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14. 14:03

2011 3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5-17; 3:1-7

제목: 예스, , 예스

 

지난 수요일,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합니다. 참회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주일은 빼고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십니까? 춘분이 지나 오는 보름달 후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 입니다. 춘분은 대개 3 21일쯤 됩니다. 그 후 보름달이 얼마나 빨리 뜨느냐에 따라서 부활절이 빨리 오느냐 좀 늦게 오느냐 결정되는 것이죠. 올해 같은 경우는 춘분인 3 21일을 지나, 보름달이 뜨는 날이 4 17일이기 때문에, 보름달이 뜬 그 날 이후 첫 번째로 맞는 주일이 4 24일이기 때문에 부활절이 4 24일로 정해진 것이죠. 이 법칙만 알면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 스스로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참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40년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금식하시며 하나님을 만난 기간이 40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마귀의 유혹이 왔습니다. 교회가 40일을 정해 사순절로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40일 간의 영적 훈련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유혹이 들어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고,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부분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만 읽었고, 복음서의 말씀은 대부분의 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이야기라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엮여 선포될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 주신 후 어떻게 우리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죄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왜 죄가 당신의 창조세계에 들어오게 놓아두셨는지, 등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창세기가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창세기는 우리에게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어온 것은 미스터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미스터리는 신비인데, 이는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체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 파악되어 가는 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종말론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종말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도 드러날 것이고, 죄의 신비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현재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등한히 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실체를 알아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와 복음서의 이야기는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론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우선 창세기에서 보면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뭔가 솔깃한 것을 인간에게 던져주어서 그것을 덥석 물게끔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가 제시하는 솔깃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었습니다.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하며 꼬드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피조물로 살기보다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생각조차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잘못 설정하는 겁니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분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건 우리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잘못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복된 인간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통해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벗어난, 이탈한 그야말로 추악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 가운데서 사는 복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도 차버리고, 하나님의 영역 밖으로 빠져 나가서 살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인생이 고달프고 죄 가운데 어그러지는 것이죠.

 

오늘 설교 제목이 예스, , 예스인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긍정하는 것이 첫 번째 예스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복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무한한 복을 내리셔서 복되게 하신 존재입니다. 이게 바로 예스입니다. 이 복을 무한히 받으면서 사는 인간이 첫 번째 예스에 해당하는 인간입니다.

 

, 그런데 미스터리하게도 예스가운데 살아가던 인간에게 시험이 옵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 가운데서 만족하며 살아야 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시장에 가서 거위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다음날 거위가 낳은 알을 가져다가 요리 해 먹으려고 거위 집에 갔는데, 가서 보니 거위가 낳은 알이 그냥 알이 아니라 황금알이었습니다. 너무도 신이 농부는 아내를 불러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위는 하루에 한 개씩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덕분에 농부 부부는 점차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 부부는 서로 말하기를, 하루에 한 개씩만 황금알을 낳으니까 감질 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거위의 배를 가르면 거기에는 수 많은 황금이 들어 있을 거고, 그것을 차지하면 감질나게 하루에 한 개씩 황금알을 가질 필요 없이 한 번에 엄청난 부자가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칼을 가져다가 거위의 배를 가릅니다. 물론 거위는 죽었죠. 그러나 거위의 배를 들여다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위도 잃고, 황금도 못 찾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만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예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족합니다. 한 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한 눈 팔게 하는 유혹들이 엄청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이 타락의 순간이고 죄악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유혹이 만만치 않습니다. 너무 매력적인 것들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모두 채워줄 수 있는 것 같은 것들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온 유혹도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 제시된 사탄의 유혹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1.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2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네가 땅에 닿기도 전에 너를 받들어 줄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처럼 되라고 하는 유혹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우쭐해지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의존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 산다는 뜻이지, 하나님처럼 스스로 복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유혹 받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양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 믿으니까 그 어떤 물리적 법칙이나 자연 법칙이 자신을 비켜 간다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대처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큰 코 다칩니다. 나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하면서 오히려 시험에 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되는 법, 그리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는 것과 똑 같은 시험이 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우리 상식에서도 십자가에서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바라보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알아듣고 볼 수 있도록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더 잘 믿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신적인 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무력한 죽음만이 십자가에 걸려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만족하는 법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사탄이에게 가 됩니다. 사탄이에게 눈을 돌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모습 자체가 하사탄이에게 가 되는 것이죠. 그래야, 처음 우리에게 내려졌던 복, 하나님께 향했던 예스가 우리의 삶 속에 지속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바로 이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태초부터 우리에게 내려진 복은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복을 차버리게 끔 만드는 사탄의 유혹, 죄악이 끊임 없이 우리에게 몰려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더욱더 힘차게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그 유혹에 대해서 를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 예스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사순절기 동안 예수님처럼 우리도 광야에서 영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순절기의 영적인 훈련이 우리를 부활의 기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탄이에게 예스하면 하나님께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스하면 사탄이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예스, , 예스의 인생을 사십시오. “예스, 예스, 의 인생은 버리십시오. 끝까지, 어떤 유혹의 상황, 시련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붙들어서 예스, , 예스의 복된 인생을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