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이야기2015. 11. 1. 06:05

지우개와 놀이

 

어느 날 교회 주차장에 지우개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요일만 되면 아이들은 수요 예배 때문에 교회에 오는데, 그때 교회에 오는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 밖에 없다. 예배 드리는 동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공작활동도 하고 게임도 하고 공부도 한다. 그 시간을 위해 아이들은 집에서 쓰던 학용품들을 교회에 가져오는데, 다시 집으로 가지고 가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지우개인 것 같다.

 

지우개는 나의 중학교 1학년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그 당시 우리 학교(영동중학교)에서는 지우개 싸움이 유행이었다. 일명 지우개 레슬링인데, 지우개를 뾰족한 샤프 끝으로 조정하여 상대방 지우개에 세 번 먼저 걸치거나, 아니면 먼저 위로 올라타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나는 그 당시 우리 반에서 지우개 싸움을 제일 잘했다(사실, 진짜 싸움도 제일 잘했다.^^). 아무도 나의 적수가 없었다. 지우개 싸움을 꾀나 한다는 아이들이 매일 같이 나에게 도전했지만, 언제나 이겼다. 그때 지우개 싸움을 해서 따낸 지우개가 수 백 개에 이른다. 나는 지우개를 크기에 따라 별 하나에서 별 다섯 개까지 등급이 매겼었는데, 손바닥 만한 지우개도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 나온 이래로 그 많던 지우개의 행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 이전까지 그때 딴 지우개를 보관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지우개 싸움 같은 것을 하지 않지만 우리 어릴 적에는 그렇게 놀았다. 모든 것이 놀이 기구였다. 사실 지우개 싸움도 산업화 된 이후에 나온 신종 놀이였다. 그 이전에는 지우개가 귀해서 지우개 싸움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지우개 구하기가 쉬워지고 값이 싸진 후에 지우개 싸움도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어릴 적 가장 대중화되었던 놀이는 딱지치기와 구슬치기였다. 헌공책이나 잡지를 뜯어 만든 딱지로 서로의 딱지를 넘기며 놀았다. 구슬이 등장한 뒤, 딱지치기 보다 구슬치기가 더 유행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나 친구가 없으면 못 노는 그런 놀이였다.

 

놀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거였다. 지금은 아이들이 전자게임이나 온라인 게임을 주로 하기 때문에 친구가 없어도 혼자 놀이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놀이라기 보다 그냥 게임일 뿐이다. 놀이는 혼자서 하면 재미 없다. 친구가 있어야 재밌다.

 

호이징가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놀이하는 인간이었다. 인간은 놀이를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놀이를 통해서 사회적 관계를 배우면서 성장한다. 놀이는 그만큼 인간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인 것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놀이하는 게 쉽지 않다. 세상을 다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등져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놀이를 할 때만큼 기쁘고 즐겁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시간이 언제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더 이상 놀이에 흥을 못 느끼는 인간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늘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과 지우개 싸움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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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