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4. 12. 31. 10:24

언더스탠딩을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8:14-21)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소서.
무딘 마음, 보이지 않는 눈, 듣지 못하는 귀 때문에
나 자신,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특별히 사랑하라고 곁에 주신 존재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깊은 이해, 언더스탠딩이 되지 않아
예수님을 오해하고 대적하고 결국 배반한 제자들처럼
우리의 삶이 위태롭습니다.
주님, 우리를 고쳐 주소서.
예수님께서 눈 먼 자를 고쳐 주시고
그가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눈과 귀를 고쳐 주사
언더스탠딩에 이르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이 우리를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곁에 주신 존재들을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주님,
언더스탠딩을 통해 우리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도록
구원하소서.
우리를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22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21:7-14)

평화의 주님,
또다시, 평화가 묘연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멈출 기미가 없고
혐오는 더 깊어지고 있으며
기후변화는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앞날이 참으로 풍전등화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세상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서고 싶습니다.
우리라도, 정신 줄 놓치지 않고 
예배하며 기도하길 원합니다.
주님, 
예루살렘으로 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신 바울 사도를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가려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막힌 담을 허무신 예수님처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해 연보를 전해준 바울 사도처럼,
우리도 평화를 위해 뭔가라도 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행할 일을 가르쳐 주소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핏값으로 주신
사랑과 은혜를 잃지 말게 하옵소서.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됨을 잃지 말라고
십자가 위해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4. 12. 31. 10:14

[당신]

나는 흡혈귀
당신은 목
끌리지 않을 수 없네

나는 참새
당신은 방앗간
그냥 지나칠 수 없네

나는 벌
당신은 꽃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네

나는 소년
당신은 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목동
당신은 소녀
지켜주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바람
당신은 나무
그 품에 안기지 않을 수 없네

나는 강
당신은 바다
흘러가지 않을 수 없네

나는 구름
당신은 하늘
떠다니지 않을 수 없네

나는 시냇물
당신은 조약돌
어루만지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노을
당신은 서쪽
물들지 않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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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24. 12. 31. 10:13

[새날]

나에게 상처 입은 날들에게
사죄한다
하늘이 나에게 보내주신 날들,
그러나,
거룩을 입히지 못하고
불경을 입힌 날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나를 거쳐간 날들아,
하늘에게로 돌아가
새로운 날들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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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구약의 예언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언서를 몇 군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엘 2:1-2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라. 온 땅의 주민들이 떨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라. 이제 가까웠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구름과 짙은 흑암의 날이라...”

아모스 5:18-20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뜻이냐? 여호와의 날은 빛이 아니요 어둠이니...”

스바냐 1:14-15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까우며 심히 빠르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폐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날’을 언급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언급된 곳에는 언제나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판단을 받고 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죠.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환란’을 당할 거라는 말,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성경은 줄기차게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만 말하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언론/전문가 그룹에서 들려오는 2025년도에 대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한국은 ’12.3 내란사태’ 때문에 환율이 오르고, 증시가 급락하는 등 경제사정이 가뜩이나 안 좋은데, 더 안 좋아질 거라는 전망입니다. 미국도 그리 장밋빛 전망만은 아닙니다. 트럼프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정책이 바뀌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만 커진 상태입니다. 각국에서는 트럼프 집권 2기에 맞서 대응 전략을 준비하기 한창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미국 이외의 모든 나라에게는 어려움을 안겨다 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도 과연 좋을지,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해를 코 앞에 두고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시절이 될 거라는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런 전망 앞에서 ‘여호와의 날’을 생각해 봅니다. 여호와의 날이 무엇일까. 왜 고대의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그날이 오면 힘들 거라고, 외쳤을까.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 닥친 환란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거기에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일종의 ‘퍼펙트 스톰’이 사회를 휩쓸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적 시스템도 미비하고, 과학기술도 변변치 못하던 시절, 인재와 자연재해가 겹치면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거의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그 환란을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혼란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끔찍한 환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러한 환란을 ‘여호와의 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환란에 정의(justice)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합한 상황을 못 견딥니다. 그러나, 정당성이 부여되면, 즉 왜 이러한 일을 겪게 되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면,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도 감당합니다. 

아무래도 2025년는 여러가지 정황 상, ‘여호와의 날’이 우리에게 임할 듯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상황이 좀 더 나을지 모르겠으나, 고국의 앞날이 정말 걱정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닥치면 겉으로 보면 환란이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심판의 날로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의 날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환란이 닥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것 있습니다.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죄악’, 바로 그것이 보입니다. 그 죄악을 해결/해소하지 못하면, 환란은 그치지 않고 반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는 반드시 죄악의 해결/해소가 필요합니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항상 ‘내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고, 분단국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일’이라는 용어와 ‘빨갱이’라는 용어가 한국말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은 계속해서, 언제든지, 분위기가 조성되면 내란 상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보수 세력은 대개 친일 세력이고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하여 분단국가 현실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웁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구조적 모순이고 아픔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파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심판은 깨끗케 하여 구원하기 위함이지 괴롭혀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날이 임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더 신뢰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서로에게 좀 더 따뜻한 존재가 되어 준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춥고 어두운 날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미소를 더 자주 띄워 주어요. 우리 서로의 손을 더 자주 따스하게 잡아 보아요. 우리 서로의 어깨를 더 자주 두드리며 격려해 보아요. 

Posted by 장준식

[낙심마오]

우리 인간이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처럼,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를 대면하면서 동시에 국가라는 존재를 대면하게 된다. 국가라는 제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지구상에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라는 존재, 또는 국가라는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국가란 무엇인가’를 공부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국가는 ‘필요악’이다. 국가가 왜 악이냐면, 국가가 나 개인에게 폭력을 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에 강제로 세금을 낸다. 우리는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무엇인가 잘못하면, 우리는 국가에 의해서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국가는 인간에게 악이다. 하지만, 국가는 필요하다. 국가 없이 인간은 삶을 평화롭게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국가와 애증의 관계에 있다. 

최근 포브스 지에서 대한민국 상황에 대하여 우려를 표했다. 심각하게 받아드리며 대비해야 한다. (2024년 12월 6일자) 중국 경제의 둔화와 수출 감소,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를 앞두고,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시기인데, ‘계엄 선포’로 인해서 나라를 혼란에 빠지는 바람에 2025년에 한국에 닥칠 위기에 대처할 시간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이다. 이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을 거라는 말이다. 국제 정세도 안 좋고, 국내 경제도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그리고 정말 결정적인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산 선지자는 예레미야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으로 따지면, 국제정치학/국제관계학 전문가이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말년(BC 587년 경)의 역사적 질곡을 모두 겪은 사람이다. 이스라엘 전체 민족, 왕이나 고위관리에서 가난한 하층민까지 모두,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다. 왕이 두 눈이 뽑혀 잡혀가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갈 시절이었다. 얼마나 어두운가. 이때 예레미야가 한 일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나라가 어려울 때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한 일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것을 실천한 대한민국의 믿음의 조상이 있다.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도산은 병환으로 죽어가며 자신을 문병 온 동지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낙심마오!" 그 당시 한국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의 길은 아득하고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1938년의 일이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낙심마오'라며 위로를 건네고, 생명이 다해갔지만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성경을 사랑했던 도산 안창호, 그는 숨을 거두면서까지 낙심하지 않았다. 낙심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일을 그르치는 것도 없다. 무슨 일이든, 낙심만 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윤석열을 탄핵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1. 역사의 숭고함을 망가뜨림
2. 나쁜 선례를 만들면 안 됨

역사는 숭고하다. 역사가 숭고한 이유는 '비극' 때문이다. 비극은 정의를 이루어가다 발생한 슬픔이 역사에 박힌 상흔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일제시대의 저항, 독재에 대한 저항, 민주화 운동 등, 새시대를 열어가려는 정의의 행진 안에서 슬픈 일이 많이 발생했다. 그 슬픔이 한국 근대사를 비극으로 물들였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숭고하다. 숭고함은 비극의 아름다움이다. 그 숭고함 때문에 우리는 비극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가려고 발걸음을 뗀다. 

윤석열이 행한 '계엄 사태'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숭고함에 아주 큰 흠집을 낸 것이다. 비극적인 숭고한 역사를 희극적인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역사의 선배들이 쌓아놓은 숭고함을 무너뜨리고, 역사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국민들이 모아준 권력을 사사롭게 씀으로 인해 정의를 무너뜨렸다. 이것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될 죄악이다. 

윤석열을 반드시 탄핵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만약 이번에 탄핵을 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아주 나쁜, 최악의 선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임기 말년에 행한 아들 헌터 바이든을 사면한 일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당에서도 말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이것이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가진 사면권을 통해 자기의 측근을 사면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퇴임하는 것은 후임 대통령들에게 아주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아를 할 때 부모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부모는 반드시 훈육을 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는 자기가 방금 행한 일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아이는 ‘이렇게 해도 되는 구나’하면서 또다시 그 나쁜 일을 반복하게 된다. 좋게 넘어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은 나중에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한국교회가 망가진 이유는 한 가지로 규명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큰 이유 중 하는 ‘세습’이다.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가 지탄을 받는 이유는 그가 ‘나쁜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훌륭한 일을 많이 했어도, 결국 퇴임 때 ‘나쁜 선례’, 즉 ‘세습’을 했기 때문에 지탄을 받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 하나인 광림교회에서 ‘세습’이라는 ‘나쁜 선례’를 남긴 것 때문에 그 이후 감리회를 비롯한 타교단의 대형교회들은 그 ‘나쁜 선례’를 따라 세습을 자행했다. 그 나쁜 선례를 막아내지 못한 감리회는 그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보수화, 그리고 사사화가 너무 심해 감리회의 웨슬리 정신을 잃어버렸다. 

지금 국민의힘에서는 윤석열 탄핵을 반대한다는 당론을 정했고, 기껏해야 임기를 탄축하는 헌법개정을 통해 윤석열의 조기 퇴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는듯하다. 그렇게 되면, 윤석열은 말되 안되는 엄청난 범죄를 국가와 국민들 앞에서 저질러 놓고, 퇴임 후에 대통령이 받게 되는 모든 혜택과 의전을 손해 없이 받게 된다. 이것은 정말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이다. 이후에 정치적 궁지에 몰린 대통령이 있다면, 그는 분명 윤석열을 참고 삼아 ‘계엄령’을 남발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자기 밥그릇에 아무런 손해가 없을 거라는 ‘나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반드시 탄핵되어야 한다. 역사의 숭고함에 큰 흠집을 낸 죄를 묻고, 그리고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땀과 피로 세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손쉽게 훼손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가장 장엄한 교훈이다. 후대에게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장엄한 교훈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숭고한 역사를 훼손하는 자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쁜 선례’는 나쁜 통치자를 또 만들어내는 법이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이 역사적 사건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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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12. 1. 09:51

유대인 천동설

사도행전 22장부터 25장까지 바울은 6번의 아폴로기아(변증/변명)을 한다. 변증이란 법정에서 제기된 고소에 대해 잘못이나 오류를 방어하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의 변증은 유대인 회당이나 이방인 위정자(정치인)나 권세자(권력자)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바울은 왜 무엇을 잘못했기에 유대인들/로마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그들 앞에서 아폴로기아(변증/변병) 할 수밖에 없는가? 여섯 번째 변증에서 로마의 고위 관료 베스도는 바울에게 비쳤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변증을 통해 바울에 대한 고소는 무죄로 밝혀진다. 바울과 복음은 무죄다.

그렇다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기소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표면적인 이유는 율법과 성전에 대한 모독죄이다. 이것은 복음서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기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바울도 모두 유대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율법과 성전의 완성이다. 여기에서 충돌이 생긴다. 

바울의 아폴로기아 내용을 보면, 자기 소개를 한다. 바울은 다소 출신이고,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교육 받은 바리새인이다. 바울은 누구보다 유대 전통에 열심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삶의 반전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계시 사건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중에 나사렛 예수를 만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은 자기의 삶에 대하여 묻는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동안의 나의 삶이 뭔가 잘못되었고, 이제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인식한 것이다.  

예수를 만난 이후로, 바울이 해야 하는 일은 ‘증언’이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예수는 죄 없이 죽으셨다.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게 아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삶을 열어주는) 칭의(은혜)이다. 

처음에는 히브리말(아람어)로 아폴로기아(변증)를 하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유대인들은 갑자기 폭동을 일으킨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행 22장 22절). 누가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에게 동일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메시지를 말하자,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뜨리고자 했다. 이게 정말 이상한 거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바울도 이렇게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예수님과 바울에게 잘못이 있다면, 유대인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 아닐까? 이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려 들었을까?

성경에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은 ‘유대인 천동설’이다. 유대인은 세상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고, 그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율법주의는 민족적 종교 성격을 띄었고,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율법주의적 종교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유대인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 이것이 유대인 천동설이다. 무엇이든지 천동설은 문제이다. 우리는 자주 각종 천동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인간 천동설(인간중심주의), 백인 천동설(백인중심주의), 남성 천동설(가부장제), 기독교 천동설(배타적 복음주의). 천동설이 왜 문제인가? 중심에 있는 존재는 편하고 좋지만, 바깥에 있는 자들을 억압 받아 괴롭다. 천동설은 반드시 고통 받는 자를 생산해 낸다. 이것은 죄악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천동설을 깨는 작업이다. 복음이란 제국주의, 인간중심주의, 유대인 중심주의, 율법주의, 성전중심주의를 깨는 작업이다. 복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 사람과 사물(자연)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인간의 원죄는 자기중심주의, 자기집중을 일컫는 말이다. 중심과 주변을 만들어 지배와 착취가 일어나게 하는 거,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복음은 그러한 것을 인식하게 도와주고, 자기중심주의, 자기집중에서 벗어나 경계를 허물고 서로 평화롭게, 사랑하며 사는 삶을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나의 존재 때문에, 주변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자기 중심성’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가. 우리는 천동설 때문에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고 산다. 나를 날마다 돌아보며,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날마다 죽는 훈련을 안 하면, 복음에서 멀어져 자기 중심적인 삶을 통해 주변을 어렵고 힘들게 하는 죄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복음은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기쁜 소식이다. 내가 ‘자기 중심성’, 천동설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가. 

복음은 자기 중심주의(천동설)를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죄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자기 중심성에서 오는 죄의 사슬을 끊은 것이다. 복음은 중심주의(자기집중)에서 벗어나, 더불어 평화롭게 살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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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12. 1. 09:50

오해와 진실

바울 일행의 예루살렘 도착
바울 일행은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일과 같았다. 예언까지 있었던(행 21:10-11), 유대인들과의 필연적인 충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울의 일행은 이방인 교회의 대표들(우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방문은 예루살렘 유대인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만남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만남! 기독교의 역사적인 사건이다. 두 개의 주체가 만나는 사건이다. 기독교는 한 부류의 전유물이 아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주체적으로 키우는 것이다.

바울의 사역 보고
바울과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수장은 야고보)을 만난 이방 사역을 보고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다’ (19절) ‘낱낱이’는 ‘일일이, 하나하나’ 말했다는 뜻이고, ‘말하다’(엑세게이토)는 ‘해설’(exegesis)을 했다는 뜻이다. 행한 일에 대해서 그냥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신학적으로 해석해서 말했다는 뜻이다. 예를들어,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이는 마치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친 일과 같았다. 어느 교단도 하지 않는 일, 어느 유명 목사도 하지 않는 일은 요나와 같이 비둘기 같은 나, 힘없고 무명한 자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았다. 그래서 복되고 의미 있었고, 나 자신도 많이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바울이 행한 해설도 이런 것이었다. 특별히 그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 지역에서 행한 일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해설(신학적 진술)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함께 기뻐했다. 동일한 성령이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위로해 주시고 보듬어 주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렇게 모두에게 기쁨이 된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우려와 제안
이방 지역에서 들려온 바울에 대한 오해는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배도하라고 가르치고, 할례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즉,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는 오해가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오해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바울에게 율법에 따른 정결례를 행할 것을 제안한다. 바울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결례를 행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신학적 문제들이 있다. 아래와 같이 일목요연하게 표현해 보면, 
1)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이방인들은 모든 율법의 조항을 지키지 않고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는다.
2)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버리지 않고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해 구원 받는다. 
3) 이것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4) 그러므로, 바울이 믿음을 강조한 것은 율법과 관련되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믿음은 율법이 개입되지 않는,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의 길이다. 
5) 구원은 인간의 관습이나 법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6)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관습과 법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7) 믿음은 참으로 전복적인 개념이다. 

고소 당한 바울과 초대 교회의 과제
율법을 지키는 것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통해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했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바울 일행의 기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디아스포라)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고소하고 잡아들인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예루살렘 성에 있는 것을 우연히 본 그들은,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혔을 거라고 추측했다.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힌, 즉 신성모독죄를 범한 죄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울과 복음을 지독하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대교회의 과제는 바울과 복음, 그리고 유대인과 율법 사이의 깊은 오해를 푸는 것이었다. 

21세기 교회의 과제
아직까지 율법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사유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본다. 안타깝다. 대형교회 중심의 보수교회에서 내세우는 이슈들은 대부분 율법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교회의 과제는 복음과 과학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이다. 이미 18세기 과학혁명 이래 치열하게 해오는 일이다. 물론 이 작업이 그렇게 썩 잘 되고 있지는 않다. 대표적인 논쟁인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이게 과학 시대에서는 작동을 잘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가 자꾸 ‘cultural stagnation’(문화 지체 현상/기독교의 생각이 세상의 생각과 괴리를 보이는 현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에서 벗어나, 현대성 안에서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현대성은 심층심리학과 현대 정치철학(인문과학), 그리고 뇌과학과 양자물리학(자연과학)이다. 현대 신학은 이런 것을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 신앙이 요즘 시대에 합리적일 수 있다. 

오해에서 진실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오해를 받았다. 그것 때문에 교회는 괴로웠다. 지금도 기독교 신앙은 매우 큰 오해를 받고 있다. 그런데, 좀 양상이 다르다. 기독교 외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다. 즉, 내부적 오해가 심하다. 그렇다 보니,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잘 잡지 못하고, 자꾸 산으로 간다. 기독교 신앙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려면, (성경과 기독교 신학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 진실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날마다 새로우신 주님을 붙들고, 신학을 계속 갱신할 때만 가능하다. 옛 것에 머물러 있으며 시대 정신의 발목을 잡는 우매한 신앙인이 되는 일은 안타까운 것이다. 새 것 안에서 시대 정신에 발맞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멋진 기독교 신학/신앙인이 되면 좋겠다. 우리 교회가 이런 작업들을 해 나가는 멋진 교회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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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묵시]

묵시는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을 은밀히 해석하는 장치이다.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을 '대놓고' 해석하면 권력자들에게 핍박을 받게 되므로, 사람들은 묵시라는 장치를 통해 불필요한 핍박을 피해 '은밀하게' 정치적 사건을 해석한다.

묵시는 역사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도와준다. 역사는 인간의 관점에서 서술되지만, 묵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묵시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두 개의 눈이 필요하다. 역사를 보는 눈, 그리고 묵시를 보는 눈. 즉 이 땅에서 돌아가는 정치적 상황을 보는 눈과 그 이면에 흐르는 진리/진실의 상황을 보는 눈이 그것이다.

성경은 묵시 장치를 아주 잘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다니엘서가 있고, 마가복음이 있고, 또한 요한계시록이 있다. 다니엘서의 묵시는 다른 두 성경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니엘서는 안티오쿠스 치하 그리스 법정에서 피고가 되어 핍박 받는 유대인들에 대한 묵시이다. 다니엘의 묵시 환상은 유대인들의 무죄를 입증할 '정의로운 더 높은 법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의 불의한 법정에 의해서 유죄로 선고 받았어도 유대인들은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묵시가 필요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싶다. 역사는 늘 권력자들의 횡포 때문에 정의가 왜곡되고 의인이 핍박을 받으며, 법정은 늘 권력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그들만의 놀이터였다. 예로부터, 역사는 묵시를 필요로 했다. 묵시 없이 역사는 바르게 해석될 수 없었고, 묵시 없이 역사에 저항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묵시 없이 요즘 법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어떻게 직면할 수 있는가. 

한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권세자들 앞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은, 인자의 법정에서는 창피당할 일이다." 물론 반대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권세자들 앞에서 유죄를 받으면, 인자의 법정에서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권세자들의 법정에서 유죄를 받았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권세자들의 법정과 비교될 수 없는 진정으로 정의로운 더 높은 법정이 있다. 이런 묵시적 안목을 가진 자는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갈 것이다.

그대여, 힘을 내시라.

Posted by 장준식

[성장하고 돌아왔습니다]

호머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이우스가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겪은 일을 기록하고 있죠. 긴 여행을 마친 오디세우스는 여행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오디세이우스는 여행을 통해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영웅이 갖춰야 할 덕들을 모두 갖춘 인물로 거듭납니다. 여행은 오디세이우스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별히 바다에서 만난 사이렌과의 대결은 오디세이우스에게 절제와 인내의 덕을 안겨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이렌은 커피 업체 스타벅스의 상징이기도 하죠. 사이렌은 뱃사람들에게 큰 시련입니다. 그것을 물리친 뱃사람만이 진정한 뱃사람인 것이죠. 

여행은 참 신비롭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행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은 것이다”(The world is a book, and those who do not travel read only one page.). 사람은 여행을 통해 한 권을 책을 읽는 것만큼 깊은 사유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일 겁니다. 여행을 하지 않으면 겉도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겠구요.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괴테는 특히 이탈리아 여행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여행>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죠. 괴테는 여행을 통해 젊음을 되찾는 기쁨과 영혼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저의 이번 한국 여행이 딱 그랬습니다. 이번 한국 여행은 이전 여행과 달랐습니다. 성장한 느낌을 받았고, 세상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좀 더 또렷하게 찾은 것 같았습니다. 한 권의 책을 썼고, 그 책으로 인해 사람들을 만났고,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을 통해 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참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러 차례 강연을 통해서 가장 많이 한 말은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는 주제를 둘러싼 인문학/정치신학 이야기였습니다. ‘기후변화’는 화두일 뿐입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말, 제가 한 말이 다른 사람들의 말과 달랐던 가장 중요한 이유,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제 말이 귀를 기울여 주시고 공감해 주신 이유는 제가 기후변화를 자연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론의 문제로 보고, 그것을 인문학/정치신학으로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는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기후변화 문제는 인간을 깊이 관찰하고 돌아보고 재구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장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지만, 결국 인간의 한 존재인 저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저는 인간이고,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참 가련한 존재입니다.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존재. 그것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더 진지한, 그리고 더 애정 어린 연구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성경도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가련함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주 새로운 깨달음이기도 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이것은 곧 호모 사피엔스의 한 개체인 저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그 종에 속한 개개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우리에겐 어떤 가련함과 어떤 희망이 있는지, 깊은 사유를 통해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곧 대림절입니다. 파멸의 운명을 타고난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시간 밖에서 우리가 사는 시간 안으로 밀고 들어오시는 메시아의 구원일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희망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성육신: 여기 함께 있음(Presence)]
 
드디어,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 한강은 시인으로 먼저 데뷔하고, 다음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한강 작품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presence’(프레즌스)가 아닐까? 여기 함께 있음. 인간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으며, 거기에 그들과 함께 있음. 이것이 한강 작품의 특징이자, 그의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는 방식이고,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고, 결국 노벨상을 품에 안긴 원동력일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있다. ‘교회 밖 그리스도인’이라고 옮길 수 있는 용어다. 교회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특별히 문학책), 그런 경험을 종종한다. 이 작가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마치 교회를 다니는 사람보다 더 그리스도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강 작가가 딱 그렇다. 그의 작품에는 성육신의 감성이 흐른다. <채식주의자>는 고통 받는 여성과 함께 하는 작품이고, <소년이 온다>는 5.18 민주화항쟁을 겪으며 아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하는 작품이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에서 아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하는 작품이다. 즉, 역사를 초월해 있는 게 아니라, 역사 안으로 들어와 역사 속에서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한 작품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우리는 어느새 이런 ‘역사’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신 것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은 성육신 사건이다. 성육신 사건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성육신 사건은 ‘presence’(프레즌스), 즉 ‘여기 함께 있음’의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교리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하며 안 된다. 성육신 사건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성육신 사건’(빌 2:1-11)에 대하여 진술하는 이유는 서로 평화롭게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이다. 자기 일을 잘 돌보고, 다른 이들의 일을 잘 돌보아, 나 자신의 인생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살게 만들어 주는 삶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육신의 원리이다. 다른 말로, ‘presence’(프레즌스), ‘여기 함께 있음’이다. 내가 나의 일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상태는 presence이다. 다른 말로, mindfulness라고 할 수 있다. 마음과 육신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잘 하지 못한다. 이게 잘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한다. 염려란 마음과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니까, 우리는 염려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잘 돌보는 것도 성육신의 원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presence’(프레즌스)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음이다.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인가. 나랑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그 자리 함께 있어 주는 것 자체가 기쁨을 두배로 만들어 주고, 슬픔을 반으로 줄여준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탄 이유는 그의 작품은 ‘여기 함께 있음’을 실천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아픔을 당한 이들과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섬기고 따르는 이유는 그가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쁨 가운데 거하는 복된 인생을 사는 길도 여기에 있다. 나 자신의 ‘여기 있음’을 생각하라. 몸과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염려하지 않고, 내 삶을 잘 꾸려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라. 다른 이의 아픔/고통과 함께 하라. 거기에 있어 주라. 아무 것도 안 해도, 그냥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서 아주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이렇게 성육신의 은혜가 우리 삶의 원리요 방편이 되어 모두가 따스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4. 10. 12. 05:20

[믿음]

 

누구를 믿는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일이야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큰 상처를 남기지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믿을 인간이 없다는 것이야

인간인 내가 인간을 못 믿는다는 사실만큼

슬픈 일이 세상엔 없지

 

인간들은 말이야

스스로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신이라는 것을 믿어

아주 기괴한 일이지

 

인간들이 신 앞에서 하는 일은

슬픈 심장을 꺼내 닦는 일이야

그게 얼마나 장엄한지

인간은 자기 눈물로 그 심장을 닦지

 

나는 말야 이런 꿈을 꾸곤 해

태어나지 않는 꿈

하늘을 날다 추락하는 꿈

이 꿈들은 말 못하는 간절한 소망 같지

 

내 눈 앞에 있는 너

인간의 형상을 입은 너

너에게 묻고 싶어

너를 정말 믿어도 될까

 

믿지 마, 믿어도 돼

믿지 마, 믿어도 돼

마치 파도처럼 출렁이는 너,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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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침략하거나 빼앗지 않고 이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신박한 방법]

 

포비아(phobia/혐오) 중, 이슬람 포비아가 있다. 특별히, 개신교인들,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 포비아가 심하다.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을 복음화시켜야 한다는 '사명' 아래 이슬람 국가로 많은 선교사들을 '비밀리'에 파송한다. 선교사의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N국 선교사'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서도 이슬람 선교가 활발하다. 교단에서 이슬람 연구소 같은 선교 단체를 두는 이유는 이슬람을 연구하여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연구하여 그들에게 파고들어 개종시키기 위함이다. 이는 마치 근대 과학이 자연을 연구하여 자연이랑 잘 지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려고 한 것과 같다.

 

1996년, 저명한 미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1993)을 비판하며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헌팅턴을 세계를 9개의 문명권으로 나누고, 그 문명들이 충돌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는 후쿠야마가 소련 붕괴 이후 민주주의의 승리와 시장경제의 판정승을 선언하며 투쟁의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의 목소리였다.

 

특별히 헌팅턴은 서구 문명(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을 우려했다. 실제로 두 문명 간의 출동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슬람 문명이 서구 문명과 충돌을 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이슬람 문명을 키운 것은 팔할이 서구 문명(기독교 문명)이라는 것이다.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핵심은 '화석 연료'에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화석 연료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들은 거의 이슬람 문명권에 있는 나라들이다. 서구 자본주의 문명은 화석 연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로 인해 서구 문명의 국가들은 화석 연료를 손쉽고 값싸게 얻기 위해 중동 지역의 정치적/경제적 개입과 협력에 열을 올렸다.

 

우리는 흔히 중동의 머니를 오일 머니라 한다. 오일 머니가 가진 파워는 대단하다. 그 오일 머니가 이슬람 문명을 키웠다. 오일 머니가 손을 뻗치는 곳에는 이슬람교가 함께 들어갔다. 결국, 오일 머니를 통해 이슬람 문명을 키우고, 그로 인해 이슬람교의 확장을 도운 것은 다름 아닌 화석 연료를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를 발전시킨 서구 문명(기독교 문명)이다.

 

기후변화의 직접 원인은 대기 중에 과도하게 축적된 탄소 때문이다. 탄소는 주로 화석 연료에서 배출된다. 그래서 기후변화를 멈추고, 지속적인 인류의 생존을 이끌려면, 탄소 배출을 멈추어야 한다. 이 말은, 더 이상 화석 연료에 기반한 경제가 아닌, 재생가능한 에너지 기반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전환을 가장 두려워 하는 집단은 두 개다. 하나는 화석 연료 기반의 자본주의 체제를 이끌어온 서구의 기업들과 화석 연료를 공급한 당사자인 중동의 나라들이다.

 

기후학자 마이클 만(Michael Mann)은 <신 기후대전>(The New Climate War)에서 기후변화를 맞은 우리들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적시한다. 그들은 바로 전쟁경제체제와 화석 연료 기반의 시장자본주의 체제를 이끄는 기업들과 나라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웬만해선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상 가장 큰 권력과 자본을 가졌기 때문이다. 만수르가 얼마나 부자인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기 위해 전담 회계사를 둘 정도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세기의 부자 존 록펠러도 화석 연료 사업을 통해 돈을 번 인물이다. 그의 별명은 '석유왕'이었다.

 

이슬람 포비아가 심한 복음주의자들이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신박한 방법이 있다. 바로, 기후변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화석 연료 퇴출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경제가 화석 연료 기반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도록 힘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일 머니가 더이상 축적되지 않을 것이고, 머니 없는 이슬람 세력은 자연스럽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괜히 몸숨 걸고 이스람 국가에 들어가 선교를 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고, 이것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슬람을 붕괴시킬 수 있는 아주 신박하고 평화로운 전략이다.

 

그러니 복음주의자들이여. 괜히 이슬람 포비아에 휩싸이지 말고, 괜히 이슬람을 연구한다고 힘들이지 말고, 괜히 연구해서 그들의 세상에 침투하여 그들을 복음화시켜 보겠다고 소란을 피우지 말고,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화석 연료 퇴출 운동을 벌여 보시라. 그러면, 아주 평화롭게, 그리고 아주 효과적으로 당신들이 원하는 바, 이슬람 세력은 약화될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신박한 아이디어가 부디, 그대들의 마음에 가 닿기를!

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띄워야 하는 승부수: 시대정신]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

 

예수와 바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저항과 해체의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와 바울의 저항은 아주 물리적인 저항이었다. 특별히, 제국과 제국신학이라는 물리적 현상이 저항의 대상이었다. 예수와 바울은 제국과 제국신학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나라(하나님 나라)와 신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제국과 제국신학은 중심부 사상이다. 힘 있는 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생산한다. 예수와 바울이 주목한 것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주변부의 주체-되기였다. 어떻게 하면,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삶을 다시 회복시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였다.

 

역사는 제국과 제국신학의 발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아주 교묘하게 중심부를 강화시켰고,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들을 아주 교묘하게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착취하는 기만술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체제'이다. 신자유주의는 마치 아무도 통치하지 않고, 아무도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자기 착취'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평할 외부상대가 없어 자책만 하다 결국 저항하지도 해체하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살아간다.

 

역사는 제국과 제국신학의 발전만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저항과 해체의 발전도 함께 있었다. 예수의 정신은 죽지 않는다. 예수와 바울의 저항과 해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단순히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시대 정신이다. 왜냐하면, 제국과 제국신학은 이전보다 거대하고 교묘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이다.

 

경제적/정치적 양극화, 통제 불가능한 과학기술 시대, 기후변화의 위기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라는 종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범주에 들어서고 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점점 '주체'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의 주체를 빼앗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존엄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이것을 인격 자살이라 부르고 싶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제국주의가 있다. 우리 시대의 메타내러티브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모든 공간과 시간을 시장화시켜, 모든 존재를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과 같다. 인류 역사에서 요즘 시대만큼 '자유'가 넘친 적이 없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류 역사에서 요즘 시대만큼 '착취'가 넘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는 자유로운 노예가 득실대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자유'에 취해 있지만, 실상은 그들이 모두 '노예'라는 사실이다. 자유에 취해 있다보니, 자신이 노예인줄 모르고 산다. 이것은 절묘한 제국신학이다.

 

이러한 제국신학에 저항한 선지자들이 있다. 마르크스가 있고, 벤야민이 있고, 푸코가 있고, 바디우가 있고, 아감벤이 있고, 지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제국신학에 저항한 선지자들이다. 이들 외에, 제국신학에 극렬하게 저항한 선지자로 기 드보르가 있다. 나는 기 드보르가 쓴 <스펙타클의 사회>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선지자들이 더 있다.

 

이들은 모두 주체를 교묘하게 무너뜨리는 제국과 제국신학에 저항한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제국신학을 해체하여 빼앗기고 무너진 주체를 다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신학을 제시한 이들이다. 교회는 때로 이들이 교회 안에 있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고 이방인 취급하거나 이교도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얼마나 제국과 제국신학에 물들었고, 그들과 한 편인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식 복음주의를 싫어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대중화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자본주의에 축성식을 벌인 형국과 같다. 그래서 미국식 복음주의는 중심부, 큰 것, 힘 센 것에만 관심을 둘 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체-되기 또는 자신들의 주체를 강화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아무 것도 아닌 것들, 주변주로 밀려난 것들의 주체-되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주체-되기를 막는다. 그들을 악마화시켜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는다.

 

기후변화의 시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변화를 인간이 맞닥뜨리게 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변화(change)라는 말보다 전환(transition)이라는 말을 쓴다.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변화가 발생하면 단순히 변화에 적응하는 정도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체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으면 전환을 감당할 수 없다. 즉, 전환이 발생하면, 주체의 전환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현대의 주체는 자본주의-주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인류세(Anthropocene)는 자본세(Capitalocene)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들, 경제적/정치적 양극화, 통제할 수 없는 과학기술 시대, 기후변화, 난민 문제, 홈리스 문제, 총기 문제, 약물 중독 문제, 국제 분쟁 문제 등은 모두 인류가 자본주의-주체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주체가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낸다.

 

혹자는 이것을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굉장히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인류가 맞닥뜨리는 문제를 자꾸 관념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 또한 그동안 교회가 얼마나 제국과 제국신학에 물들었고, 그들과 한 패가 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기독교는 유물론을 자꾸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물질/현실을 악한 것으로 보고, 영/이데아를 이상으로 보는 플라톤 철학에 오랫동안 기대어 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니체가 이런 말을 했겠는가. "기독교는 플라톤 철학의 대중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념론 신학이 아니라, 유물론 신학이다.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에서 간파했듯이, 아렌트가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을 천명했듯이, 위에서 언급한 우리 시대의 선지자들이 유물론자들이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 천국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의 신학이다. 물질인 몸과 물질인 지구가, 즉 인간의 조건인 물질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그 존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21세기, 각 종 위기 앞에서, 무엇보다 기후위기 앞에서 교회가 띄워야 할 승부수, 시대정신은, 예수와 바울이 이미 그랬듯이, 저항과 해체의 정신이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체-되기 프로젝트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교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범주에 들어섰다. 주체-되기 프로젝트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이야기이다.

 

그동안 교회가 제국과 제국신학에 봉사하는 동안, 교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는 주변부로 밀려나버렸다. 자본이 황제가 되고, 자본주의가 제국이 되고, 자본이 메시아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교회의 시대정신은 분명 자본주의와의 생사를 건 한 판을 벌여야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영국 틴데일 기후변화센터의 케빈 앤더슨의 보고에 따르면, 2050년에 90억 명에 이른 인류가 2100년까지 섭씨 4도 상승하면, 5억 명 정도만 살아남는다. 이는 지금보다 훨씬 악화된 대기오염뿐 아니라, 살인적인 폭염, 가뭄, 태풍, 홍수, 식량난, 식수난, 기후 전쟁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경고, 11쪽)

 

상황이 이런데, 교회가 '죽어서 천국 가는' 지구 탈출법을 가르치는 데만 그친다면, 어느 시점에서 교회는 인류와 함께 소멸되고 말 것이다. 교회의 시대정신은 이런 물리적 위협에 맞서 이 문제를 일으킨 근본원인을 파헤치고, 그것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교회에는 철저한 유물론적 사유와 신학이 필요하다. 지구의 구원 없이 인간의 구원은 없다. 자본주의-주체에 맞서, 그것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여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급진적-주체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기후변화를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 기후변화를 통해 인간 주체가 새롭게 형성되어 더 평화로운 세상이 임하게 되길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