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시 그 자체]

 

파리코민이 낳은 시인 랭보의 '견자의 미학'에 의하면, 자유로운 주체인 견자(Voyant)가 되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되는 상태에 놓인다. 견자는 '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되다"(눅 10:23). 이것이 '견자'의 의미 일 것이다.

 

랭보에 의하면 '견자(보는 자)'는 내 의지나 바람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나 바람을 좌절시키면서 내 앞에 주어진 것(객관/대상)을 보는 자이다. 즉 견자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자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지 않더라도 내 앞에 주어진 대상이 보라고 하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견자가 아니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들은 이미 정해진 것들만 보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의 감각들이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넘어서는 '대상'이기 때문에 현재 고착된 감각들에 대한 초월 또는 극복 없이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랭보는 견자가 되기 위하여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감각들의 착란'이라고 말한다. 감각들의 착란.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이렇게 보라'고 우리 앞에 던져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우리는 감각의 질서를 규정하고 지배하고 있는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시켜야 한다. 이러한 작업 없이, 즉 이러한 감각들의 착란 없이 내 앞에 던져진 대상을 그대로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랭보에게 시란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서 기존의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시켜 보이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옮긴, '미지(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의 세상을 펼쳐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상징주의' 또는 '초현실주의'라고 부른다. 사실적이지 않아서 상징주의, 초현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에 가려져 있는 '전복적인 현실(미지)'을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 끔 펼쳐보여주기 때문에 상징주의, 초현실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착란된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활은 기존의 규칙과 이성, 그리고 사유를 전복시킨 '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우리 앞에 던져진 대상인 부활을 착란된 감각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시인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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