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28. 19:56

불평 이야기 (Murmuring Narrative)

ㅡ 불평하라 그리고 구원을 경험하라

(출애굽기 15:22-27)

 

1. 출애굽 이야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에는 황당한 장면이 여럿 나온다. 대표적으로,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정탐꾼 12명을 보내 가나안을 살핀 후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고, ‘우리는 그들(아낙자손/거인족들) 보기에 메뚜기 같다’란 말을 듣고 실망한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 하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외칠 때이다. 또한,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산 위로 올라갔을 때 아래에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모세를 생각하며 불안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한 일도 황당한 장면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보는, 홍해의 구원 경험 후 찬송과 찬양을 주님께 돌린 후에 금방 돌아서서 이렇게 불평을 늘어 놓는 상황이다.

 

2. 출애굽기는 크게 세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출애굽하는 이야기. 여기에는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둘째, 시내산 이야기. 여기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이야기와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셋째, 성막 건축 이야기. 여기에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 이후에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성막을 제작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본문의 이야기는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가지로 시험하시는 하나님과 그때마다 하나님과 모세에게 주저 없이 원망과 불평을 토해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19장에서 시내산에 도달하기까지 불평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 불평 이야기 속에 만나 이야기가 등장한다.

 

3. 수르 광야에 진입해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난 이스라엘, 이들은 사흘 길을 걸어왔는데도 마실 물을 얻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겨우 도착한 마라에서 물을 얻게 되는데 그 기쁨도 잠시,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불평하기 시작한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24절).

 

4. ‘마라’, 즉 ‘쓰다’는 룻기에서도 나온다.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 땅에 이민 갔던 나오미는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고 며느리 룻과 달랑 둘이서 고향 땅에 돌아와서 자신을 맞아주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라. 나를 마라라 불러라.”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인데, 더 이상 자신의 삶이 기쁘지 않으니,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 한다. 마라, 쓰다는 뜻이다. 나의 인생이 쓰다는 뜻이다. 참 마음 아픈 이야기다.

 

5. 우리는 평소에 ‘쓰디쓴 인생’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하는 게 좋다. 거기에는 많은 가르침이 있다. 한국인 중에는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 같은 것이 있고, 외국인 중에는 홀로 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이야기 같은 것이 있고, 미국의 인디언의 슬픈 역사를 담은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같은 이야기가 있다. 강자의 역사보다는 약자의 역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성경책 자체가 ‘쓰디쓴’ 이야기이다. 구약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만큼 쓰디쓴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시대에 성경이 점점 읽히지 않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성경을 더 열심히 읽는 영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6. 열 가지 재앙을 내시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아닌가?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모세 앞에서 불평과 원망을 토해낸다. 우리 말로 ‘원망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룬’은 적대적인 감정을 품은 원망을 표현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능력으로 출애굽 했고 홍해를 건넜다는 그 어떠한 인식의 흔적도 없는 불평과 원망이다. 사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구원 이야기를 듣고 감사하고 찬양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 앞에서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인식의 흔적도 없을 정도로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게 된다. “하나님 믿어도 다 소용없네! 신앙이 무슨 소용이야.” 이런 냉소적인 원망과 불평 말이다.

 

7. 이스라엘 백성들의 냉소적인 원망과 불평(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않는) 앞에서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모세 자신을 향하여 원망을 쏟아 놓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면한다는 것은 모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끔찍한 일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부르짖음은 그만큼 간절함이 베어 있는 부르짖음이었다는 뜻이다. 모세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은 한 나무를 가리키시며 응급 처방을 내리신다. 그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게 되었다. 즉 먹을 수 있는 물이 된 것이다.

 

8.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다. 마라의 불평 이야기에서 보듯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불편하고 불행한 일이 반복될 뿐이다. 아무리 응급 처방을 내려 불평과 원망을 없애 준다고 해도, 그것은 그때 뿐이고, 살면서 만나는 어려움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맞이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살아갈 근본적인 해결법을 제시하신다. 그들을 위해 율례(호크/statute)와 법도(미쉬파트/regulation)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율례와 법도는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뜻을 알고 있는지, 그 뜻대로 잘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성장시키는 시험을 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들어 순종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 중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신을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신다. 구별하고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치료하시고 다독이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0. 이러한 언약의 말씀이 전해진 후, 이스라엘이 도착한 곳은 ‘엘림’이라는 곳이다. 참 예쁜 이름이다. 딸이 있으면 지어주고 싶은 이름이다. (교회 이름으로도 참 좋은 이름인데 이미 엘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너무 많다. 그리고 사실 교회 이름은 그 지역 이름을 따서 짓는 게 가장 좋다. 처음 교회들은 모두 그 교회가 세워진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지금은 한 지역에 교회가 많아서 그게 어렵다. 안타까운 일이다.) 엘림, 열두 개의 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이스라엘은 거기서 물을 얻고 쉼과 평안을 얻는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드러난 곳이다. 우리의 삶도 엘림에 다다르게 되기를! (우리 교회가 비록 엘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엘림 같은 곳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이런 문구를 쓴 것이다.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세화교회로 오세요!”)

 

11.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불평 이야기(Murmuring Story)’에서 우리가 꼭 배워야 할할 것 있다. 인생을 살면서 어렵고 힘들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화나고 슬픈 일을 만나거든, 불평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다만, 불평을 하되 올바른 존재에게 해야 한다. (유학 나와서 마음이 울적하고 힘들 때 나는 ‘반지의 제왕’을 보고 또 보곤 했다. 요즘 마음이 울적하고 힘들 때는 마블 영화를 돌려보곤 한다.) 어벤져스(The Averngers) 시리즈 중 Infinity War에서 모든 대사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남는 대사는 소울 스톤을 구하기 위하여 타노스(Thanos)와 그의 양딸 고모라(Gamora)가 보르미어(Vormir)라는 행성에 다다랐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는 레드 스컬이 한 말이다. “We are all wrong!”

 

12. 우리는 모두 틀렸다. 옳지 못하다. 의롭지 못하다. 옳지 못한 내가 옳지 못한 누군가에게 불평을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옳지 못한 나는 옳은 누군가에게 불평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불평을 하게 될 때,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에게 하면 안 되고, 언제나 옳으신 분, 한 분 하나님께 해야 한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삶의 지혜이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불평의 유발자/사건에 대하여 눈감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에게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 때,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먼저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진솔한 기도가 없는 불평은 또 다른 죄와 폭력을 낳을 뿐이다.)

 

13. 우리는 불평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불평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온전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전하게 되어야 할 사람이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짓는 사람이고 죄 용서함이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어야 할 사람이다. 우리는 위로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는 생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구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다.

 

14. 반면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불평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불평을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온전하게 되는 이가 아니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죄를 짓는 분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거룩하게 되는 이가 아니시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위로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위로를 주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이시고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원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15. 우리는 불평을 할 때, 올바르게 해야한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그럴 때 구원이 온다. 우리는 모두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구원할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구원이 필요한 존재/사람’에게 구원을 간구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고 불경한 일이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구원을 주시는 분에게 구원을 간구한 것이 올바르고 마땅한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16. 불평하라! 그리고 구원을 경험하라! 올바르게, 하나님께 불평하는 자!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열 가지의 재앙을 통해서, 그리고 홍해를 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평을 들으시고 그들을 돌보셨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치료하시고 위로하셨다. 치료하는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신다. 불평과 원망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구원을 주시는 치료하는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으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엘림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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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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