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유쾌한 진실]

 

그리스도인이 진화론을 신앙에 반하는 과학적 가설로 이해하고 반대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다. 진화론은 과학적 가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라고 말하는 게 좋다. 진화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이상 중세(medieval era)가 아니라 근대(modern era)라는 것을 말해주는 역사적 지표와 같다.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고정된 세계관이었다. 다른 말로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계층적 세계관이었다. 세상은 위계적 질서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존재하는 하이어라키는 그러한 질서의 반영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교황이 존재했고, 주교가 존재했고, 사제가 존재했고, 평신도가 존재했다. 교회의 구조는 위계적이었다.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관이었다. 그래서 중세 한국의 풍경도 위계적이었다. 왕과 귀족과 중인과 천민이 존재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그 위계를 지키는 것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살았다.

 

진화론은 근대의 개념이다. 근대가 더이상 중세가 아닌 이유는 세상을 더이상 위계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이 세상이 위계적이지 않다는 근대적 시각의 반영이다. 진화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존재는 한 위계에 갇혀 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그 존재가 변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롭게 근대/현대 신학을 진술하고자 했던 신학자들은 모두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신학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이상 중세를 사는 중세인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사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칼 라너를 들 수 있다. 그의 기독론은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그리스도론'이라 불린다. 라너에게 성육신 사건은 "단지 하나님이 위에서 인류에게로 내려온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진화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초월을 향한 내적 원동력의 실현"으로 여겨진다. (오늘의 신학과 신학자들, 128쪽)

 

그리스도인 중에 진화론을 문제 삼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도 중세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진화론의 표면적 의미에만 갇혀 있으면 진화론은 그저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는 불경한 과학적 가설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내면적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더이상 중세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살아가는 역동적 자유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화론이냐 창조과학이냐의 논쟁과 그것과 결부된 일련의 해프닝들은  정말 창피한 일이다. 공부가 짧다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고, 아직 자신은 중세를 살고 있다고 선포하는 미련한 고백이다.

 

칼 라너의 말처럼,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진화의 은총이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그 태생부터 진화론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고 있고, 우리는 그 나라를 향해 가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통찰처럼 모든 만물은 'becoming' 중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진화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갇혀 있는 세계, 위계적인 세계,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마도 그런 자가 있다면 이미 공중권세 잡은 자 뿐일 것이다. 그런 세계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자는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며 사람들을 착취하고 권세를 누리고 싶은 자들일 것이다.

 

존재의 역동적인 진화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답답해서 모두 멸망당했을 것이다. 진화론을 통해 이 세상은 갇혀 있거나, 고정되어 있거나, 위계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진화론은 해방과 자유이다.

Posted by 장준식

[공허함/Nothingness]

 

우리 인간의 공허함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창조 공간이다. 그 공허함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럴 때 비로소 공허함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사탄은 그 공허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라고, 채울 수 있다고 꼬드긴다. 현대 소비주의 사회가 사탄의 체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주의 사회는 인간의 공허함을 소비를 통한 상품으로 채우라고, 그것이 구원이라고 선전한다.

 

사람들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공허함을 채운다. 그러면서 만족하고 구원 받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 그 소비 구조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하고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소비를 통해 공허함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지칠 대로 지치고 물질 세계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다.

 

현대 소비사회의 사탄은 강력하여 인간을 꼼짝 못하게 결박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공허함은 무저갱이 되어가고 자연은 피폐해져 지옥이 되어 가고 있다.

 

오호라 곤고한 현대인이여, 누가 우리를 이 사망의 체제에서 건져내랴.

공허함을 직면하는 용기 있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공허함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누가 가서 이 진리를 전파할꼬.

누가 이 진리를 듣고 사탄의 결박을 끊어낼꼬.

 

밤은 깊고 해 뜨는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구나.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 저를 지켜주소서.

주님, 저를 보내소서.

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경계한 두 가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를 짚어보면 교회는 두 가지를 경계해 온 것이 보인다.

1) 반지성/반이성

2) 엘리트주의(엘리티시즘)

 

1) 교회는 언제나 합리적 신앙을 추구했다

안셀무스의 명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Faith seeking understanding."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성과 신앙은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서로를 보완해준다. 이성 없이 신앙이 존재하지 않고, 신앙 없이 이성이 존재하기 힘들다. 이성은 합리성을 확보한다. 합리성의 확보는 인간이 가진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대자적 존재이다. 대자적 존재란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 존재를 말한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 분리가 가능하다.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교회가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성을 통해 신앙을 이해하고 바라보고자 한 이유는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짐과 동시에 그래야만 건전한 신앙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합리성, 즉 한 발짝 물러나서 조망하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신앙은 그냥 자기 만족이나 자기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양이 되기 쉽다. 합리성이 결여된 신앙은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언제나 반지성/반이성을 경계해 왔다. 지성을 무시하거 이성을 거부하는 류의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 뿐 아니라 어느 신앙 체계라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지성과 이성을 거부하는 신앙체계는 사람들을 우매화시켜 통치하기 편하게 만들어 맹목적인 신앙인을 양산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신앙) 지도자는 그들을 착취하려는 악한 자이다.

 

맹목적인 신앙,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나쁜 신앙이다. 믿음은 합리성을 발판삼아 하나님께 도약하는 행위이지 합리성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말하는 자기 성찰은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성찰은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자기를 대자적 존재로 머물게 하여 신앙의 합리성을 확보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최고의 합리적 행위이다. 기도는 지성과 이성의 향연이다.

 

2)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

교회의 역사는 엘리트주의와의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두개파, 젤롯파, 에세네파, 그리고 바리새파는 모두 엘리트주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사두개파는 기득권자들로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젤롯파는 혁명을 꿈꾸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에세네파는 더러운 세상과의 분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바리새파는 아주 사소한 율법까지 지킬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등장한 첫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이다. 요한복음과 일반서신들에는 영지주의와 싸운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영지주의는 깨달음을 중요시했다. 영지는 감추어진 지식을 말한다. 감추어진 천상의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췄거나 아니면 특별히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지, 즉 감추어진 지식을 깨달았다고 믿는 자들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꼈고, 이는 곧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차별하는 근거가 되었다.

 

모든 이단 종파, 사이비 주교는 영지주의 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전형적인 레토릭이 있다. '비밀'이라는 말이다. 비밀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 종파나 종교 지도자는 대개 자신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을 지녔거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일례로, 신천지의 이만희 같은 경우도 자신이 성경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어떤 신령한 은사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경의 비밀을 들은 신도들은 자신들도 특별한 존재가 된 것같은 착각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전혀 엘리트가 아님에도 자신들이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래서 이단 종파는 더 강력한 조직력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는 언제나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도덕적 엘리트주의와 영지적 엘리트주의는 언제나 교회의 경계 대상이었다.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영지적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아니다. 죄인이란 뭔가 특별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그냥 수많은 제약과 연약함 속에서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주어진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존재론적 차별성을 즐기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의 삶이 전혀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 그래서 뭔가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신앙을 지성과 이성에 비추어 보며 합리성을 확보하여 평범해지려는 것이 좋은 신앙의 자세이다. 반지성/반이성은 믿음이 아니다. 엘리트주의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1. 00:53

바울의 첫 설교

ㅡ 부활이란 무엇인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된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사이프러스(구브로) 섬을 거쳐 소아시아 지역의 밤빌리아 버가 지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동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갑니다. 누가는 이유를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뭔가 좋지 않을 일이 발생한 것은 확실합니다. 나중에 제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바나바와 다른 루트로 전도를 나서게 된 이유는 (마가) 요한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 하고, 바울은 반대합니다. 결국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다른 루트를 따라 전도 여행을 나서고, 바울은 실라(실루아노)를 데리고 다른 루트를 따라 전도 여행을 갑니다. (마가) 요한은 베드로의 제자이자 통역사로서 사역을 감당했고, 나중에 마가복음을 썼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일어난 갈등을 보면 현실에서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쉬운 일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나바와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에 도착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은 그 지역에서 발생한 사역 이야기를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드디어 바울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 동안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나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는데, 사도행전 13장부터 바울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설교와 비교하기 딱 좋습니다. 스데반 설교는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며 아브라함 언약에 기대어 복음을 전했다면, 바울 설교는 출애굽에서 다윗 왕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며 다윗 언약에 기대어 복음을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장 초청으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첫 설교는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합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예수의 대적자로 강렬하게 등장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바나바에 의해 안디옥 교회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매우 궁금했을 겁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변했고, 바울은 첫 번째 설교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매우 궁금합니다. 신약성경에는 바울 서신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익숙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이 행한 첫 번째 설교를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 십상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설교를 장식하고 있는 용어들은 언약, 그리스도, 그리고 부활입니다. 복음을 이해하는데 이 세 가지 용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윗의 역사를 말하며 다윗 언약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를 세우십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우고,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그 위에 세워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삼하 7:12-14). 바울은 이 약속이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과 부활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예수를 가리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선포는 시편 2편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편 2편은 이스라엘 왕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선포하면서 사용된 말씀인데, 바울에게 여기서 ‘낳게 하심’은 부활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실 때 ‘낳다’라는 것은 생물학적 출생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낳다’(begotten)이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신학에서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말할 때 결정적인 용어기기도 합니다. ‘낳다’라는 말은 높아짐, 즉 영화롭게 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승귀/glorification)의 의미를 지닙니다. 부활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다윗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이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죽은 후 땅 속에서 썩었지만, 예수는 죽은 후 땅 속에서 썩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세워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죽었다 살아난 존재가 아니고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오시는 분이고 새로운 시대의 통치자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개벽(開闢)을 말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실천입니다. 부활이 가진 이러한 심오한 뜻을 알지 못한 채, 부활을 그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일로만 생각하면 그리스도 사건이 가진 충격과 전복성을 간과하는 것이 됩니다. 부활은 참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첫 설교에서 부활이 무엇인지를 밝히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죄사함이고 다른 하나는 의(righteousness)입니다. 죄사함은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한 것에 대한 해방을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여호수아에 나오는 라합 이야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현질서)에서 창녀였습니다. 그녀는 빚을 갚지 못해 여리고성의 질서에 따라 창녀로 전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리고성(현질서)를 함락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그곳에 세웠을 때 라합은 더 이상 창녀가 아니게 되었고 도리어 다윗의 조상으로 등극했습니다. 라합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하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주홍글씨가 가슴에 박힌 자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숨죽여 살기에만 바쁘겠지요. 그러나 그 정죄를 풀어주는 죄사함을 받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은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하는 것에 대한 해방이므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현질서에서 반복적으로 죄 지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근거로 삼으면 안 됩니다.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이렇게 현질서 안에서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을 죄사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사함은 현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힘입니다. 죄사함은 현실에서 죄의 부채를 쌓게 하는 값싼 은혜의 방편이 아닙니다. 죄사함은 현질서로부터의 해방이고 새로운 질서에로의 도약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십니다.

 

의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에서 우리는 의롭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 나라(하나님 나라)의 시민(citizen)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법적 지위를 가진 자는 당당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법적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적 통치 아래 합법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미국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시민권이 없는 자, 합법적인 체류 신분이 없는 자는 당당하지 못합니다. 뭔가 쫄립니다. 조심스럽습니다. 불의한 일을 당해도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했다가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의(righteousness)란 바로 이런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의로운 자는 당당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바울의 첫 설교는 복음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언약의 중요성,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선포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줍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부활을 너무 피안적으로 생각하고 부활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온 새로운 질서와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공중권세 잡은 자)이 보기에 굉장히 위협적이고 전복적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꾸 부활을 피안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부활은 죽은 다음에 발생하는 것처럼 왜곡시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불의한 질서에 대한 저항이고 전복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질서와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참으로 지축을 흔드는 하나님의 지혜요 위로입니다. 부활을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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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6. 25. 10:26

세상을 이기는 소그룹 모임을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2:43-47)

주님,

귀중한 생명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우리 시대에

사람들은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무력해집니다.

그 시절을 좇아 그리스도인도 교회도

무기력해지고 무력해지는 시절입니다.

주님,

우리가 정신 차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다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을 회복하길 원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너져버려

거대한 힘에 짓눌려 질식해 죽어가는

불쌍한 생명이 많은 이 때에

우리를 다시 불러 일으켜 세워 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힘으로

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게 하옵소서.

그러한 힘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소그룹 모임을 세워가려 합니다.

도우시고 인도해 주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과 소망을 이루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6. 23. 07:33

안디옥 교회와 미니스트리

ㅡ 미니스트리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13장에는 안디옥 교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장면 전환입니다. 그동안 예루살렘 중심으로, 그리고 베드로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이제 안디옥 교회 중심으로, 그리고 바울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안디옥 교회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가 바뀌었다는 뜻은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 열리기 시작한 이방 선교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방 선교의 장이 열린 것이고, 바울의 전도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목해야 할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초대 교회의 양대 산맥입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탄생했지만, 교회가 유대인 지경을 넘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안디옥 교회 덕분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복음의 보편성을 확보한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한국인)도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겁니다. 안디옥 교회는 모든 (이방) 교회의 어머니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소개하는 사도행전의 구절을 보면 그곳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나열됩니다.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그리고 사울(바울).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요즘 말로 리더들을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간 것은 교회를 섬기는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소개하며 등장하는 용어들도 심상치 않습니다. 성령, 금식, 기도 등의 용어가 안디옥 교회를 묘사하는데 쓰입니다. 이러한 용어들은 교회가 세워지는데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금식을 할 수 있는 만큼 집중력과 헌신이 있어야 하며,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지시에 따라 안디옥 교회는 본격적인 이방 선교를 위해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합니다. 이는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 교회처럼 든든해졌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기도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조지아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이것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대개 모든 것이 갖추어진 교회에 다니다 보니, 교회의 조직이며 활동들이 원래 그냥 그렇게 작동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개척을 통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교회 조직이나 성가대, 여선교회, 선교활동 등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기도 없이는 전혀 할 수 없습니다. 이점을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간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한 마음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은 ‘미니스트리’(ministry)입니다. 미니스트리는 한국말로 사역 또는 사목이라 합니다. 개신교는 사역이라는 말을 쓰고, 가톨릭이나 성공회는 사목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역이나 사목이나 같은 말입니다. 미니스트리를 한국어로 옮긴 용어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의 안디옥 교회 사역 이야기에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여기서 ‘주를 섬겨’는 영어로 ‘ministering to the Lord’입니다. 영어로 ‘ministry’라 옮긴 헬라어는 ‘레이투르게오’(λειτουργέω)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거나 사회를 위해 공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니스트리(ministry)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공적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 공적인 일입니다. 미니스트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공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긴다는 뜻입니다. 미니스트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야 미국 정부에서 봉사를 할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 시민권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미니스트리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제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 나라의 공무원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의 공직자입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정체성입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체성을 가지면 사역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부모가 부모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육아를 잘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부모도 불행해지고, 누구보다 자녀들이 불행해지기 마련입니다.

 

공적으로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가치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공적으로 행하는 일은 가치 있고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미니스트리의 성격 자체가 그렇습니다. 교회의 일, 즉 그리스도의 일은 공적인 일이기 때문에 가치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가치 있고 의미 있기 때문에 신실하고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하는 자들은 ‘충성’합니다. 즉, 사역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요즘 보편적으로 교회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힘들어진 이유는 많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 가지 이유를 찾아본다면, 미니스트리를 하는 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교회 사역을 하면서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고, 사역이 공적인 일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사역을 하면서 사사롭게 생각하고 사사로운 마음으로 교회를 출석하기 때문입니다. 사역이 사사로워지다 보니 교회 세습이 편만합니다. 사역이 사사로워지다 보니 시간 나면, 마음에 내키면 사역을 합니다. 미니스트리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어느새 미니스트리가 사사로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사롭게 군복무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군대 계급을 세습하거나 군대 자산을 세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군복무를 시간 나면 하거나 마음에 내키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미니스트리가 사사로워진 이유는 미니스트리에 대한 이해와 자기 정체성이 부족해서입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미니스트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니스트리를 신실하게 수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면서 안디옥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지시를 따라 이방 선교를 위한 선교사들을 따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니스트리를 신실하게 감당한 그리스도인들 덕분에 지금 우리도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미니스트리의 가치를 알아보고 미니스트리에 자원하여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미니스트리를 기쁘고 즐겁게 수행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내리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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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6. 21. 06:03

무기력증에서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말라기 1:6-14)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고

다시 그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무기력증에 걸려버리는 각박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점검하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무기력증에 걸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엉뚱한 일에 생명을 낭비하며 살게 됩니다.

몇 가지 점검을 통해 무기력증에 대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점검하게 하시고

우리 삶에 말씀이 살아 역사하고 있는지 점검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감기처럼 다가오는 무기력증을 물리치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이

날마다 생명력 넘치는 거룩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새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6. 21. 05:55

기도는 살리고 교만은 죽인다

 

사도행전 12장은 헤롯 아그립바 1세 치하 때에 발생한 박해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이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가장 유명한 헤롯은 예수님의 탄생 때에 예수님을 죽이려던 헤롯 대왕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헤롯 가문에서 유대 땅을 계속하여 통치했기 때문에 헤롯이란 이름이 성경에는 계속 등장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통치자로서 자질이 한참 모자른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세 가지 정책을 폅니다. 바리새파 전통을 철저히 옹호하는 종교 정책과 예루살렘 북쪽에 새 성벽을 건설하는 등의 민족주의 정책, 그리고 그리스도인 박해 정책이 그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로마 정부를 등에 업고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 수위를 높여 갑니다. 급기야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사도들) 중 몇 명을 처단합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처형을 당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소위 말하는 이너 서클에 있었던 제자 중의 제자입니다. 정황을 보면, 야고보는 잡혀 죽고, 베드로는 잡혀 감옥에 갇히고, 요한은 가까스로 피신한 듯합니다. 헤롯 왕은 리더십 붕괴를 시도한 것이죠.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 당했다는 뜻은 야보고가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리더십이 두드러졌다는 뜻일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잡혀 옥에 갇힙니다. 헤롯은 베드로가 탈옥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삼엄하게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그 감옥을 탈출합니다. 베드로의 탈옥 이야기는 영화 쇼생크 탈출보다 흥미진진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탈옥 이야기에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출애굽 사건에 빗대어 표현한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탈옥하여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집에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탈옥을 표현할 때 ‘엑세일라토’라는 용어를 씁니다. 이것은 ‘밖으로 이끌어 내셨다’는 뜻인데, 출애굽기에서 사용된 바로 그 용어입니다. 여기서 exodus, 즉 출애굽이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출애굽 모티브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구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밖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압제로부터 베드로를 ‘밖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구원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구원은 억압에서 자유로 이동하는 운동입니다. 구원은 자유함입니다. 구원은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기본적인 개념을 아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래야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뜬구름 잡는 용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자유를 줍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일 가운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어떠한 것이든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세력에 저항합니다. 자유를 빼앗긴 자들과 함께 합니다. 빼앗긴 자유를 다시 찾으려는 일에 동참합니다. 구원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 그곳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감옥을 탈출하여 ‘교회’(함께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갔습니다. 교회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오랜 기도였고, 절박한 기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을 탈출하여 도착한 곳은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베드로의 도착은 기도하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공동체를 꿈꿉니다. 우리 교회의 소그룹 모임을 재편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기도의 공동체 만들기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서로가 서로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간절히, 절박하게 기도하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곳을 마음에 품고 함께 간절히, 절박하게 기도하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기도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에게는 기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베드로를 살립니다. 기도하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살립니다.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살리십니다. 기도하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기도의 반대는 기도하지 않음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교만은 죽입니다. 교만한 헤롯은 죽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십니다. 교만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교만은 최악의 대적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대적이고 교회의 대적입니다. 삶의 대적입니다. 교만은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2장은 죽을 위기에 처한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나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동시에 승승장구하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갑작스럽게 죽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기도는 살리고 교만은 죽입니다. 교만한 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살지만, 교만한 자는 죽습니다. 기도와 교만은 대척점에 있습니다. 기도의 반대는 기도하지 않음이 아니라 교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는 살리고 교만은 죽입니다. 기도하는 자의 인생이 복됩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6. 9. 10:06

바나바와 그리스도인

 

사도행전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각자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재와 더불어 제자들의 독립을 말하고 있고, 성령의 시대가 열릴 것을 예고합니다. 성령 강림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파격적인 나눔의 삶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스데반 이야기는 복음이 유대 땅을 벗어나 이방 나라로 전해지는 계시가 마련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 이르러,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전개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대표하고 고넬료는 이방인을 대표합니다. 이 둘의 만남을 통해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담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죠.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에게 고넬료와의 사이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보고합니다. 10장에서 발생한 일이 11장에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다시 진술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사도행전에 두 번 반복해서 기록됩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기록했다는 뜻은 그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별일 아닌 것 같고, 이전의 이야기들(성령 강림 사건이나 스데반 사건)에 가려져 별로 깊이 인식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꼽으라면 바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 자신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10장과 11장에 걸쳐 두 번 반복해서 그들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급진적/파격적(radical)인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나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주님(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고백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사건을 직접 경험했으면서도 복음을 유대인의 울타리 안에서만 전했던 것이죠. 그것은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의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들의 좁은 인식과 한계를 깨뜨려주십니다. 그 사건이 바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입니다. 사도행전 10장과 11장은 복음이 유대인(유대땅)의 울타리를 넘어서 보편적인 것이 되어 가는 과장 중 가장 결정적인 사건을 진술합니다.

 

현대인들은 복음이 유대인의 담장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유대인 중에는 그리스도교인이 별로 없습니다. 현재 그리스도교인의 대다수는 ‘이방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본인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본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복음이 유대인(유대땅)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이방땅)에 전해진다는 것은 개벽 같은 일이었습니다. 절대로 생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 ‘이것은 절대 있을 수 없어. 이러한 일은 절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실거야.’하는 그런 일이 발생한 겁니다. 복음은 진실로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것입니다.

 

시대를 지나오며 복음이 우물 안에 갇혀 그 원래의 급진성과 파격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복음이 매우 보수적이고 진부한 것처럼 변해버린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안타깝고 슬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급진성과 파격성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바로 복음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노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복음의 급진성과 파격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진술입니다(행 10:34-35).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지체들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을 때 ‘할례자들’은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행 11:3). 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은 단순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밥을 같이 먹고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죠. 그런데, 요즘 (한국의) 개신교가 마치 그 ‘할례자들’이 된 듯합니다. 복음의 급진성과 파격성은 온데간데없고, 율법만 남은 듯합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무할례자들’을 향해서 무차별 공격을 하고, 비난하고 비방하고, 폭력을 가합니다. 마치 자신들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듯, 복음의 잣대로 ‘무할례자들’을 마음대로 정죄합니다. 복음을 들었으나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 반복되어 나오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 사건을 계기로 헬라인(이방인)에게도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 사건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있지 못하던 예루살렘교회(초대교회)의 제자들에게 성령은 그 의미를 좀 더 넓고 깊게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제 복음은 유대인의 담장을 허물고, 그것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가리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제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으로’ 그리고 ‘급진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해집니다.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인지한 예루살렘교회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 더 체계적인 복음 전파를 위하여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안디옥은 이방 지역입니다. 그곳에 바나바가 파송됩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첫 이방인 선교사인 셈입니다. 누가는 바나바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착한 사람이요(he is a good man)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4). 초대교회에서 바나바만큼 칭송을 받은 인물이 드뭅니다. 바나바는 정말 멋지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더 멋집니다. 그는 이방인 사역을 위해서, 다소에 머물고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옵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첫 파송을 받은 선교사 바나바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하여 이 일에 적합하다고 여긴 바울을 몸소 가서 데리고 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둘이 함께 안디옥 지역에 머물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복음 전파 사역 덕분에 안디옥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안디옥교회를 향해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유대인들에게서 그리고 유대땅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서 그리고 이방땅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a follower of Christ’(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이 용어에는 이미 급진성과 파격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넘어서, 담을 허물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낭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새로움에 열려 있지 않으면,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그것을 넘어설 용기가 없으면, 누구든지 포용할 넉넉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택하겠다는 믿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할지라도 세상에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이 급진성과 파격성이 사라지지 않고 꽃피우도록, 바나바처럼 바울처럼 주님께 쓰임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6. 5. 06:44

세화의 기도

 

주님
주의 종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사

주님의 몸된 교회를 부흥케 하옵소서.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고하겠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아멘.

 

* 느헤미야에게서 배운 기도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6. 5. 06:43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느헤미야 4:1-14)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것을 주셔서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느헤미야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훼방꾼들을 만나 어려움을 당했지만

주저하거나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백성들과 더불어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일하기.

기도하면서 헌신하기.

이것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강력한 전략이고 무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느헤미야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도록 전력과 무기를 주셨으니

우리도 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흥의 기회를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헌신하여서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게 하옵소서.

이 모든 일에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6. 5. 06:40

화해 사역

 

요즘 TV 뉴스에서 대학생들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 대한 반전시위를 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시위 현장이 궁금하여 며칠 전 스탠포드 대학교 캠퍼스에 다녀왔어요. 스탠포드 캠퍼스 중앙에 가면 학용품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자리한 건물 앞 공터가 있는데, 그곳이 시위 현장이었습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반전시위 하는 학생들이 쳐 놓은 천막이었습니다. 그것은 Pro-Palestine 진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정부를 향해 전쟁과 학살을 당장 멈출 것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현수막 중에 이런 문구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Silence is violence”(침묵은 폭력이다). “No tech for genocide!”(학살을 위한 테크놀로지 반대!). “Jews say ceasefire now”(유대인들이여, 당장 휴전하라고 말하세요!). “Hands off Rafah”(라파에서 물러나라!).

 

이러한 시위 현장 바로 앞에는 수많은 이스라엘 국기와 미국의 성조기가 함께 꽂혀 있고 그 가운데 이번 하마스의 공격에 납치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과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의자들이 놓여 있는 시위 현장이 보였습니다. 앞에는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행한 테러들을 보여주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같은 구역 안에 이렇게 상반된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여기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축소판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은 극단적인 양극화의 현장이었습니다.

 

현재 지구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양극화(polarization)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정치적 갈등이 폭등하고 있고, 경제권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갈려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볼썽사나운 풍경이 자주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이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단순히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대표하고, 고넬료는 이방인을 대표합니다. 고넬료의 청함을 받은 베드로가 고넬료 일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 10:8) 매우 유대인 중심적인 생각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고 유대인이 아닌 나머지 민족은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향해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유대인)와 고넬료(이방인)의 만남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4-19)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이었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고 둘이 하나 되게 하신 화평과 화목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을 일컬어 화해 사역이라고 칭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은 화해 사건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바로 이 화해 사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동일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을 통해 고넬료의 청함을 거절하지 말고 그에게 가서 그와 ‘교제’할 것을 지시받습니다. 고넬료는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을 통해 자신이 지내고 있던 가이사랴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도시 욥바에 유숙하고 있던 베드로를 집으로 청하여 ‘복음’을 들을 것을 지시받습니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의 경건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큰 일(복음)을 들을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한 베드로에게 성령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베드로는 말씀에 힘입어 고넬료의 청함에 거리낌 없이 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만납니다. 가이사랴는 그당시 로마군대가 주둔하던 곳입니다. 거기에는 로마 총독 관사도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점령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은혜로운 만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매우 영적인 사건입니다. 정말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막힌 담이 허물어진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청함을 받고 그의 집에 가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베드로가 드디어 십자가 사건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왜 하나님은 그 죽은 예수를 사흘만에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는지, 이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화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구원을 단순히 죽음 이후에 천국가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매우 축소시킨 생각이고 여러가지 인간의 욕망을 투영시킨 모자란 생각입니다. 구원은 이보다 훨씬 깊고 넓고, 무엇보다 현실적입니다. 구원은 다른 말로 화해(reconciliation)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의 능력은 화해입니다. 위에서 사용한 용어를 써서 다시 표현하면, 복음의 능력은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막혀 있어서 탈이 납니다. 몸도, 마음도 영도. 몸의 어느 부분이 막히면 병에 걸리거나 죽습니다. 마음이 막히면 인간관계에 탈이 납니다. 관계에 탈이 나면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발생하여 인간이 서로를 헤치고 죽이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우리의 영은 죽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인생이 아주 허무해집니다.

 

복음은 구원인데, 그 구원은 전인적입니다. 몸도, 마음도, 영도, 모두 치유합니다. 막힌 담을 허물어줍니다. 몸이 화해하면 건강해지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마음이 화해하면 화평해지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영이 화해하면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우리의 삶 모든 것에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죽은 다음에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그 구원은 화해입니다.

 

우리가 요즘 경험하는 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자연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높이높이 쌓이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아픈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도 자명합니다. 복음은 화해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양극화 현상을 허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 사역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화해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우리 함께, 복음을 가지고 나가서 막힌 담을 허뭅시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6. 5. 06:36

할 수 있는 일을 간구하는 기도

(학개 2:1-9)

 

우리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학개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긴장감을 늦추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포로에서 귀환만 하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고 믿었던 이스라엘이지만,

그들은 귀환하여 성전을 짓다 말고, 자신들의 집 짓는 일에 몰두하다가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으나 성과가 없었고

무엇을 해도 마음이 기쁘고 즐겁지 못했습니다.

주님, 학개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깨우쳐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깨우쳐 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새로운 예배 처소를 허락하셔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부흥케 하실 줄 믿습니다.

그 놀라운 일에 동참하는 믿음의 자녀들 되기 원하나이다.

주님, 우리가 마음을 조금만 더 열고 주의 일에 동참하게 하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나 자신을 조금만 더 헌신하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무엇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 교회를 부흥케 하실 줄 믿습니다.

교회들이 어렵다고 모두 아우성 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교회를 들어 써 주옵소서.

우리 교회를 부흥케 하셔서 교회들의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와 설교2024. 6. 5. 06:29

고백적 시와 고백적 설교

 

신학의 언어는 고백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신학은 절대자에 대한 사랑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고백적이다. 한 존재를 향한 언어가 고백적이라면 그 사람은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다. 사랑에 빠진 모든 인간은 고백적인 언어를 쓴다. 고백적인 언어를 쓸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신앙은 절대자를 향한 사랑의 언어를 시도때도 없이 쏟아놓기 때문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고백에는 사랑의 고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시에서 배울 수 있다. ‘고백’(confession)이라는 용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발전시킨 이래 인간의 언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발전시킨 고백의 언어는 신학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문학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 종교적 고백은 신의 공동체로부의 고립, 자기소외, 불안과 불행, 고통스러운 자각과 죄의식, 회개와 죄의 공언, 신의 공동체로의 복귀와 자기동일성의 회복 등을 표현하는 수단의 성격이 강하다.[2] 종교적 고백시는 신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절대자와의 관계는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에 내적인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문학에서의 고백시는 자신의 내밀한 삶을 토로할 때 “시인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위기에 놓인 문명과 역사에 대해 말하기 위함”이다.[3]

 

1979년 『문학과 지성』을 통해 한국문단에 등단한 최승자의 시는 전형적인 고백시의 형태를 띄고 있다. 김승희는 최승자를 비롯한 여성 시인들의 시가 고백시적인 경향을 띄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1) 개인이 억압을 당하자 내면의 위기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고백적 성향이 부상하였다. 2) 1960년대의 순수/참여 논쟁, 1970년대의 민족문학 혹은 민중문학 논쟁에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개인’의 무의식이 고백적 목소리로 분출되었다. 3) 페미니즘 이론의 소개와 고백시의 번역, 소개 등에서 문화적 자극을 받아서 고백시가 나타났다.[4]

 

최승자 시의 고백적 성격이 담긴 몇 편의 시를 보자.

 

쳐라 쳐라 내 목을 쳐라. / 내 모가지가 땅바닥에 덩그렁 / 떨어지는 소리를, 땅바닥에 떨어진 / 내 모가지의 귀로 듣고 싶고 / 그러고서야 땅바닥에 떨어진 / 나의 눈을 감을 것이다

ㅡ 「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 『이 시대의 사랑』, 15.

 

옛날에 옛날에 / 애매와 모호가 살았는데 / 서로 싸웠다. / 너는 왜 그리 애매하냐고, / 그럼 너는 왜 그리 모호하냐고, / 둘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싸우며 죽어갔다. / 정신분열증과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며 죽어갔다.

ㅡ 「나날」, 『기억의 집』, 51.

 

최승자는 무한한 자기소외 경험하며 그 소외의 내적 심연을 시로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최승자의 고백적 언어는 단순히 자신의 내면 상태만을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내면 상태는 위기에 놓인 문명과 역사에 대한 반영이다. 최승자는 고백시를 통해 자기의 내면과 자기 바깥의 세계가 동일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설교할 때, 설교에서는 내면과 바깥의 동일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설교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고백적일 수밖에 없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를 향하여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에서의 내면은 교회이고 바깥은 세계이다. 설교가 고백적이라면 설교는 위기에 놓인 문명과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아픈 것은 단순히 교회 내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문명과 역사의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참아내고 이겨낸다. 그래서 아프다. 설교는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밝힐 필요가 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의 삶이 아픈 이유는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문명과 역사가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이것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교회는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어떤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할지, 무엇을 위해서 간구해야 할지 바르게 알 수 있다.



[1] 김정신, 『고통의 시쓰기, 사랑의 시읽기』 (서울: 아모르문디, 2019), 10.

[2] 송무, 「고백시의 성격과 의의」, 『영미어문학연구』 1집, 1984, 96-97.

[3] 김정신, 11.

[4] 위의 책, 15-16.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6. 5. 06:28

갈 만한 교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에스라 3:8-13)

 

우리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이 우리 교회에 부어주실 은총을 기대합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의 예상치 못한 은총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쓰고

함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교회를 통하여 주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교회가 힘들다, 어렵다 하는 이 시대에

어둠과 풍파를 뚫고 지나가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고전하고 있고 교회들에게 희망이 되게 하시고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기쁨을 되찾아 주는

그리스도의 숨결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갈 만한 교회가 되게 하셔서

우리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에게

푸른 풀밭이 되게 하시고 쉴 만한 물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