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 존재의 언어 습득하기]

 

일상의 기능어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읽기'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기능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사람들의 시는 그나마 읽기 어렵지 않으나, 시는 원래 기능의 언어가 아닌 존재의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밥을 먹는다'는 기능어로 읽힐 수 있다. 밥을 먹는 기능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라는 표현은 존재어이다. 현실에서 어둠을 먹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는 말은 '밥을 먹는다'는 말보다 인간 존재를 더 깊이 드러내주고 보여준다.

 

'시읽기'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들은 기능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어를 사용한다. 시의 언어는 존재의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존재의 언어로 씌어진 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언어로 씌어졌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도 기능어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하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의 일상은 온통 기능어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능적인 말을 하고, 기능적인 관계를 맺고, 기능적인 사랑을 나눌 뿐이다. 기능적인 언어를 통해서만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허무에 이르게 되고, 의미없음에 이르게 된다. 그 허무와 의미없음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기능적인 일에 몰두하는가.

 

존재의 언어를 사용하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존재의 낯선 세계로 들어가 존재를 끌어안는 행위와 같다. 낯설기만 한 존재의 언어, 시를 읽고 또 읽다보면 어느 순간 존재의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존재의 언어인 시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존재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언어는 영원히 낯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능어와 존재어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능어는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낯설지 않지만, 존재어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은 죽을 때까지 쉬면 안 된다. 존재는 늘 낯설다. 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존재의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존재를 잃어버리는 일만큼 슬픈 일은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슬픈 이유는 우리가 너무도 자주 우리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능어 만을 요구하는 이 세상, 기능어 만을 쓰도록 만들어 자기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하여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는 이 세상에 저항하려면,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존재의 언어인 시읽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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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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