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2. 10. 29. 04:48

[기후교회로 가는 길]

 

2. 파괴된 세상과 하나님의 사랑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독일군들은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말살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강제 수용소에 몰아넣고 잔인한 방식으로 죽였습니다. 이렇게까지 끔찍한 일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절망에 빠졌고, 끔찍한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으면서 이런 절실한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인간의 이성은 미래에 대하여 장미빛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떤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통념을 뒤집어 놓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이 그것이 입니다. 이성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것은 결국 처참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한 비참한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인간 이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신학자들은 신학을 다시 정립했습니다. 이성이 몰아낸 신앙의 자리를 다시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죠. 다시 말해, 하나님을 쫓아낸 세상에 다시 하나님을 모셔 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그러한 세상을 경험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세상입니다. 파괴되고 있는 세상. 짐 안탈 목사님은 아주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몬타나(Montana) 주 버트(Butte)에 있는 구리 폐광, 버클리 광산(Berkeley Pit)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기 공급에 쓰이는 구리를 생산하기 위해 파헤쳐진 버클리 광산은 한 때 세계의 구리 수요의 3분의 1을 공급하던 거대한 구리 광산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버클리 광산이 폐광된 후, 그곳에 물이 차면서 자연스럽게 거대한 연못이 생겨났습니다. 그 연못의 물은 구리, 카드뮴, 아연, 비소 등이 섞인 오염된 물이었고, 환경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겨울이 다가오자 남쪽으로 이동하던 기러기 떼가 잠시 쉬어 가기 위해 그 거대한 연못에 내려 앉았습니다. 밤새 연못으로부터 기러기 떼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아침에 가보니, 모든 기러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배를 갈라보니, 내장이 모두 녹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 발생한 때는 1995년입니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2016년 똑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이때는 더 많은 기러기 떼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자원을 얻기 위해 무분별하게 파헤쳐진 광산과 그 이후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아 엉뚱한 생명들이 죽어 나가는, 이렇게 파괴된 세상, 이런 세상이 바로 하나님 없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이렇게 파괴된(또는 파괴되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짐 안탈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파괴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비통해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근본적인 사명이라고 나는 믿는다”(기후교회, 83쪽). 파괴된 세상을 향해 비통한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의 마음은 비통한 마음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파괴된 세상을 향해 비통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파괴된 세상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파괴된 세상을 향해 비통한 마음을 갖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성경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아주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베트남 전쟁 반대와 소수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힘썼던 인권 운동가 줄리안 본드(Julian Bond)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큰 울림을 줍니다. 1960년대부터 인권 운동가로 살았던 본드는 사회변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끈덕진 지속성”이라고 말합니다. 끈덕진 지속성을 갖는 일은 영성이 형성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해서 공부하는 이유는 기후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끈덕진 지속성 외에 사회변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략과 연대입니다. 그러니까, 전략, 연대, 그리고 끈덕진 지속성은 사회변혁을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요소입니다.

 

『찬미받으소서』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은 “우리는 새로운 보편적 연대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찬미받으소서. 21쪽).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 ‘보편적 연대’를 말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는 ‘보편적인’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보편적인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인종과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종교다원주의 세상입니다. 하나의 보편적인 종교가 지배하지 않고, 여러 개의 종교가 가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 외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이 서로 종교적 가치를 놓아두고 경쟁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연대’를 말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기후변화의 문제는 각자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후변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각자 종교적 신념의 바탕 위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서로가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후교회』에는 상상으로 쓴 편지가 등장합니다. 제목은 “2070년 성회수요일에 교회 문을 닫게 되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기후교회, 99-105쪽).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아주 가슴 아픈 문구가 나옵니다. “나의 가장 큰 슬픔은 지난 수십 년 동안에, 신앙이 가장 크게 필요한 시간에, 마치 코끼리, 호랑이, 판다, 그 밖의 수천 종의 생물종들의 멸종을 매년 성 프란체스코의 날에 애도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인류가 하나님을 포기한 것은 널리 번진 전쟁의 증가, 국경 장벽들에서의 지속적인 살해들, 사정없는 모기들이 전염시킨 바이러스들이 이제는 심지어 캐나다에도 침략했다는 것 등등에 대한 정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문명생활의 파괴자들로(유지자들이 아니라) 경험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으로 봅니다”(101쪽).

 

끔찍한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유슈비츠와 같은 끔찍한 일을 경험한 많은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고 질문하며, 자신들의 고통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렸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만약, 기후변화를 계속 방치하여, 기후변화로 인해 더 깊어지는 사회적 문제들 가운데 끔찍한 일들을 앞으로 계속 경험하게 된다면,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즉, 기후변화 때문에 코끼리, 호랑이, 판다 등 수많은 생물종들이 멸종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멸종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서 열심을 내야 하는 이유는 파괴되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신앙을 잃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멸종’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지, 멸망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후변화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초한 재앙입니다. 인간들이 연대하여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을 막아내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고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세상에 선포하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바로 지금,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