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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21. 12:58

가정의 기쁨

(삼상 1:19-28)

 

매년제를 올리러 실로의 성전에 갔을 때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자식이 없는 것 때문에 마음이 몹시도 아팠던 한나의 사정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축복을 빌어 준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

 

간절한 기도 끝에 제사장으로부터 축복의 선언을 들은 한나는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그 일 때문에 더 이상 마음 쓰지 않기로 한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 1:18).

 

간절한 기도에는 응답이 꼭 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얻게 되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다. 옛날에는 성전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교통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 자주 갈 수 없었다.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제를 빠짐 없이 드렸다. 교통 수단이 발달해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로 성전에 와서 예배 드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는 대목이다.

 

예배가 너무 많다 보니 예배가 습관적인 타성으로 전락해 버린 이유도 있겠지만, 그런 중에서도 나의 예배가 습관적인 타성에 젖은 예배인지 아니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 하나는 바로 마음의 간절함이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소원을 하나씩 마음에 품고 예배 드리러 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위이지만, 예배의 행위는 매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어떠한 선물(은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매년제를 드린 다음 날, 성전을 떠나면서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또 한 번의 예배를 드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룩한 합방을 갖는다. 무엇을 하든지 예배(Ritural)’ 의식을 먼저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떠한 행위든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행하려고 하는 일이 거룩함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일례로, 예배 드린 후에 바람 피울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도둑질을 할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늙은 부모를 학대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일을 행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든다.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놓아두고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거룩하다는 증거가 된다. 반면에 어떠한 일을 놓아두고 예배 드리는 것을 피하게 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면 그 일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요즘 시대는 특별히 성(sex)이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이유 중 하나가 성(sex) 때문인데, 이것이 타락하다 보니까 가정이 깨지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성 때문이다. 잠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언 5:18). 엘가나와 한나는 아이를 생산하는데 있어서 을 거룩하게 승화시킨 좋은 예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 후에 아이를 생산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태어난 아기와 가정의 거룩함이 드러난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 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19-20).

 

이렇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행한 일은 기쁨을 낳는다. 사무엘의 탄생을 통해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은 기쁨이 넘쳤다. 그리고 단순히 그 기쁨은 그들의 가정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암울했던 사사시대에도 큰 기쁨이 되었다. 사무엘의 탄생은 길고 긴 터널을 지나던 사사시대에 빛을 던져주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정의 기쁨은 그냥 가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가정의 울타리를 타고 흘러 넘쳐 더 큰 기쁨을 생산해 낸다. 요즘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가족의 기쁨을 위해서 구축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희생시키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너무도 오랫동안 사회는 가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렇다 보니, 가족은 더 이상 혼자만의 힘으로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족이 해체되는 일이 너무도 많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가슴 아픈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전쟁 때문에 엄마를 잃은 이라크의 한 여자 아이가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땅 바닥에 엄마 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 위에서 곤히 잠든 모습이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가정의 행복을 무참히 짓밟는 폭력은 이 땅에 하루 빨리 추방되어야 다.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큰 사회적 문제는 우리가 때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가정에서 가정의 기쁨을 위하여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놓고 한숨만 쉬고 있기 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가정의 기쁨을 한 번 살펴 보자.

 

첫째, 예배이다.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매년 모든 가정이 실로에 있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이 가정이 매년성전에서 예배 드렸다는 것은 성실하게 예배 드렸다는 뜻이다. 온 가정(household)이 함께 예배 드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가정 신앙의 트랜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아빠가 가는 교회가 따로 있고, 엄마가 가는 교회가 따로 있고, 특별히 자녀들이 가는 교회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더 심한 경우는 아빠의 종교가 다르고, 엄마의 종교가 다르고, 자녀의 종교가 다른 경우도 있다. 가정 구성원 각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예배는 온 가정이 함께 한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 좋다.

 

또한 공적인 예배에 온 가정이 함께 나와 예배 드리는 것 외에도 각 가정에서 자신들만의 특별한 예배(ritual)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요즘 영성신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각자의 의식(rituals)’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물론 일상이 ritual에 매몰될 정도로 그럴 필요는 없지만, 일상이 너무 아무런 의미 없는, 그야말로 일상으로 매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간단한 ritual들은 우리 일상에 필요하다. 우리는 일상에 너무 매몰되어 있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일상이 그냥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이 아니라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경이로운 것이라는 깨닫기 위해 ritual은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가족 구성원의 생일에 예배를 드린다든지, 가족 여행을 갈 때 짧게 나마 기도를 드린다든지, 자기 전에 부모가 아이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준다든지 하는 것이다. 잠깐의 의식 행위를 통해서 먹는 것에서부터 자는 것까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 그냥 의미 없는 일상으로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가정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금요일 가정에서 성찬식을 행한다. 촛불을 켜놓고 모여 앉아 성찬식을 조촐하게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각자 돌아가면서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나 소원 또는 기도제목을 내놓고, 손을 붙잡고 기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 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한다.

 

예배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 예배는 귀찮은 것이 아니라, 공식적(official)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이름의 높여지는 시간이요, 하나님께 무한한 은총을 받는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없이 피조물인 인간이 평안을 누릴 수는 없다. 가정의 기쁨의 초석은 예배 위에 놓여져야 한다. 가정에서 예배가 귀하게 여김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가정에 기쁨과 평안을 선물(은총)로 주실 것이다.

 

둘째, 사랑이다. 사랑은 존중이라는 형태를 띨 때 그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난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하여 사무엘을 얻었다. 매년 실로의 성전으로 예배를 드리러 간 엘가나의 가정은 사무엘의 탄생 이후에도 어김 없이 그렇게 했다. 그런데, 한나는 엘가나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22). 이러한 한나의 요청에 엘가나는 동의하고 한나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23).

 

그냥 보면 이것이 무슨 존중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에 보면 남편은 아내의 서원에 대해 무효를 선언할 수 있는 법이 있다. “부녀가 혹시 그의 남편의 집에서 서원을 하였다든지 결심하고 서약을 하였다 하자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다 이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은 다 지킬 것이라 그러나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무효하게 되면 그 서원과 결심한 일에 대하여 입술로 말한 것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나니 그의 남편이 그것을 무효하게 하였은즉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시느니라”(30:10-12).

 

엘가나는 이 율법에 근거하여,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한 서원에 대하여 충분히 무효를 선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년 모든 가족이 함께 가는 실로의 제사에 동참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나를 꾸짖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엘가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나의 의견을 존중해서 한나의 뜻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기로 한 서원이 거룩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엘가나는 한나와 함께 사무엘이 젖 떼기까지 정성으로 양육했다.

 

사실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 간의 존중이 으뜸 가치로 드러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정의 기쁨은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 즉 존중의 가치가 드러나는 사랑이 흘러 넘칠 때 온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가족 아닌 사람은 존중하면서 가족 구성원은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서 가장 존중 받아야 할 사람은 가족이다.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존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려 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가족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존중할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가정에서도 가족을 존중할 줄 모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셋째, 감사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약속을 이행한다. 하나님께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뿐만이 아니라, 남편 엘가나에게 아이가 젖 떼면 자신이 직접 실로의 성전에 가서 사무엘을 바치겠다는 약속까지도 이행한다. 이것이 참 쉽지 않다. 흔히 시쳇말로 사람은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화장실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잠깐 살펴본 대로 율법이 서원을 철회하는 데 악용해서 쓰일 수 있다. 엘가나와 한나가 짜고 서원을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나에게는 감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다 보니, 서원한 대로 이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엘가나와 한나는 젖 뗀 사무엘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러 성전에 나아가면서 다음과 같이 서원제 예물을 준비해서 간다.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24). 이것만 보면 이것이 무슨 감사인가 할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에 보면 서원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이렇게 나와 있다. “번제로나 서원을 갚는 제사로나 화목제로 수송아지를 예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반 힌을 섞어 그 수송아지와 함께 드리고 전제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을지니라”(15:8-10).

 

이것과 비교해 볼 때 한나는 율법에 나와 있는 것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바친다. 이렇게 가정의 기쁨은 감사로 표현된다. 감사가 넘칠 때 가정은 기쁨 충만한 행복한 가정이 된다.

 

예배와 사랑(존중), 감사는 기쁨이 넘치는 가정의 지표이다. 가정의 기쁨, 그 출발이 예배에서 시작하는 것에 마음을 두라. 예배하는 가정은 서로 존중하게 되고, 서로 존중 받을 때 감사가 넘치게 된다. 그리고 가정의 기쁨은 가정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담장을 타고 넘어 사회와 나라의 기쁨으로 번져나간다.

 

사철에 봄 바람 불어 잇고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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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