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과 방패의 존재론]

 

RO(Radical Orthodoxy/급진적 정통주의)에 의하면, 존 스코투스에 의해서 발생한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피조물도 존재한다는 주장. 이 주장에 의하여 피조물은 존재의 자율성을 얻는다. 즉, 피조물은 창조주에 기대지 않고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을 통하여 근대의 자율적 주체가 탄생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율적 주체(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무성(허무/nothingness)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무주의(nihilism)은 생명을 축소시키고 삶의 의미를 빼앗아 인간을 평면에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계몽주의의 기획은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에게서 발흥한 '존재의 일의성'을 밀어부쳐 인간 존재에게 신적인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이 신의 간섭이나 신에 대한 의존 없이 '자율적으로' 삶을 구축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자율적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와 자율적 이성(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부여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RO는 존재의 일의성에 근거한 근대(modernity)가 허무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비판하며,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의 의존성을 인정하는 참여의 형이상학(participatory metaphysics)을 주장한다. 존재의 일의성과는 달리 참여의 존재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신에게 의존되어(suspended)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여(participation)'은 존재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국 RO가 주장하는 참여의 존재론은 플라톤 철학으로의 귀환이다. 화이트헤드가 일찍이 말했듯이,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였다. 다시 말해,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에 동의하든지, 아니면 플라톤 철학을 반대하고 극복하든지, 이 둘 중 하나의 작업이었다.

 

플라톤 철학을 극렬하게 반대한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의 대중화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플라톤 철학이 서양 지성사, 또는 문화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표현했는데, 결국 니체가 하고 싶었던 작업은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의 대중화라고 생각되는 기독교를 동시에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서양철학의 존재론(ontology)를 보면서, '모순'이라는 말을 생성한 '창과 방패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창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두 손에 들고 동시에 장사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서양철학사는 마치 그와 같이 보였다.

 

인간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플라톤 철학이 말하고,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인가.

 

니체는 인간이 가진 자율적 이성을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로 표현하며, 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또는 신에게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또는 신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에게 의지할 수 없는 인간 존재를 말하며, 자율적으로 존재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안되었지만, 결국 허무에 이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존재론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 존재론에 대한 전제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그 다음 단추를 아무리 정교하게 끼워도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RO가 귀환시키려 하는 플라톤 철학은 '참여의 존재론'을 통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신에 대한 모든 피조물의 의존성을 설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철학적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플라톤 철학이 주장했던 '존재의 동일성(모든 존재는 존재를 넘어서는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개념은 언제든지 폭력이나 억압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일의성과 참여의 존재론은 창과 방패 같은 싸움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기독교가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살육을 저질렀는가. 그런 측면에서 신 없이, 인간들끼리 자율적인 나라를 세워보겠다는 기획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의 기획은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들여다볼 때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다. 신을 배제한 자율적 이성, 자율적 주체가 만든 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끔찍한 폭력과 배제가 발생하고 있고, 생명이 형편없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여의 존재론에 바탕이 되는 플라톤 철학의 귀환과 평면적으로 생명을 축소시킨 근대의 존재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적 귀환은 불가피해 보인다. 다만, 이러한 작업을 해 나감에 있어, 근대 이전에 플라톤 철학과 그를 바탕으로 발전한 기독교 신학/체제가 저질렀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방식으로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공적 귀환을 기획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RO의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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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