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10.29 참여 구원론 2
  2. 2014.10.16 보라, 아들이다!
  3. 2014.10.05 계시: 해와 율법과 그리스도
  4. 2014.10.02 야곱의 결혼 3

참여 구원론

대속이 아니라 참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한다. 이것은 구원이 대속적 구원이 아니라, 참여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대속적 구원'이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또는 예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인 것 같다.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는 그들의 책에서 이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특별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그 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마가복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의 복음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교회의 정황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의 구원'에서 '대속의 구원'으로 신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후대에 씌어진 성경으로 갈수록 그 정황이 드러난다.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대조해보면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상황이 박해에서 제국의 지지로 바뀌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참여'보다는 '대속'쪽으로 구원론이 기울어진다. 그럴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교회가 대중들을 콘트롤 하기에는 '참여'보다는 '대속'이 훨씬훨씬 수월하고 '은혜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대속의 교리는 대중들을 위협하기에 좋은 문구이다.

 

성만찬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일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속교리가 낳은 병폐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이미 오해를 낳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원래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특정한 인물(예수)을 그저 의지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도반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 구원이란 그 길에 들어섬이지, 믿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나 공간으로의 이동(천국으로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이 생각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 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대속이 아니라, 참여이다. 예수는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당신의 일에 우리가 참여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인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부활'에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데,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위로를 얻으리.

 

나는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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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16. 05:51

보라, 아들이다!

(레아의 슬픔과 사랑)

창세기 36

(창세기 29:31-35)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가사 전문)

 

교회에서 애창되고 있는 찬양곡이다. 우리는 이 찬양을 함께 부르면서 서로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상대방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가 교회에서 가장 애창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만큼 서로 사랑하면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한다. 잘 지켜지는 것은 강조할 필요 없다.

 

초등학교 시절(1980년대) 미술 시간에 가장 많이 그렸던 그림은 두 가지였다. 반공 포스터와 불조심 포스터. 반공 포스터는 군사독재 시절, 그리고 북한과의 이념 대립에 국가의 에너지를 전부 쏟고 있었던 시절, 반공에 대한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불조심 포스터를 그때 그렇게도 그려댔던 이유는 그만큼 불사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산불만 해도 수 차례 된다. 산불 진화 장비가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라 산불이 한 번 나면 엄청난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잘 지켜지지 않았던 불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생겨난 가장 유명한 불조심 포스터 문구는 바로 이것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잘 지켜지는 것은 강조할 필요 없다. 문제는 잘 지켜지는 것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언제나 문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것에서 발생한다. 결혼생활의 기본은 사랑이다. 그런데, 야곱의 결혼 생활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야곱의 첫 번째 부인인 레아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었다. 이야기는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한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31).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사랑 받지 못했다에 대한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미워하다이다. ,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미워했다. ‘미워하다사랑하지 않는다보다 더 적극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매우 원초적이다. 또 한 가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은 욕망만큼 사랑하고 싶은 욕망도 매우 원초적이다. 사랑의 욕구가 원초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라는 뜻이다. 생명이 존속하려면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은 사랑과 영양분과 휴식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담고 있는 매우 원초적인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1:26-28), 사람(아담과 하와)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다.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사랑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원초적으로 말하자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말은 성관계(Sex)’에 대한 말이다. ‘성관계는 사랑의 다른 말이다. 많은 경우 성()을 타락한 형태로 경험해서 그렇지, 성은 생명에 담긴 매우 원초적인 속성이다. 사랑과 성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것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구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이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성관계를 통해서 유지된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성관계를 많이 가지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 말과 똑 같은 것이다. “많이 사랑하라.” 그러므로 생명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통해서 유지된다. 이것은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매우 원초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지면의 모든 식물과 짐승들을 주시면서 그것들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신다(1:29-30). 생명은 존속하려면 영양분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며 그것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많이 먹으라는 표현이다. 먹고 싶은 욕망은 생명 보존을 위해서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휴식)하신다. 당신의 안식은 모든 피조물에게 전가되어, 안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로 생명 안에 원초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휴식은 옵션이 아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자본주의 산업 사회가 만들어낸 허탄한 신화이다. 쉴 새 없이 기계처럼 자기 몸을 굴려대는습성이 사회에 자리 잡은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적어도 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밤에 일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명의 발달로 비교적 환하게 밤을 대하는 현대인들은 옛날의 밤을 무섭게 덮었던 어둠을 이해하지 못한다. 옛날 밤에 가장 밝은 것은 대보름 달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밤이 되면 사람들은 무조건 쉬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휴식은 옵션이 아니다. 휴식은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속성이다. 사람은 휴식하지 못하면 죽는다. 일 하는 것만 너무 강조하는 사회이다 보니 휴식하는 것에 별로 신경 못쓰는 일이 많은데, 휴식은 게으른 자의 미련함이나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니라 생명의 원초적 욕망이다. 그러므로 휴식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모두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굶고, 쉬지 못하는 일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형상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뭉개지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없다. 거기에는 거룩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거기에 거룩함이 묻어난다.

 

레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하고 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남편 야곱에게 사랑 받고 싶은 레아의 원초적인 욕구는 처절하다. 간절하고 처절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 그리고 레아는 아들을 낳는다.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레아는 아들을 낳은 뒤,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짓는다. ‘르우벤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 슬픔 가운데서 외쳐 나온 레아의 기쁨이었다. 또한 이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위로였다. 그리고 이것은 남편에게 사랑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레아의 소망이었다. 이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는 기대였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32절 후반부).

 

그런데 레아의 소망과 기대와는 달리 레아는 여전히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짓는다. ‘시므온듣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샤마에 명사형 접미사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시므온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비록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태를 열어 또 다른 아들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베어 있는 이름이다. 그러나 여전히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레아는 남편과 진정한 연합을 원했다. 그 동안 레아는 남편과 성관계를 갖긴 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연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의 이름을 레위라고 짓는다. ‘레위의 뜻은 연합된 자이다. 레아가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을 통해서 우리는 레아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34).

 

세 번의 아들을 출산하는 과정을 통해 레아의 신앙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네 번째 출산이다. 레아는 임신해서 네 번째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그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유다찬양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앞의 세 번의 출산과는 달리 더 이상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이다. 만약 그렇다면, 네 번째 아들에게 레아는 유다(찬양하다)’라는 이름보다는 '아자브(떠나다, 포기하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레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것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욕망하던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만족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큰 사랑, 절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작은 사랑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고 받는 사랑은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마음에 깊은 만족을 주는 큰 사랑, 또는 절대 사랑은 되지 못한다. 사랑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주고 받는 인간의 죄성(罪性)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큰 사랑, 절대 사랑을 주고 받게 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기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랑의 원초적 속성뿐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충만하게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할 피조물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가 또한 보여준다.

 

사람은 사랑 없이 못산다. 그래서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완전한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한 자기애, 즉 에로스의 사랑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모두 자기의 욕망에만 근거한 에로스 사랑뿐이다. 그 사랑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생명을 헤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아가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작은 사랑(에로스 사랑) 때문에 실망하여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생명을 위해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절실하다.

 

레아는 세 번의 출산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남편 야곱의 사랑보다 더 크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렇다고 물론 레아에게 남편 야곱의 사랑이 필요 없어졌다거나 남편을 무시하게 됐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더 큰 사랑, 절대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레아는 작은 사랑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레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 그 사랑 안에서 계속해서 복을 받는다. 이후 레아는 두 명의 자녀를 더 출산하고, 자신의 몸종을 통해 두 명의 자녀를 또한 출산한다. 몸종의 자녀까지 합해 총 8명의 자녀를 자신의 발 아래 둔다. 그 뿐만 아니라, 야곱의 자녀들 가운데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레위(레위지파, 제사장지파)와 유다(왕의지파, 그리스도의 조상)는 다름 아닌 레아의 태에서 나온 아들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그만큼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된다. 충만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사랑 하고 사랑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거룩해진다. 그리고 그 생명의 원초적인 욕망인 사랑을 충만하게 나눌 수 있는 길은 큰 사랑이시고 절대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그래서 레아의 이 외침, “보라, 아들이다!(르우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외침이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의 입술에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유다)”를 넣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참 고맙다. 사랑 받지 못하여 슬프지 않기를, 사랑 하지 못하여 슬프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을 때

참 많이 노력해야 했습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울어야 했습니다.

남편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

내가

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화를 내야 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

내가

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참아야 했습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윤리 때문에 ......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을 하니

사랑하는 일이 쉬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기쁨이 됩니다.

사랑하는 일이 감사가 됩니다.

 

(민혜숙의 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전문)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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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5. 23:12

계시: 해와 율법과 그리스도

(시편 19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 “계시(Revelation)”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까?

 

시인은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토라)이다.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하는 인식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게는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3). 말을 해야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존재를 가슴 속 깊이 느끼듯이, 피조물은 조물주의 사랑을 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시인이 주목하는 피조물은 해이다. 해를 통해서 시인은 자연의 질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시인은 아침이 되어 해 뜨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해를 위해 하늘에 장막(텐트, )을 지어 주셔서 밤새껏 해가 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보금자리에서 밤새껏 쉬다가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전해주는가! 아침에 떠오른 해는 저녁이 돼서 질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나누어 준다. 그 열기, 그 사랑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6)

 

자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것을 노래한 시를 소개한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한 박두진의 <>라는 시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평론가들은 박두진의 시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일종의 '메시아'의 상징이며,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매개적 존재로 표현된다.” 자연이 인간에게 일종의 메시아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숨결 때문이다. 물론 자연 자체는 (메시아)’이 아니다. 자연 자체를 신으로 보는 사상을 범신론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이 바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연은 하나님의 숨결을 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이것을 일컬어 범재신론이라고 한다. 범재신론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담아낸 신론으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잘 설명해 준다.

 

시편 기자처럼, 또는 박두진 시인처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는 일은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너머의 것을 형상화시킬 줄 아는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우리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시인이다. 만약 이 찬송가를 사랑한다면 이미 시인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찬송가 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시인은 다음으로 율법에 주목한다. 시인에게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할 어떤 규율, 법이 아니다. 율법은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율법 자체에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계시되고 있는, 율법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베풀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참된 지혜를 주며, 참 기쁨과 의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래서 시인은 율법을 사모한다. 그것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더러, 율법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바울 서신에 보면(로마서, 갈라디아서), 율법과 복음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기독교인들은 복음은 좋은 것이고 율법은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은 복음으로 받는 것이지 율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을 잘못 이해한 탓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율법은 지식(우리가 이것을 해서는 안된다)이라는 힘을 주지만, 그 지식은 함께 본래적으로 복종할 힘(우리는 이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마커스보그, 첫 번째 바울의 복음, 235). 반면에 신앙은 안에서 그 법에 따를 힘을 불러일으킨다”(같은 책 235). ,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우선성이지 율법의 폐지가 아니다. 율법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 배제된 상태로 인간의 삶에 주어진다면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숨결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경우를 보자. 2012년 대한민국의 보성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고,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명, ‘보성 삼남매 사건이다. 한 교회의 목사가 자신의 자녀 셋을 죽인 사건이다. 그가 자신의 자녀 셋을 죽인 이유가 어처구니없다. 다음의성경구절이 그들의 행동을 부추겼단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기 아니하리라”(잠언 24:13).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Sheol 죽음)에서 구원하리라”(잠언 24:14).

 

죽은 삼남매 중 어느 한 명이 죽기 전 이러한 일기를 남겼다. “2012 1 20일 목요일 TV를 보았다 재미있다 런닝맨이 재밌었다.” 런닝맨을 재미있게 본 아이들이성경에 의해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었다. 숨지기 열흘 전부터 축귀 의식이 아이들에게 행해졌고, 금식 명령이 내려졌다. 결국 몸이 허약해진 아이들은허리띠와 파리채로 채벌을 당하다 쇼크사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을에서 구원하기 위한 행위였다고 부모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성경이 런닝맨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한 순간이다. 런닝맨은 아이들에게 재미라도 줬다. 그러나 이 경우, 성경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죽음을 주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이것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숨결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율법은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우리가 경전으로 생각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성경은 복음의 율법이다. ,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기독교의 여러 종파 중, 특별히 개신교는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을 만큼 성경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 영혼이 소생되고, 지혜롭고, 마음이 기쁘고, 눈이 밝아 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성경 공부를 그렇게도 많이 하고 설교 말씀을 그렇게도 많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영혼이 소생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고, 마음이 기쁘지 못하고 눈이 오히려 어두워졌다면, 그래서 스스로 괴로움을 느끼고 여전히 남을 정죄하고, 악한 일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면, 그는 신앙이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과 율법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시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면 무슨 고백을 했을까? 이런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드러남은 모두 여기에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이 아니라, 궁극적인 계시, 즉 하나님 스스로를 세상에 보이신 절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자연도 율법도 그 빛을 잃고 우리의 모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 그 자체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땅에서 활동하실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신 빵을 얻어 먹기 위하여 예수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하늘에 내려온 산 떡이라는 비유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에게서 을 얻어 먹을 수 없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예수를 떠나간다. 그 모습을 모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을 다가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은 배타적인 말씀이 아니라, 매우 포괄적이고 긍정적인 말씀이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이 말은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배타적인 진술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생명이시다라고 하는 우주적인 선포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 생명, 즉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가르침), 죽음(십자가)와 부활에 관심을 집중하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생명을 건다. 그것이 곧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1장에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짧은 비유라서 그것을 그대로 옮겨 본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28-32).

 

우리는 어떻게 자연과 율법과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이처럼, 신앙 있는 자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워하며 찬양하는 자가 신앙 있는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율법(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소생되고 지혜롭게 되고 마음이 기쁘고 눈이 밝아진 자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열매를 보면 그가 신앙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12장이 증거하는 메시지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12:33-37)

 

(자연)와 율법(성경)과 그리스도에 드러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정말로 만났는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관심이 있는가? 거기에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무엇보다 궁극적 생명 사건이고,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시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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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2. 05:57

야곱의 결혼

창세기 35

(창세기 29:1-30)

 

야곱은 지팡이 하나 들고 집을 나섰다.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하란 땅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피신 하는 중이다. 그가 걷는 길은 불안하다.

 

잃어버렸습니다 /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 두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어 / 길게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시 <> 전문)

 

야곱은 길을 걸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있는 길을 걸었다. 아침에 출발한 길은 저녁에 당도하고, 끝없이 걷다 멈춰선 곳에 놓여 있는 돌 하나를 베개 삼아 길 위에서 잠을 청했다. 야곱은 돌 베개를 베고 바로 누웠다. 하늘이 보였다. 하늘은 까맸다. 까만 밤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별들은 눈에 부딪히는 순간 눈물로 변했다. 벌거벗긴 채 내몰린 한 마리 어린 짐승처럼 야곱은 울었다. 눈물로 자기 안에 있는 부끄러움이 씻어질 때까지 울었다. 그리고 잠 들었다.

 

야곱은 꿈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꿈 속에서 만난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깨끗이 씻겨진 야곱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듯이, 가인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5).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희망을 품고 길을 다시 걸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부끄러웠던 마음은 이제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열심히 걸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땅을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며칠을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는 진술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뒤 품게 된 희망과 맞닿아 있다. 야곱은 그 땅에 이르러 눈을 들어 주변을 자세히 보았다. 그가 그 땅에서 처음 발견한 것은 우물이었다.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He looked and saw a well in the field)”(2). 성경에서우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모두 새로운 사건이 전개되고, 하나님의 복이 발생한다. 야곱의 고된 여정 가운데 우물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그가 인생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복이 그의 인생 가운데 창조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우물과 관련된 중요한 일화들을 보자. 리브가도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온 아브라함의 종을 우물가에서 만났고(24:16), 후에 십보라도 남편이 된 모세를 우물가에서 만났다(2:15-17). 우물은 하나님의 복의 상징이며, 생명을 공급받는 장소였다. 이렇듯, 야곱이 길을 걷다 우물을 만나게 됐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그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야곱은 우물을 만났다. 그는 우물에 가서 물 한 잔 얻어 먹으며 생기를 되찾았고, 우물을 들여다 보며 우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시 <자화상> 전문)

 

야곱은 우물 속에서 미워할 수 없는 한 사람을 발견한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우물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장소이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삶 속에 펼쳐진다는 것을 뜻한다.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셨던 것과 다르지 않다. 야곱은 고향 땅에서 부모님 곁을 떠나올 때 이러한 약속을 받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28:3). 우물에서 무엇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야곱은 우물에서 만난 동방 사람들에게 혹시 라반을 아냐고 묻는다. 자신들은 하란 땅에서 왔고 라반을 안다고 대답한다. 삼촌 라반의 안부를 물은 뒤, 이어지는 장면은 기적과 같다. 다름 아닌,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이 삼촌 라반의 양 떼들을 몰고 그가 서 있는 우물가로 오고 있었다. 우물에서 야곱과 라헬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야곱은 라헬이 몰고 온 양 떼에게 우물물을 먹이고, 자기의 신분을 밝힌 뒤, 라헬을 붙들고 운다. 그간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이다.

 

야곱은 삼촌 라반을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물은 뒤, 하란 땅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삶은 그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시 <새로운 길> 전문)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편안하게 지내다, 이제 본격적인 생활인으로서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말하라”(15). 결혼을 위해서는 지참금이 필요했던 시대에 살던 야곱은 부모님을 떠나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결혼을 위한 지참금이 없었다. 야곱은 결혼을 위해 지불해야 할 지참금을 자신의 노동력으로 대신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18).

 

속임수로 남의 것을 빼앗기만 하며 살았던 야곱의 인생이 달라졌다. 야곱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원했다. 고대 근동의 풍습을 기록하고 있는 누지 문서에 따르면 지참금은 대개 은 30-40 세겔 정도이다. 10 세겔은 목자의 1년 임금에 해당하므로,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겠다고 한 것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통상 지불해야 하는 지참금보다 많은 액수를 지불한 것이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 <십자가> 전문)

 

우리 인생 가운데 요행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이다. 속이고 빼앗는 것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 대가는 혹독하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열매가 달고 영광스럽다.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속이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가는 책임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요행을 바라며 가는 길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걷는 길은 겉으로 보기에 같아 보이지만 차원이 다른 길이다.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나 그 열매가 다르다. 길을 가며 통과하게 될 시간의 질이 다르다.

 

야곱은 이제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담지한 자로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희망 가운데 살게 되었다. 그는 라헬을 아내로 맞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라헬을 위해, ‘모가리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흘렸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20).

 

칠 년을 며칠 같이 성실하게 일한 야곱에게 드디어 결혼식 하는 날이 다가 왔다. 야곱은 삼촌 라반과 맺은 계약대로 칠 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이제 그의 권리를 행사한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21). 라반도 야곱의 요구를 묵살하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며 결혼식을 거행한다. 잔치가 끝나고 밤이 왔다. 이제 야곱은 라헬에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라반은 라헬 대신에 레아를 야곱에게로 들인다. 밤에 품었던 여인이 라헬이 아니라 레아라는 것을 아침에야 비로소 알게 된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 따진다.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25).

 

이 일을 놓고 야곱과 라반 사이에 주고 받은 말은 모두 야곱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야곱이 라반에게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한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다가왔다. 자기 자신이 속이는 자였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속이는 자는 달콤하지만, 속임을 당한 자는 쓰다. 야곱은 그 쓴 맛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라반은 야곱에게 이렇게 변명한다.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26). 이 말은 형보다 앞서려 했던 야곱의 행적에 대한 고발로 작용했다. 야곱은 라반에게 더 이상 따져 들 수 없었다. 그래서 야곱은 삼촌 라반의 요구대로 칠 일 동안의 레아와의 결혼식을 마치고, 그 이후에 라헬을 아내로 맞이 한다. 또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대가로 지불해야 할 지참금을 칠 년 동안의 노동으로 다시 지불한다.

 

야곱에게 있어 두 번째 칠 년은 단순한 지참금이 아니었다. 속이는 자로 살던 야곱이 이제 속임을 당하는 자로서 겪게 된 아픔 가운데, 지난 날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참회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참회록을 쓰지 않은 인생은 진정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내 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24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 시 <참회록> 전문)

 

이렇듯 야곱의 결혼은 참회의 시간이요, 참회로부터 맺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었고, 레아와 라헬은 실바와 빌하를 몸종으로 얻었다. 야곱의 참회와 라반의 속임수, 그리고 이 네 여인의 역동적인 인생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무엇을 만들어 가게 될 지, 우물 들여다 보듯, 가만히 들여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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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