 경험을 했고, 아직도 회복이 안 돼서 모든 목회자들이 힘들어 했다. 우리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21. 우리가 좀 더 주님께 은혜를 간구해야 할 때이고, 우리가 좀 더 힘을 내야 할 때이다. 참된 선한 이웃이신,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주님께서 강도 만난 자 같은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그래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선한 이웃이 되어, 우리도 주님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좀 더 힘을 내서 교회를 살려야 할 때이다.

 

22. 선한 이웃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 없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는 우리 더러 선한 이웃이 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도덕적 부담을 지우시는 말씀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우리에게 직접 선한 이웃이 되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선한 이웃인 주님의 돌봄을 받아 기력을 회복해서 남은 힘이 있거든, 그 힘 가지고 우리도 주님처럼 조금이나마 어려운 이들에게 다가가서 선한 이웃이 되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선한 이웃 콤플렉스로 선한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선한 이웃이신 주님께 받은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는 자가 되면 좋겠다.

 

23. 그리고 우리, 꼭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상황에 처해진 교회를 좀 더 진지하고 진실하게 돌봤으면 좋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주님의 몸이 강도를 만난 것처럼 어렵다면, 열일 제쳐 놓고 돌보는 것이 선한 그리스도인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기력을 회복하여 선한 이웃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내자. 선한 이웃인 주님처럼 우리도 선한 이웃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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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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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7. 6. 03:59

겸손을 간구하는 기도
(왕하 5:1-14)

 

우리가 겸손하기를 바라시는 주님,

우리가 겸손해져서

눈과 귀가 열리고 감각이 열리기를 바라시는 주님,

그래서 당신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바라시는 주님!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들을 당할 때

절망하거나 슬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인 것을 믿나이다.

요단강, 세례의 자리로 내려가

자기 몸을 일곱 번 씻어 치유 받고 구원 받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하여

겸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배웁니다.

주여,

우리의 눈을 겸손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귀를 겸손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감각을 겸손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하시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하시며

느끼지 못하던 것이 느껴지게 하소서.

그럴 때 우리의 손과 발이 선해지며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을 향하겠나이다.

치유와 구원의 주님,

겸손한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소서.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시나이다.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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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6. 03:58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이다

(열왕기하 5:1-14)

 

 

1.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은 참 중요한 것 같다. 구약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재현되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재현되고 있다. 열왕기상에서는 엘리야가 활약하고, 열왕기하에서는 엘리사가 활약한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사역을 재현하고 있다. 엘리사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흥미로운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2. 나아만 장군 이야기 전에 아주 짧게 나오는 보리떡 이십 개 이야기를 보면 이렇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 4:42-44).

 

3. 이것은 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엘리사의 이 이야기는 가뭄이 들었을 때 발생한 일이다. 가뭄 가운데 수확한 곡물을 바알에게 바치거나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기적과도 같은 곡식이 된다. 우리가 나눔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해서 그렇지, 나눔은 이런 큰 기적을 일구어 낸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나눔의 가치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 자신만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자기 집중성을 내려놓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에 자기를 헌신하는 것 자체가 신앙이다.

 

4. 위기의 때에,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팬데믹이 처음 닥쳤을 때 그로서리의 식료품이나 공산품이 남아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쉽게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중국에서도 봉쇄령이 내려지면 식료품 가게는 금방 동이 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신앙인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위기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5. 평소에 위기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인간은 상황에 휩쓸리기 십상이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사람도 가뭄의 때에 상황에 휩쓸릴 법했으나 그가 자신의 수확물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먼저 가져온 것은 그가 평소에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행동이다. 위기의 때에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위기의 때에 자신 만의 안위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을 돌아보면, 위기의 때에 힘이 되어준 사람이 기억에 남는 법이고, 힘이 되어준 사람들을 위해서는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법이다. 위기의 때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6. 열왕기하 5장 전체에 걸쳐 나아만 장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면, 나아만 장군의 위상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아만 장군에 대한 수식어는 화려하다. “크고 존귀한 자”, “아람을 구원한 자”, “큰 용사” 등의 수식어가 그에게 붙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수식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한 용어가 등장한다. “나병환자더라.” 그렇다. 나아만 장군은 화려한 명성을 지녔으나 나병환자였다.

 

7. 열왕기하 5장 전체는 나아만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막상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성경은 나아만 장군보다 이름 없는 한 아이에게 주목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 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2절). 나아만 장군의 병 치유와 그의 구원은 바로 이 이름 없는 한 아이에게서 시작된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3절).

 

8. 나아만 장군이 평소 같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노예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어둠이 짙으면 작은 빛도 환하게 보이는 법이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이렇게 우리가 절박할 때, 그리고 한없이 겸손해져 있을 때 들린다. 우리는 평소에 겸손을 연습해야 한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높아진다. 교만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9.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라는 이어령 선생의 시집에 보면, 이런 시가 있다.

 

피었다

시드는 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누군가 울면

나도 따라 운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흐린 날 안개 속에 산이 없어지고

답답한 유리창에 빗방울이 흐르면

나의 눈에 눈물방울이 구른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신문을 읽다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너와 비슷한

이름을 발견하면

어느새 차가운 눈물이 흐른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거울 속의 나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면

거기 남의 얼굴처럼 주름진 모습

눈물이 흐른 자욱이 보인다

정말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10. 딸을 잃고 한없이 겸손해진 시인은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눈과 귀가 열리고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마음도 이랬다. 승승장구할 때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법한 노예 소녀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11. 눈이 가려 있고, 귀가 닫혀 있고, 감각이 무디어져 있다면, 그것은 내가 교만해져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못 느끼던 것을 느끼면, 비로소 내가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지만, 그의 교만은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의 홀대에 기분 상해한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극진하게 자신을 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아만의 예상은 빗나갔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10절).

 

12. 나아만 장군은 자신을 향한 엘리사의 이러한 처사에 분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아만 장군을 치료와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이름 없는 ‘종들’이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절). 이야기의 주인공은 위대한 나아만 장군이지만,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권력과 재력을 지닌 나아만 장군이 아니라 권력과 재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이 주목하는 대로, 권력과 재력을 지닌 나아만 장군에게 집중하기 보다 권력과 재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에게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3. 나아만이 궁극적으로 나병에서 치유를 받고 구원받게 된 것은 이름 없는 자들의 활약 덕분이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에게서 예상치 못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종들 덕분에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치유와 구원의 길로 다가설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성이고 구원의 성격이다. 구원은 언제나 예상치 못하게 온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발생한 어려운 일 때문에 숨 막혀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 그런 존재를 무시하지 말고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14.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는다. 그리고 그는 병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새로운 생명)을 받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너무도 명백히 복음서의 ‘세례’에서 재현되고 있다. 세례는 무엇보다 겸손의 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리이다. 겸손하지 않으면 죽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겸손한 자리에서 치유와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15.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만나 치유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겸손의 자리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병은 그의 위대함을 무색케 하는 병이 아니라 그를 겸손으로 이끈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병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는 엘리사에게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가 엘리사에게 나아가지 못했다면 그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지 못했을 것이다.

 

16. 그러나, 그는 결국 요단강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몸을 씻고, 나병에서 놓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던 자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겸손의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들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 일들 때문에 힘들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에게 치유와 구원이 임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들어주시길! 우리를 겸손하게 하실 때 슬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길! 우리에게 치유와 구원이 임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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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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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타이틀 42 / Federal Title 42]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하고 나서 미국 연방정부는 타이틀 42라는 법령을 제정해서 미국 남부 국경을 통해서 망명을 하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이유로 그들의 망명신청을 거부해 왔다.

 

AP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법 때문에 이민자들은 2020년 3월 이후에 190만 회 이상 추방되었다. 세상이 혼란해지면 사람들은 보수적인 자세(자기 생명을 먼저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 존재'로 불린다.

 

법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것이다. 법은 자기의 테두리 안에 있는 존재를 보호하지만, 자기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19세기 이후로 민주주의 체제가 각 국가의 운영 방식으로 들어서고 법치국가를 표방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법의 중요성은 더 부각되었다.

 

법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현대사회는 법 문제가 아주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었고, 법 바깥으로 밀려나면 곧 죽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법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깊어졌고, 법의 테두리 바깥에 머무는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명명한 철학자도 생겨났다.

 

연방 타이틀 42에 의해서 코로나19 확산 방지의 목적으로 망명 신청 거부를 당한 이민자들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호모 사케르'이다. 그들은 법 바깥으로 밀려나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그들이 경험했을 이중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자주 법조문과 성령의 법을 대조시킨다. 문자로 기록된 법령에 의해서 사는 자와 영혼에 새겨진 성령의 법에 의해서 사는 자를 대조시킨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은 법조문에 의해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자로 인식된다.

 

법조문과 성령의 법은 무엇이 다를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법조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차별한다. 법은 자기 테두리 안에 들어온 존재를 보호하지만(물론 이것도 모호하다) 자기 테두리 바깥에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법조문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성령의 법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안과 바깥이 없다. 포괄적이다. 그래서 성령의 법은 모든 존재를 구원한다.

 

개개인이 성령의 법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대인지 모른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법조문은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 있는 존재만 보호하고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에게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러한 법조문을 가진 사회에 살고 있더라도 개개인이 성령의 법 안에서 산다면 법조문이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는 '호모 사케르'를 얼마든지 구원할 수 있다. 법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법,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기 보존 욕구가 강한 국가라는 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법 체계를 넘어선 성령의 법 안에 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더 중요하다. 국가(집단)은 자꾸 존재를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려 들겠지만, 그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를 성령의 법으로 다시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땅에 성령의 법에 의해 움직이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법이 법조문을 넘어서는 아주 강력한 사랑의 법이라는 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법 바깥에서 죽으신 분이고, 호모 사케르로서 이 땅의 모든 호모 사케르를 구원하신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성령의 법으로 산다면, 그것만큼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연방 타이틀 42가 어서 빨리 폐지되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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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5. 30. 08:12

하나님을 메고 다니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40:1-38)

 

주님,

출애굽기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경험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웁니다.

주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대면하여 만나시고

그 절대적인 경험을 일상에서도 이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셨음을 봅니다.

주님,

우리도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악에 희생당하지 않고

저주의 길로 들어서지 않으며

온전하게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막이 필요함을 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보게 하시고

우리의 발걸음마다 하나님을 메고 다닐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과 지혜를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몇 발자국 가다가 불평과 원망에 휩싸이게 되고

죄의 길로, 저주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우리의 연약한 삶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신앙의 일상화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주님,

성막이 완성되어 그 성막이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놓였을 때

그들이 그들의 두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일상 가운데서 보는 광경은

너무도 경이롭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두 눈으로 보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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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30. 08:08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출 40:1-38)

 

1. 인간은 죄인이고, 세상은 죄로 물들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보존하고 싶지만, 때로,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들, 또는 우리가 저지르는 일들을 보면, ‘죄’라고 하는 용어는 인간에게, 또 이 세상에서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이 고개를 들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이 죄 많은 세상을 견딜 수 없기에, 이 죄 많은 세상을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간절함이 베어 있는 것이다.

 

2. 영국의 작가 존 번연이 1687년에 쓴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라는 소설이 있다. 존 번연이 활동하던 시대는 가톨릭에 의한 개신교 박해가 난무하던 때이다. 존 번연 자신은 종교가 없었으나 청교도였던 여인(Mary)과 결혼하여 개신교인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역경의 삶을 살았다. 박해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기 때문에, 그 당시 종교전쟁은 무서웠다.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 신앙을 갖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와 같았다. 요즘 우리가 헌법에 의해서 보장받고 있는 ‘신앙의 자유’는 오랜 세월 전쟁을 통해 일군 피의 열매이다.

 

3. 번연이 살던 시대의 국왕인 찰스 2세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제외한 기독교 교파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침례교도였던 존 번연은 비밀집회(허가 없이 복음을 전하는 집회)를 연 혐의로 12년 동안 투옥되었다. <천로역정>은 감옥에서 탄생한 불후의 명작이다. 존 번연의 인생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17세기(1600년대) 영국의 종교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고, 어떠한 분위기(또는 어떠한 심정)에서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으로 이주해 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4. 그런데, 그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참 재밌는 사실이 있다. 종교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들은 미국 땅에서 또다른 박해를 저지르게 된다. 미국의 작가 나다나엘 호손이 쓴 <주홍글씨>라는 소설에 그 이야기가 잘 담겨 있다. 청교도들(Puritians)은 서방 기독교가 너무 제도화되고, 영국 국교회가 너무 국가중심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제도중심과 국가중심의 신앙을 거부하며 성경중심(복음중심)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겠다고 가톨릭, 또는 영국 국교회와 한 판 대결을 벌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미국 땅에서 자신들을 박해하던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이들을 처참하게 박해 한 일들을 보면, ‘이건 뭐지’라는 어리둥절한 마음을 갖게 된다.

 

5. 신영복 선생이 <담론>이라는 책에서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미를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잉카와 아즈텍에는 전설이 있었는데, 수염이 하얗고 피부가 하얀 백인이 언젠가 자기들을 도와주러 나타나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미를 침략하러 갔던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그 전설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 전설 속의 인물인 양 행세한다. 남미는 콜럼버스가 상륙한 이래도 약 1,600만명이 살해당한다. 그래서 남미인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점령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코르테스와 피사로를 원망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참으로 절묘했다.

 

6. 남미의 침략자들은 당연히 남미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부렸다. 침략자들과 함께 한 가톨릭 신부들은 전형적인 부패세력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남미인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을 했고, 또한 남미인들과 혼혈을 이루어 살았다. 그러는 와중에 1,600만명의 남미인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북미를 점령한 청교도인들은 남미의 부패한 가톨릭 신부들에 비해서 엄청 청렴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 청교도인들이 북미를 점령하면서 죽인 인디언의 숫자는 4천에서 6천만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신영복 선생은 이런 말을 한다. “부패와 청렴의 의미가 역전되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334쪽).

 

7. 부패세력은 그래도 자신들의 점령지 시민들을 개종하려고 노력하고, 그들과 혼혈을 이루어 살려고 노력을 했는데, 청렴세력은 개종이나 혼혈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패한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보면 청렴한 사람들이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부패란 무엇이고, 청렴이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이렇게 알쏭달쏭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고, 이 세상은 죄에 물들어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8.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구약에서 출애굽기만큼 역동적인 복음을 증거하는 곳은 없다. 그래서 나는 출애굽기는 구약의 복음서라 부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출애굽기는 우리 삶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광야’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애굽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애굽을 죄인의 삶이라고 칭하고, 가나안을 의인의 삶이라고 칭한다면, 우리의 삶은 죄인의 삶과 의인의 삶 어디쯤 중간에 있다는 것이다.

 

9.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좀 더 부드러운 말로 고쳐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형편없는 삶이 되기도 하고 좋은 삶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모세 오경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우리 앞에는 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놓여 있다. 신명기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

 

10.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하듯이,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절대적인 것이다. 시내산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은 ‘광야’라고 하는 척박함과 무미건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애굽으로 되돌아 갔을 것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출애굽기의 또다른 버전일 뿐이다. 이 책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장망성/장차 망하게 될 도시/애굽)’을 떠나 천국(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또는 역경들을 담고 있다.

 

11. 출애굽기에서도 그렇고 천로역정에서도 그렇고, 이스라엘이, 또는 크리스천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산에서 내려와 성막(성소)을 만든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일상화시키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들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그저 척박한 광야 밖에 없었다.

 

12. 40장으로 되어 있는 출애굽기에서 장장 15장이 성막에 대한 이야기다. 열 다섯 장에 걸쳐 성막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누가 성막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일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아주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너무 꼼꼼해서 지루하고 재미없다. 게다가 우리는 성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고 느낀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성막이 가진 의미를 함께 상실하고 만다.

 

13. 하지만, 적어도 한 번쯤은 출애굽기 25장에서부터 시작하여 40장에서 끝나는 성막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삶을 꼼꼼하게 돌아보는 것이다. 나의 일상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나의 일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 하나님 경험의 일상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내 삶 속에는 성막이 세워져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14.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꼼꼼하게 지어서 비로소 봉헌한 날, 즉,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친” 후, 시내산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진중, 즉 이스라엘의 일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넘쳤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4-38 부분). 이스라엘은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한걸음한걸음 옮기는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은혜를 두 눈으로 보았다.

 

15. 이스라엘은 성막을 만들어 광야에서 그것을 메고 다녔다. 성막은 단순히 ‘물건이나 물품’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성막은 ‘하나님’이었다. 그들이 메고 다닌 것은 단순히 성막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메고 다녔다. 하나님을 메고 다니니 그들이 아무리 광야 길을 걸었지만 광야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길은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광야 길을 인도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길을 잃지 않고,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16. 너무 멋지고 장엄하지 않은가! 길을 잃어버리기 딱 쉬운 이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광야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길을 잃어 멸망의 도시로 되돌아 가거나, 길 가는 중에 죽어버리거나, 길 가는 중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 휘말리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출애굽기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것’ 밖에는 없다. 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광야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주의 길로 들어서 멸망하지 않고 복의 길로 들어서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방법, 복음을 알고 있다.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17.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하나님을 메고 다니면,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여주실 것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우리로 하여금 마시게 하실 것이다. 가야 할 방향으로 온전히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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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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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5. 23. 15:02

예배 노동자(가능주의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36:1-7)

 

주님,

구약의 복음서, 출애굽기를 통하여

성막 이야기의 중요성과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

가능주의자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 행복한 경험을

일상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예배는 노동인데, 우리는 예배를 만들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 위해서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고

팬데믹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예배의 자리에 ‘힘을 다해’ 나오지 못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제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사모하게 하시고

그 은혜의 샘물에 흠뻑 젖을 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들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내산에서의 절대 경험을

성막 제작을 통하여 가능하게 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의 절대 경험을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일상에서 가능하게 하는

가능주의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다해, 노동의 수고로움을 통해

예배를 만들어 가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그 어떤 것도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막아서지 못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성령을 통해 모든 것을 가능하게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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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23. 15:01

가능주의자

(출애굽기 36:1-7)

 

1. 1999년도에 개봉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강렬하게 시작한다. 직업도 가족도 모두 잃은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가 20년 전 첫사랑 순임이랑 소풍 갔던 곳의 철로 길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철규로 시작한다. 우리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에겐 팬데믹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는 모두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신앙생활의 풍경이 너무도 바뀌어 버려서 우리는 아직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2. 사실, 풍경이 바뀐 것은 팬데믹의 영향도 있지만, 과학기술 발달의 영향이 더 크다. (물론 이외에도 정치, 경제적, 문화적 요인도 있지만) 만약 온라인 플랫폼이 발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과 사뭇 다른 신앙생활의 풍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신앙생활(교회의)의 옛 풍경을 되찾자고 온라인 플랫폼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안에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한결같이 스마트 폰(동네 사람 스티브 잡스, 공공의 적)을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스마트폰을 없앴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변화(비가역적 변화/irreversible change)이다. 적응하면서 건전한 문화를 창조해 나갈 수밖에 없다.)

 

3. 팬데믹과 관련된 것 말고, 우리들 인생 가운데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지 않은가? 대개 우리는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재미 있는 추억이 있거나, 아니면 사랑받았던 시절 말이다. 인생이 재미없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으면, 우울해지고 별로 살고 싶은 생각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4. 나는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학창시절을 참 행복하게 보냈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가고 싶다. 왜 나는 학창시절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곰곰이 돌아보니까, 그 시절 나는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과 교회 학생부에서 정말 재미난 추억을 많이 만들었고, 무엇보다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 내가 요즘은 그냥 전형적인 아저씨가 되어서 사람들이 잘 믿지를 않는데, 학창시절에 나는 늘 전교적으로 유명인사였다(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모두 그랬다). 돌아보면, 내 인생 가운데 지금이 가장 유명하지 않은 시절을 보내는 것 같다.

 

5.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이 있다. 발생했던(또는 존재했던) 어떤 일/사건/경험 등을 지금 다시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현재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특정한 시기,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이유는 그 행복을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 속에 재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우리가 결혼을 하는 이유가 뭔가? (사랑해서!) 요즘엔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도 많이 퇴색이 됐다. 최근 뉴스를 보니까, 소개팅 앱이 있는데, ‘고학력자가 아니고, 연봉 3천 이하 남성’은 가입 자체가 안 되는 앱을 어느 결혼정보회사에서 개발해서 뭇매를 맞았다. 여성 가입 제한은 없는데, 남성은 이렇게 가입 제한을 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남자들이 이래저래 참 살기 힘든 사회인 것 같다.

 

6. 결혼은 일차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게 자유연애의 정신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런 가장 기초적인 사랑의 자유조차도 빼앗는 사회가 된 것 같다. (마르크스가 이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자본론을 쓴 것.)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게 아니라, 삶의 안위/신분상승, 이러한 사랑 이외의 가치가 사랑의 가치를 밀어내는 것 같다. 연애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고, 결혼은 돈 많은 사람하고 하고, 뭐 이런 가치가 만연한 것 같다. 사랑의 가치를 좀 잘 보존하고 지키면 좋겠는데, 세상이 잘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가 사랑해서 결혼한다면, 결혼하는 이유는 연애할 때의 그 사랑의 상태가 너무 좋아서 그것을 영원히 재현(representation)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재현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영원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랑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위대한 것이다.

 

7.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구약성경이 중요한가, 신약성경이 중요한가? (엄마가 중요한가 아빠가 중요한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가, 아빠를 더 사랑하는가?) 기독교인들은 왠지 모르게, 신약성경을 구약성경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초대교회사 수업에서 공부했듯이, 그러한 생각은 영지주의적인 생각이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교회에 영지주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증거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그래서 기독교 성경은 신구약(구약 39권/신약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8. 출애굽기는 구약의 복음서다. 신약의 복음서는 출애굽기의 재현이다. 좀 더 큰 틀에서 말한다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재현이다. 구약성경을 모르면, 신약성경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산으로 간다. 가장 심한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한 구약성경의 재현이다.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려면, 로마제국에 대한 이해보다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 광범위하게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공부 할 때, 구약성경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라. 그래야 신약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이 구약성경 공부 많이 한다고 절대로 유대인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9. 당장,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시내산 언약에서 핵심적인 용어는 8절에 나오는 ‘언약의 피(the blood of the covenant)’라고 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마지막 만찬에서 재현된다. 마지막 만찬(성만찬)에서 핵심적인 용어가 무엇인가? 언약의 피’다. 이렇게 신약은 구약을 재현한다. 구약을 모르면 신약에 왜 그러한 용어와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10. 출애굽기는 ‘복음’, ‘십자가 사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구약성경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하면, 홍해 갈라지는 이야기가 너무 웅장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만 기억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크게 세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1)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열 가지 재앙과 홍해 이야기) 2)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이야기(십계명 이야기), 3) 성막 이야기. 그런데 우리는 출애굽기를 생각할 때, 성막 이야기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안타까운 현상이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성막 이야기가 25장부터 40장까지, 장장 15장에 걸쳐서 나온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11. 출애굽기와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출애굽기 24장 1-11절이다(언약의 피). 이곳은 시내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이 체결되는 장면과 언약 체결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연회(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이 재현되는 신약성경은 복음서의 최후의 만찬 장면이다(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도 마찬가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피의 언약을 맺고 그들과 연회(잔치)를 벌인다. 우리는 이것을 ‘성만찬’을 통해 재현한다. 성만찬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예배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12. 출애굽기에서 성막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성막 세미나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성막에 대해서 자세하게 공부할 필요는 없다. 출애굽기 25장 이후를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도 25장 이후에 나오는 성막에 대한 율례가 복잡하고 지루하기 때문에 읽어 내려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슨 암호 같기도 하고 방정식 같기도 하다. 그래서 골치 아프다. 그렇다 보니, 성막 이야기가 마음에 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성막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성막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13. 성막은 무엇일까? 성막은 시내산 언약의 재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0-11). 이스라엘에게 이 경험은 절대 경험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너무 절대적이어서 그것을 영원히 현재화시키고 싶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 사랑을 재현하듯이(로미오와 줄리엣 보면, 그 사랑을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재현할 수 없으니까 좌절하고 절망해서 독약 마시고 막 죽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을 영원히 현재화시키기고 싶었다. 성막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재현이다.

 

14. 출애굽기에서 가장 따뜻한 구절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다.

 

“모세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주님께서 그 마음에 지혜를 더하여 주신 기술 있는 모든 사람, 곧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기꺼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의 제사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데 쓰라고 가져온 모든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았다. 그런 다음에도 사람들은 아침마다 계속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 왔다. 그래서 성소에서 일을 하는 기술 있는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세에게로 와서, 이르기를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데에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것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진중에 명령을 내려서 '남자든 여자든, 성소에서 쓸 물품을 더는 헌납하지 말라'고 알리니, 백성들이 더 이상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물품은 그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을 만큼 있었다. (새번역, 출 36:2-7)

 

15. 브살렐과 오홀리압. 성경을 읽어본 사람, 성경을 좀 아는 사람, 성경공부를 좀 해본 사람과 성경을 안 읽어본 사람,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 성경공부를 안 해본 사람을 구분 짓게 해주는 이름들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아는 사람은 ‘그래도 내가 성경공부를 좀 했구나’라고 생각하면 되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 분발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성경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인격이다. 사귐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공부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사귐을 가져야 아는 것이다. 성경을 아는 만큼 신앙이 깊어진다. 이것은 불편의 진리다. 성경을 모르면서 신앙이 깊어질 수 없다. 그것은 배우 정우성을 만난 적도 없고 사귐을 가진 적도 없으면서 정우성을 잘 안다고, 친하다고, 거짓말하는 것과 같다.

 

16. 성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재현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것이 재현되려면, 성막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율례대로 성막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재현될 수 없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성막을 만든 사람들이다. 오늘 말씀 제목과 연관해서 다른 말로 하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가능주의자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다. 성막을 만든 이유는 시내산 경험의 일상화를 위해서이다. 천상에서의 축제가 일상에서 울려 퍼지게 한 자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가능주의자이다.

 

17. 성막과 성전의 기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기독교의 예배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일상화이다. 2천년 전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있었던 유일회적인 구원 사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복음의 선포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 예배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예배의 관점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말하면, 그들은 예배자들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많은 노동을 해야만 했다.

 

18. 우리가 잘 모르는 예배의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배는 ‘예전(Liturgy)’라고 부른다. Liturgy는 ‘노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막을 만든 사람들은 요즘말로 하면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을 통해서 성막을 만든 것이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 예배를 만든다는 것은 성막을 만드는 것처럼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다. 노동만큼 창조적인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창조해 낸다. 

 

(노동 안하고 돈 버는 것을 불로소득이라 한다. 노동 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불로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이라는 뜻은 노동(노력)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노동과 노력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보잘것없는 노동과 노력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주신다는 의미에서 은혜인 것이다.)

 

19. 세상에 그냥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무엇이든지 노동이 필요하다. 피아노 잘 치는 거, 얼마나 힘든가. 엄청난 시간과 노력, 즉 노동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한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서 엄청 노력을 한다. 아이들도 피아노 치느라 엄청 고생한다. 물론 이상한 현상도 있다. 피아노 배우기 싫다는 아이한테 그렇게 피아노 배우라고 푸쉬해서 아이가 피아노 배우고 난 후, 아이가 대학 들어갈 때 피아노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은 당장 때려 치우라고 한다. 애들이 헷갈려한다. 하기 싫은 거 배우라고 할 때는 언제고, 본격적으로 배워보겠다는데 이제와서 왜 때려치우라고 하는지.)

 

20. 우리가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통해서 단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다. 예배는 노동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만들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가능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성막을 통해서 시내산에서 경험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일상화 할 수 있었다. 특별한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 경험의 일상화는 더 중요하다. 어떤 계기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한 경험이 중요하지만, 그 경험이 그때뿐이면 무엇 하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내가 언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뿐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 아득하죠. 시간이 지나면 감정과 감동이 없다.) 그러나 경험의 일상화는 절대 경험에서 온 풍성한 사랑과 은혜 안에 계속해서 거하게 한다.

 

21. 예배는 신앙의 샘물이다. 에스겔서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완전히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환상을 본다. 예배가 무너져 있으니, 이스라엘이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는지 모른다. (인생이 괴롭거든 자신의 예배를 돌아보라. 무너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배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결국 이겨낸다. 지금 아무리 행복해도 예배가 무너진 사람은 미래가 가장 불안한 사람인 거다.) 그래서 에스겔은 무너진 이스라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기도할 때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은 너무도 자세해서 마치 설계도면을 보는 것 같다. 에스겔의 환상은 47장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에스겔은 성전에서 흐르는 물을 본다.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점점 많아지더니 강을 이루고 헤엄쳐서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크고 깊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지만, 에스겔의 환상, 예배가 회복되는 환상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22.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노동을 통해서 성막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세워지면 좋겠다. 예배는 신앙의 샘물이다. 생수가 예배의 자리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은혜의 강에 몸을 담그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한다. 이것은 잔소리가 아니라 진리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내산의 경험이요, 십자가의 경험이다. 예배는 그 경험의 일상화이다. 예배를 만드는 자, 예배에 나오는 자는 모두 노동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만들고 나와야 한다. 우리의 노동이 하나님 만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가능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

 

23. 팬데믹으로 인하여 신앙의 일상이 형편없이 무너진 이 때에 우리 모두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힘을 다해 예배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이 어려운 시대를 넉넉히 이겨내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당신은 가능주의자입니다!” “당신은 예배 노동자입니다.” “우리 함께 힘을 다해 예배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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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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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위기]

 

"자유와 민주주의 원리상 피지배자에 의한 지배자의 통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치적인 힘은 경제적인 힘을 통제할 수 있다. 경제권력은 정치권력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위협하는 힘이다. 피지배자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지배자를 통제할 수 있고, 그 통제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경제권력도 통제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76쪽)

 

한국의 국가체제를 고려해 볼 때 여기서 피지배자는 '국민'을 말하고, 지배자는 '선출직 공무원'을 말한다.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용어를 많이 접한다. 왜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일까?

 

위의 문장을 통해서 파악해 보자면,

첫째, 피지배자에 의한 지배자의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일수도 있고, 경제생활(먹고사니즘)에 매여 있는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또는 여력없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먹고사니즘의 지옥에 처박아 놓고 절대로 구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가진 결정적인 아킬리스건인데, 대한민국은 태생부터 국가-재벌 주도의 경제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즉, 한국에서 정치권력은 곧 경제권력과 그 뜻을 같이 한다. 정경유착이라는 말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한국의 상황에서는 정경유착보다 정경애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뜻이다. 이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길은 시민사회가 깨어서 민주주의의 원리가 잘 작동되도록 견제하고 요구해야 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나아갈 바를 생각해 본다. 교회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에 축복을 빌어주며 그들을 성화시키는 데 혈안이 되고 말면, 결국 민주주의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민사회를 이끄는 리더가 되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견제하고, 그들에게 민주적 통제 안에 머물러 있기를 강력히 요구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주도해 나간다면, 교회는 민주주의의 견인차가 될 뿐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부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선(goodness)의 실험 현장이다. 인간이 선을 어느 정도까지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현장이 민주주의이다. 종말(선의 실현)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현장에서 선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어디까지 선을 실현할 수 있는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선의 실현을 끝까지 밀고 나가며 최선봉에 설 수밖에 없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민주주의는 이것의 실천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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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5. 16. 16:47

언약의 피를 간구하는 기도
(출 24:1-11)

 

주님, 구약성경에서도 신약성경에서도 핵심 단어는 ‘언약의 피’입니다.

우리는 언약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선다는 것은 삶이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달라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더 좋은 삶, 더 행복한 삶, 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원하는 우리들이지만,

막상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언약의 피’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다 보니, 더 좋은 삶, 더 행복한 삶, 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엉뚱한 것에 가까이 다가서서 그것을 향하여 은혜를 간구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주님, 우리는 오직, ‘언약의 피’를 기억합니다.

언약의 피를 무겁게 생각합니다.

언약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을 입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언약의 피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다시 우리에게 뿌려 주옵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주님의 은총을 입고

삶의 모든 문제들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언약의 피. 언약의 피. 언약의 피.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날마다 언약의 피를 묵상하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언약의 피를 모든 이들에게 쏟아부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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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16. 16:46

언약의 피

(출 24:1-11)

 

1. 군사부일체. 군주(임금)와 스승과 아버지는 동일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이 군사부일체라는 개념 때문에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한국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졌지만, 또한 왜곡되기도 했다는 생각.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다. 이런 개념은 잘 받아들여졌는데, 삼위일체의 개념이 너무 가부장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군사부일체라는 가부장적 개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성경에서 군주와 스승과 아버지의 개념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모세가 유일하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모세라는 인물과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나라의 근간이다. 모세의 신비로운 출생 이야기부터 그의 고난, 그리고 그의 능력과 활동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보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견주어서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모세와 같은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3.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모세의 위상은 넘사벽이 되어 간다.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 캠프를 치고 그곳에 머물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심에 따라 홀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만나기를 반복한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70명을” 데리고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세뿐이었다.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2절).

 

4. 24장은 시내산 언약체결식을 기록하고 있다. 20장의 십계명 이후에 24장의 언약체결식이 나오기까지 출애굽기는 각종 율례들(율법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즘 우리 시대에 직접 통용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정신은 한마디로 ‘정의(Justice)’이다. 정의의 핵심은 인권(human rights)에 있다. 인간의 권리(인간의 존엄성/dignity)를 보호하는 것.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약자에 대한 인권 보호가 정의의 핵심이다. 사회적 약자는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일이 쉽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5.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례들(율법들)을 다 지키기로 “한목소리로 응답”하고, 언약식체결을 위한 준비를 한다. ‘정의’라는 말을 써서 다시 풀이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제단을 쌓고, 열 두 지파대로 기둥을 세우고, 소를 드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그리고 피(소의 피/제물에서 얻은 피)를 가지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대접에 담았다가 언약서를 낭독한 뒤 백성들에게 뿌렸다. 그러면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8절).

 

6. 현대인들에게 낯선 장면이다. 현대인들은 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별히 한국인들에게 피에 대한 이야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피로써 의형제를 맺은 ‘도원결의’ 정도이다. (사슴 피, 돼지 피 경험) 그에 비하면, 성경에는 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제사는 온통 피 범벅이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피범벅 사건이다(Passion of Christ/ 두 눈 뜨고 보기 힘들다). 우리는 ‘예수의 보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피의 무게’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를 흘린다는 것의 무거움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7. 본문 9절에서 11절은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신비한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다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장면이 얼마나 신비한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사파이어)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9-11절).

 

8. 시내산 언약체결식은 장엄하다. 모세의 중재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다가서고, 시내산에서 피를 통해 언약을 맺는다. 그래서 그 언약을 ‘피의 언약’이라 부른다. 언약을 체결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축하하고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연회를 벌인다. 몇 마디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연회를 하는 장면은 장엄하고 신비롭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라는 진술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만찬이라니!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다시 진술된다.)

 

9. 출애굽기 24장에 담긴 ‘시내산 언약체결식’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마치 데칼코마니(데칼코마니아) 같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경험한 복음서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견주어 묘사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시내산 언약체결식 사건과 연관시켜서 해석했다는 것이다.

 

10. 마태복음은 모세오경의 형식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출생 이야기는 모세의 그것과 흡사하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이야기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전달해 주는 것과 흡사하다.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과 떡과 포도주를 나눌 때 예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시내산 언약체결식에서 모세가 한 이야기와 똑같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11. 그렇다면, 시내산 언약체결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이 다른가? 시내산 언약체결식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향한 언약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언약이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열방)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보편적인 언약체결식과도 같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사람(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상관없이)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12. 출애굽기 24장의 시내산 언약체결식을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뿐이었다. 숫자로 하면, 74명(일흔 네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모세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광야에서는 성막을 통해,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는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제사장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오직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만 성막이나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었다.

 

13.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큼 민주화 사건이 없다고 생각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특권계층만 누렸던 특권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은 그러한 특권을 없애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권리를 민주화시킨 것이다. 즉, 누구든지, 신분에 관계없이, 심지어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권리를 모두에게 안겨주셨다는 것이다. (혁명적이다. 뉴크리에이션!)

 

14. 시내산 언약체결식 때 모세는 제물의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부르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백성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아주 특별한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마중물 삼아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언약의 피’이다.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피를 뿌리는 행위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아무때든지,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15.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특권을 포기하고 산다. 또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특권이 주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사람들은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종 행동들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와서 그 어려움들을 토로하고 문제 해결을 받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요즘엔 그것을 아는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가 지닌 무거움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

 

16.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91장)에 이런 것이 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거룩하신 주의 이름 너의 방패 삼으라 환난시험 당할 때에 주께 기도 드려라

존귀하신 주의 이름 우리 기쁨되도다 주의 품에 안길 때에 기뻐 찬송 부르리

우리 갈길 다간 후에 보좌 앞에 나아가 왕의 왕께 경배하며 면류관을 드리리

 

17. 언약의 피. 이것이 지니고 있는 무게감을 신중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를 생각하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언약의 피에 힘입어 모든 것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다가서고, 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다가서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키리에 엘레이손/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언약의 피가 우리를 살릴 것이다. 언약의 피가 우리를 새롭게 할 것이다. 언약의 피,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징표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언약의 피를 기억하고 그 피에 기대어 하나님께 날마다 가까이 나아오는 자에게 늘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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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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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5. 10. 19:46

무거운 존재와 두터운 관계를 간구하는 기도
(출 20:12)

 

주님,

모든 것이 가벼워진 시대에

제5계명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두터운 삶을 위하여

두터운 인간관계를 위하여

부모를 공경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복된 일을 위해서

부모세대를 무겁게 대하는 자녀세대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시니,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겠습니다.

부모세대는 부모세대 답게 존재의 무거움을 지켜나가고

자녀세대는 자녀세대 답게 존재의 무거움을 세워나가게 하셔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구원을

세상 끝날까지 잘 전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며

십자가에 올라

이 세상 모두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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