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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12. 07:56

주권과 기도

창세기 26

(창세기 25:19-34)

 

파란만장했던 아브라함의 시대가 끝나고 약속의 아들 이삭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신앙사를 형성해 간다. 성경은 이삭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이렇게 알린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19). 아브라함의 족보가 아니라, 이삭의 족보가 등장한다. 물론 그의 족보는 매우 짧다. 아버지는 아브라함이고, 그의 아들은 이제 막 태어난 야곱과 에서이다. 이것이 그의 족보 전부이지만, 이 짧은 족보는 우주보다 크다. 왜냐하면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이 삶 속에 들어오시는 순간, 그 누구든지 그의 삶은 우주보다 큰 삶이 된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을 받아 낳은 아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단순히 아들 하나만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이 번창할 것이고 그의 자손들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그 약속을 믿기에는 참 어려운 일이 또 발생한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불임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불임의 문제는 이삭만 겪은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겪었다. 그런데, 이삭은 그 불임 문제를 대함에 있어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며 여호와께 간구하매”(20). 이삭은 아내의 불임 문제를 놓아두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지극히 당연한 행동인 것 같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기도는 믿는 이에게 늘 과제인데, 두 가지가 성립돼야 온전한 기도가 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개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능자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고, 그분의 존재를 믿더라도 그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 기도는 막연해 진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문제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 자신의 문제를 놓아 두고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가 필요한 누군가에 대한 사랑 없이 기도는 나오지 않는다.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인데, 사랑의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가장 귀한 일은 그 사랑의 대상을 위해 기도하는 행위이다.

 

이삭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다. 아마도 모리아 산에서 그것을 배웠을 것이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여호와 이레를 배웠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그는 모리아 산에서 몸소 체험했다. 또한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사랑했다. 아내 리브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어머니의 죽음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은 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24:67).

 

기도는 믿음과 사랑의 열매이다. 기도를 다른 말로 하면 소망(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 인간이 지녀야 하는 최고의 덕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한 온전한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희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소망(희망)을 잃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전영택 선생이 작사한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 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우리는 바쁘고 피곤한 삶에 젖어 이것을 잊고 산다. 예수 믿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이루어야 할 소망이 무엇인지 잊고 산다. 신앙은 나 자신만 잘 되면 그만인 이기주의를 생산하지 않는다. 신앙은 나를 너머 나의 울타리를 살피게 한다. 신앙은 그냥 즐기고 마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신앙은 변화를 수반한다. 신앙은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아편이 아니다. 신앙은 통증에서의 구원이다.

 

가정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삶의 토대인데,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믿음의 가정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나 혼자 믿는 것은 오히려 큰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래서 전도(예수님을 전하는 것)는 개인에게 일어나기 보다 가정 단위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풀려났을 때 감옥 간수를 전도하면서 선포한 내용은 이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네 집이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의 구원 선포가 있은 후, 간수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도록 한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16:32-33).

 

가정의 행복은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가족을 향한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소망이다. 이 소망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가족을 사랑하는가? 나이 많은 요한은 말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에 두고, 우리의 창조자시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의 대표 증거이다.

 

남편의 삶을 위하여, 아내의 삶을 위하여, 자녀의 삶을 위하여, 형제의 삶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할 것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나오지 못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을 아닐까? 나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느라 몸이 피곤해서 기도의 자리에 못나오는 경우도 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사실 기도는 자칫 잘못하다간 말의 잔치로 끝날 수 있다. 기도의 자리에 나온다 하더라도 기도라는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삶이라고 하는 경건의 능력이 실현되지 않으면 기도만큼 헛된 것도 없다.

 

기도의 자리에 나와 기도하는 것과 더불어 행해져야 할 것은 삶의 기도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삶의 자리가 곧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을 위해 일터에 나가 일하면서 그 일을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일 하는 것을 기쁨과 감사로 여기는 태도 말이다. 노동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고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열매의 질이 달라진다.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과 자신의 노동이 곧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사람은 그 열매가 다르다.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노동은 그것 자체가 거룩한 기도이다. 기도가 삶으로 구현된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것을 최고의 기도라고 여긴다.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이다. 노동과 기도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삭은 아내를 위하여 기도 드렸다. 그의 기도가 말과 혀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의 기도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증명해 주신다.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하였더니”(21).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루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이고 주권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사랑의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에 동참하길 바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기도는 인간의 숙명이다.

 

기도의 응답으로 임신하게 된 리브가는 또 한 번 인간의 숙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22). 뱃속에 잉태된 두 자녀를 사랑한 리브가는 엄마로서 자녀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뱃속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개될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싸움이 태 속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한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이것이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만날 때 어리둥절해 한다. 리브가의 배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어리둥절한 일이고, 하나님의 말씀도 어리둥절한 말씀이다. 특별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은 참으로 어리둥절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눈에 보기에 굉장히 불합리해 보일 때가 많다. 하나님의 주권은 오직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신비이다.

 

이삭은 자손 번창에 대한 약속이 불임으로 막혔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약속을 이어나갔다. 리브가는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기도함으로 태중에서부터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드린 이삭과 리브가의 기도 가운데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쌍둥이였고, 다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양 누가 먼저 나왔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발 뒤꿈치를 잡고 연달아 태어났다. 이들의 싸움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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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